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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자동차 세상/순위와 데이터로 보는 자동차 정보

50년간 유럽을 지배했던 자동차들

얼마 전 독일 온라인 자동차 매체 모터1에 지난 50년간 유럽에서 가장 많이 팔린 자동차 리스트가 올라왔습니다. 어떤 모델들이었을까요? 연간 판매량 기준 1위를 차지한 모델들인데 간단하게 따라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1973~1978 : 피아트 127

사진=피아트

1973년 피아트의 소형 해치백 127이 유럽 신차 시장 왕좌에 올랐습니다. 850이라는 모델의 후임이었던 이 차는 그해 유럽 올해의 차에 뽑혔습니다. 가솔린과 디젤 엔진 모두 적용되었던, 전장이 3.6m 수준의 아주 작은 모델이었죠. 가솔린 모델의 경우 최고 47마력의 엔진이 들어갔는데 그 당시 유럽 기준으로는 평균적인 수준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무려 6년간 유럽에서 가장 많이 팔린 모델이라는 영예로운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데요. 1983년에 우노라는 후속 모델이 나왔지만 1987년까지 판매가 되었고 남미에서는 1997년까지 10년 이상 더 생산이 되었을 정도로 세계적으로도 인기를 얻었던 모델이었습니다.

*참고로 127에 왕좌를 내준 것은 폴크스바겐의 비틀이었는데요. 수년간 1위 자리를 지켰습니다.

 

1979~1982 : 르노 5

사진=르노

르노가 1972년부터 1996년까지 생산한 소형 해치백이자 당시 프랑스 도로를 뒤덮었던 국민차 르노 5’입니다. 관심 속에 생산이 되었지만 피아트 127의 기세를 쉽게 꺾지 못했는데요. 결국 치열한 판매전을 통해 6년 만에 127을 따돌리게 됐습니다.

개발은 60년대 후반부터 시작되었죠. 마케팅 담당자가 이 차의 개발을 총괄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후 고성능 모델인 알피느 터보 같은 것도 크게 관심을 끌기도 했습니다. WRC 그룹B 출전용으로 개조한 맥시 터보 같은 건 출력이 350마력으로 괴물 그 자체였습니다. 누구나 사서 탈 수 있는 양산 베스트 모델이 괴물차로 업그레이드되었다는 것도 르노 5’의만의 자랑스러운 역사가 아닐까 싶습니다.

 

1983~1996 : 폴크스바겐 골프 2, 3세대

사진=폴크스바겐

드디어 골프의 등장입니다. 그런데 1974년 첫선을 보인 1세대는 독일에서 출발과 함께 큰 인기를 끈 것과 달리 유럽 시장 1위 타이틀은 1세대 마지막 해, 그리고 2세대 출시의 해인 1983년 처음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때를 시작으로 골프 지배가 본격적으로 이뤄집니다.

2세대 골프는 1세대에는 없던 ABS가 처음 적용됐습니다. 또 골프의 사륜구동 모델도 이때 선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여러 변형 모델이 나왔는데요. 이런 골프의 유럽 지배력은 3세대로 넘어오면서 더 굳건해집니다. 골프의 1열 전 좌석 에어백 적용이 이때 이뤄졌습니다. 3세대는 유럽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거의 5백만 대 가까이 팔렸습니다. 그것도 1, 2세대에 비해 판매 기간이 짧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1997 : 피아트 푼토

1세대 푼도 / 사진=피아트

골프 전성시대였던 당시 유럽에서 특이한(?) 일이 벌어집니다. 피아트의 소형 모델인 푼토가 1997년 유럽 시장에서 판매 1위를 달성한 겁니다. 푼토는 골프보다 작은 소형 해치백이었고, 차가 그렇게 좋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할아버지 격인 피아트 127의 유전자는 역시 대단했는데요. 경제성을 앞세워 골프를 밀어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3세대 푼토 / 사진=피아트

개인적으로 3세대 푼토를 잠깐 독일에서 탄 적이 있습니다. 주로 독일 모델들을 타다가 유일하게 6개월 정도 운전을 해 본 이탈리아 소형 모델이었는데요. 엔진 문제로 정비소를 가야 했던 유일한 경험을 안겨주었던 모델이기도 했습니다. 3세대의 경우 디자인이 상당히 좋았는데 나중에라도 이 스타일이 반영된 전기차 푼토가 나와주면 어떨까 싶습니다.

 

1998~2002 : 골프 4세대

예쁜 전면의 4세대 골프 / 사진=폴크스바겐

푼토에게 잠시 자리를 내주었던 골프가 다시 1위 자리에 올랐습니다. 4세대 골프는 등장해서 퇴장할 때까지 줄곧 유럽 시장에서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자동차였습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디자이너 하르무어트 바르쿠스의 작품이기도 했습니다. 4세대부터 현대 골프의 형태가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2003 : 푸조 206

사진=푸조

2000년대는 유럽 시장에서 다양한 모델이 높은 판매량을 보이며 치열한 시장 쟁탈전을 벌였던 시기였습니다. 골프 4세대 단종을 알리던 2003년 빈틈(?)을 노리듯 푸조 206이 치고 들어오며 새로운 강자의 등장을 알렸습니다. 새로운 강자라고는 했지만 206 1997년에 이미 등장을 한 모델입니다. 그러니까 꽤 오랫동안 시장에서 버틴 것이죠. 그리고 결국 1위 자리를 경험할 수 있게 됐습니다. 디자인에서 푸조의 감각을 다시 한번 멋지게 보여준 모델이라 하겠습니다.

 

2004 : 골프 5세대

5세대 골프 / 사진=폴크스바겐

4세대의 영광을 이어갈 것임을 확신했던 5세대 골프는 하지만 앞서 소개한 것처럼 여러 경쟁자와 1위 자리다툼을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전작들이 누린 영광을 1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기간만 누립니다. 개인적으로 5세대 골프의 뒷모습이 가장 이쁘게 보이는데요. 이처럼 스타일에서도 관심을 끌었던 5세대였지만 안전성 측면에서도 의미 있는 진전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루프 레이저 용접을 하면서 특유의 두툼한 C필러와 함께 전복 시 안전한 모델이라는 이미지를 더욱 강화한 겁니다. 차체 강성, 충돌 안전성 등의 개념을 대중화하는 데 의미 있는 역할을 한 모델이었죠. 자동차 팬이 아니더라도 들어봤을  페터 슈라이어의 대표작 중 하나입니다. 페터 슈라이어는 아우디와 폴크스바겐 등에서 일한 독일인 디자이너로 현대차의 디자인을 오랫동안 이끌어온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2005~2006 : 오펠 아스트라 H

사진=오펠

독일에는 골프의 라이벌이라 불리던 해치백이 1990년대 들어서며 등장합니다. 오펠 아스트라인데요. 오펠은 독일 브랜드이지만 미국 GM이 당시 소유하고 있던 브랜드였습니다. 그리고 아스트라는 품질과 성능, 판매량 등에서 골프의 적수가 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2005년과 2006, 3세대 아스트라는 2년 연속 유럽 시장을 제패했습니다.

이전까지 다소 밋밋했던 디자인이 이 3세대에서는 크게 개선이 되었고, 오펠만의 색깔을 보여줬습니다. 적응형 헤드램프나 디지털 라디오 등, 당시로는 대중적인 준중형 모델에 파격적인 새로운 기능을 적용했습니다. 이 아스트라가 유럽에서 1위를 하던 때가 오펠 브랜드 전체의 전성기이기도 했죠.

 

2007 : 푸조 207

207 CC / 사진=푸조

아스트라의 질주는 이듬해인 2007년 새롭게 등장한 206 후속으로 등장한 207로 인해 막히게 됩니다. 푸조 소형 해치백의 존재감을 정말 제대로 알린 모델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컨버터블 모델인 207 CC는 유럽에서 큰 사랑을 받기도 했습니다. 일부 품질 논란으로 약간 아쉽기도 했지만 208 나오기 전까지 푸조의 효자 모델로 유럽 전역에서 사랑받았습니다.

 

2008~ 2021 : 폴크스바겐 골프 6, 7, 8 세대

사진=폴크스바겐

골프의 이름이 1위 자리에 다시 새겨진 것은 2008년입니다. 발터 드 실바가 세련되게 다듬은 6세대 골프부터 시작해 8세대까지 14년 연속 골프는 유럽 자동차 시장 판매 1등의 자리를 누구에게도 내주지 않았습니다. 독일인들에겐 국민차로 불린 골프였지만 그 골프가 유럽인들 기준으로 마냥 가벼운 마음으로 지갑을 열기 어려운 모델이도 했는데 6세대부터 그런 분위기가 더욱 선명해졌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동글동글한 골프의 이미지가 7세대부터 바뀌는데 이런 선택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2013년부터 판매가 시작된 골프 7세대는 더 커지고 더 무거워졌습니다. 하지만 가격은 6세대와 차이가 없었죠. 더 커진 골프를 좋아한 이들도 많았으며, 또 이런 변화를 아쉬워한 유럽인들 또한 많았습니다. 끝 모르고 이어질 줄 알았던 골프의 유럽 시장 인기는 2019년 등장한 8세대를 끝으로 힘을 잃어가기 시작합니다.

전기차 시대가 열리고 있었고, SUV의 열풍이 유럽에서도 더 커졌기 때문입니다. 골프의 위기는 외부에도 있었지만 이런 분위기 속에서 내부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했습니다. 티구안과 티록과 같은 SUV는 물론, ID. 시리즈가 나오며 전기차와 SUV가 골프의 지배력을 약화했습니다. 물론 회사 내부적으로 갈팡질팡하며 변화에 명확하게 대응하지 못한 모습도 골프가 유럽 1위 자리에서 더는 설 수 있게 많은 이유가 되기도 했습니다.

 

2022 : 푸조 208 

사진=푸조

골프가 힘을 잃어갈 때 빠르게 치고 올라온 건 푸조 208이었습니다. 마치 207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죠. 특히 2019년 나온 2세대 208은 파격적이고 미래지향적인 디자인으로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실내와 실외 모든 부분에서 푸조가 얼마나 디자인을 잘하는 회사인지 다시 한번 인식시킨 것인데요. 무엇보다 전기 모델인 e-208이 유럽인들에게 전기차 붐과 함께 전체 판매량에 힘을 실어줬습니다. ‘유럽 올해의 차’에 선정됐습니다.

 

2023 : 테슬라 모델 Y

사진=테슬라

유럽 시장에서 판매량 1위 자리는 늘 소형차, 준중형 모델의 차지였습니다. 물론 유럽 브랜드의 것이기도 했고요. 하지만 지난해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미국 회사에서 만든, 그것도 중형의, 그것도 전기차가 판매 전체 1위를 달성한 것입니다. 짧은 진출 시기였음에도 테슬라는 자동차의 애플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유럽 전역에서 성공의 길을 달렸습니다. 특히 모델 3 판매가 폭발적으로 늘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모델 3도 달성하지 못했던 1위 자리를 모델 Y가 차지한 것입니다. 모델 3의 역할이 컸고, 그 효과를 모델 Y는 제대로 누린 겁니다.

하지만 이런 전기차의 놀라운 질주는 2024년까지 이어지긴 힘들 듯합니다. 여러 이유에서 전기차에 대한 소비자의 관심이 줄었고, 고스란히 판매량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를 우리나라에 한 번도 상륙한 적 없는 루마니아 모델 다치아 산데로가 차지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습니다.

산데로 / 사진=다치아

다치아는 르노그룹이 소유한 루마니아 자동차 브랜드로, 구형 부품을 이용해 아주 저렴한 모델을 내놓으며 빠르게 성장한 곳입니다. 그리고 산데로는 온전히 가격을 무기로 빠르게 유럽 시장에서 치고올라왔습니다. 지금이야 중국에서 들어오는 저렴한 자동차가 유럽에 많아지고 있지만 다치아는 중국 모델들이 들어오기 전까지 유럽에서 가장 싼 차를 제공했습니다. 심지어 중국산 자동차들이 들어오는 요즘을 기준으로 해도 다이차는 가격 경쟁력이 여전히 살아 있다고 평가됩니다.

이렇게 완전히 유럽에서 가성비 브랜드, 가성비 모델로 자리한 다치아와 산데로는 높은 확률로 올해 유럽에서 골프 등을 따돌리고 1위 타이틀을 차지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과연 남은 기간 동안 어떤 일들이 유럽 자동차 시장에서 벌어질까요? 올해의 결과도 흥미롭게 지켜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