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65세 이상의 노인(?)들을 대상으로 운전 능력을 평가해서 야간과 고속도로 운전 금지 등을 조건으로 하는 새로운 자동차 면허증을 발급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관련 소식에 반응은 뜨거웠습니다.
일부 언론은 이 소식을 전하며 미국, 독일, 일본 등, 일부 선진국에서도 조건부 운전면허 제도를 운용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다른 나라는 잘 모르겠고, 일단 제가 그나마 좀 알고 있는 독일의 경우를 봤습니다. 해당 기사에는 독일은 의사 진단에 따라 운전자에게 맞춤형 조건부 운전을 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야간 운전이 어려운 운전자에겐 주간 운전만, 장거리 운전이 어려운 이에겐 자택 반경 몇km 이내 운전만 허용하고 있다는 얘기였는데요.
그런데 이는 일부만 맞는 얘기입니다. 기사대로라면 독일은 65세가 넘어가면 의무적으로 의사에게 가서 검사를 받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는데 제가 아는 바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추돌사고를 일으킨 운전자가 고령이고, 신체적으로 운전이 적합하지 않다고 경찰이 판단되면 의사의 소견을 듣게 합니다. 여기서 의사가 야간 운전은 무리라고 하면 경찰은 그걸 듣고 결정을 내리는 것이죠.
누구나 일정 연령이 되면 의사로부터 진단을 받는 게 아니라는 얘깁니다. 독일은 드물게 면허 적성 검사가 전혀 없는 나라입니다. (트럭은 예외) 한번 면허를 취득하면 특별한 경우가 있지 않는 한 적성 검사 없이 평생 운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EU 의회는 70세 이상의 운전자들이 5년마다 자신이 운전하기에 적합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에 동의했습니다.
쉽게 말해 신체적으로 운전에 지장이 없다는 의사 진단서가 있어야지만 (70세 이상 운전자도) 운전을 할 수 있게 결정한 겁니다. 그런데 EU는 이를 강제한 게 아닙니다. 국가별로 알아서 새로운 규정을 적용하기를 원하는 눈치입니다. 구체적 내용은 6월 유럽의회 선거가 끝난 후 다시 다뤄질 거라고 합니다.
이런 유럽 의회 결정에 독일 정부는 공개적으로 반대 의사를 표했습니다. 단순히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개인이동권리를 제한해서는 안 된다는 게 핵심 이유입니다. 하지만 독일 내에서도 정부의 이런 태도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상당히 높습니다. 고령자 교통사고가 더 위험한 경우가 많은데 이를 정부가 방치하는 것도 직무 유기라는 의견들이 오랫동안 있어 왔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독일에선 왜 의무 적성 검사 등을 통한 고령자 운전 제한 조치 등이 이뤄지지 않는 것일까요?
우선 앞서 언급한 것처럼 개인이동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다는 이유가 있습니다. 독일은 우리나라처럼 수도권이나 대도시 중심의 삶이 아닙니다. 인구 1만 명 이하의 도시에 사는 국민 비중이 1/3에 달할 정도로 곳곳에 흩어져 살고 있습니다. 16개의 권한이 강한 연방제 국가라는 게 이런 주거 형태의 주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시골에 사는 이들, 주변 도시로 이동을 해야 하는 노인들의 경우 자동차는 중요한 이동 수단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독일의 고령 인구 비율, 그러니까 65세 이상이 차지하는 비중은 전체 인구의 22% 수준입니다. 우리가 이 연령대 비중이 20%를 넘어가면 초고령사회라고 부르며, 우리나라도 곧 여기에 도달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독일은 이미 이를 넘어섰습니다. 이 연령대 국민들은 독일에서 정치적으로도 상당히 영향이 클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오랫동안 독일 교통 정책을 책임지는 교통부장관은 보수당에서 나오고 있다는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고령 운전자의 교통사고 비율이 인구수에 비해 더 낮다는 점도 정책을 강하게 밀어붙이지 못하는 이유가 되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고령 여성들의 운전 비율이 낮고, 고령 운전자의 이동 거리도 비교적 짧다는 것도 적성검사 반대의 명분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반론도 만만치 않습니다. 특히 70세가 넘어가는, 75세 이상의 운전자 교통사고는 인명사고 비중이 크게 증가하기 때문인데요. 그래서인지 덴마크 같은 곳에서는 75세부터 의사의 건강검진을 필수적으로 받도록 하고 있습니다. 더 심한 곳은 포르투갈입니다. 50세 이상 운전자부터 면허증 갱신을 해야 하고 60세 이상부터는 의사의 진단서가 필요합니다. 70세부터는 2년마다 의사 진단서를 받아야 운전이 가능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독일엔 이런 제도가 없습니다.
그래서 독일에선 고령층 운전 문제가 우리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민감 이슈가 되고 있습니다. 지금처럼 운전자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도록 하자는 목소리도 높지만 반대로 이제는 뭔가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의견도 굉장히 높습니다. 독일 정부는 사이에 끼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약간은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이는데 어떻게든 결론이 나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개인적으로 이 고령 운전자 운전 제한 문제는 단순히 65세라는 나이가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정부도 워낙 여론이 좋지 않아서인지 나이에 기준을 두지 않고, 특정 연령을 대상으로 하지 않았다고 얘기했습니다. ‘의료적, 객관적으로 운전자 능력을 평가한 뒤에 나이와 상관없이 신체, 인지 능력이 현저히 저하돼 교통사고 위험성이 높은 것으로 나타난 운전자만을 대상으로 한다.’고 해명했다고 언론들이 전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의료적, 객관적으로 능력을 평가는 방법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현재의 적성검사 수준으로 이를 정확하게 분별해 낼 수 있을까요? 저는 고령 운전자 조건부 면허제를 위해서는 적성검사를 강화하고 제대로 시스템을 다듬는 것부터 순서가 아닌가 합니다. 그리고 고령 운전자의 경우는 덴마크처럼 75세부터, 혹은 70세 이후부터 3~5년 정도의 기간을 두고 정밀 검사를 받게 해 이를 통과하면 면허를 갱신하는 방법을 고려해 볼 수 있을 듯합니다.
독일은 법으로 강제하고 있진 않지만 자동차 단체나 기관들이 자체적으로 고령 운전자를 위한 운전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또 고령 운전자들이 자발적으로 면허학원에서 반나절 정도 이론과 실제 테스트를 받아 자기 운전 상태를 측정하는 프로그램도 운영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고령 운전자 스스로 참여해서 자신의 상태를 확인하는 다양한 제도가 마련될 필요도 있겠습니다.
고령 인구 증가, 그리고 평균 수명이 늘어나는 등, 우리나라도 고령화 사회에 맞는 합리적 운전면허 시스템이 마련될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면허 취득 체계 그 자체부터 검토해야 합니다. 너무 쉽게 면허를 따게 하는 게 아닌지부터 반성해야 한다는 얘깁니다. 그리고 고령 운전자 안전운전 문제를 실질적으로 높일 수 있는 방안을 따져야 합니다. 다만 그 과정은 운전자들이 누구나 알 수 있게 투명했으면 합니다. 밀폐된 공간에서가 아닌, 보다 열린 공간에서 고령자 안전 운전 문제를 정밀하게 따지고 대안을 함께 고민해 보자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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