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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자동차 세상/독일의 자동차 문화 엿보기

'중국 도와줘~' 폴크스바겐의 굴욕

폴크스바겐이 중국의 자동차 회사 샤오펑과 기술협력을 하기로 발표했습니다. 뭐 이런 형태의 자동차 회사 간 기술 협력 관련 기사는 그간 엄청나게 많이 나왔습니다. 특별해 보일 것도 없죠. 그런데 이번은 그 결이 다릅니다. 중국 브랜드가 폴크스바겐으로부터 기술 이전을 받는 게 아니라 폴크스바겐이 중국의 신생 전기차 브랜드에 도움을 요청했기 때문입니다.

 

폴크스바겐은 샤오펑과 기술 협정을 맺으면서 그들 주식 4.99%를 소유하게 됐습니다. 9천억 원을 투자한 결과인데요. 샤오펑의 전기차 G9의 플랫폼을 이용해 두 대가량의 중국 시장용 폴크스바겐용 전기차를 만드는 것이 최우선 계획이라고 전해졌습니다. 또한 오토모티브뉴스의 보도에 따르면 이 플랫폼을 사용하는 대가로 폴크스바겐은 매년 기술료를 지불해야 합니다.

 

정확한 액수는 모르겠지만 중국 자동차 회사가 독일 자동차 회사로부터 기술료를 받는 것은 아마 처음 있는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전기차 시대가 오니 이런 뉴스도 듣게 되는군요. 그런데 해당 플랫폼은 샤오펑의 최신 플랫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이처럼 엄청난 돈을 들여, 또 자존심을 구기면서까지 폴크스바겐이 손을 내민 이유는 뭘까요? 도저히 지금 수준으로는 기술과 가격 경쟁력에서 앞서는 중국 전기차를 따라잡기 어렵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사진=VW

 

현재 중국 시장은 전기차 쪽으로 빠르게 향하고 있습니다. 2025년에는 중국에서 팔리는 신차 절반 정도가 전기차가 될 것이라고 예상되고 있습니다. 내연기관 판매량이 빠르게 줄고 있는 건데요. 독일 자동차 회사들에겐 고민되는 흐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전기차 시장에서 중국 등, 기술과 가격 경쟁력을 함께 가진 회사들과 경쟁이 제대로 안 되기 때문입니다.

 

원가 부담을 가진 폴크스바겐은 테슬라와 중국산 전기차들의 가격 경쟁력 앞에 속수무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 전기차 소프트웨어 기술, 또 전기차와 결합하는 자율기술 주행 등에서 눈에 띄는 성과를 내지 못하는 폴크스바겐이 급하게 된 겁니다. 당장 해법을 찾기 어려웠던 그들은 화웨이 등과 협력을 고려했지만 이게 제대로 안 되었고, 다른 가능성을 찾던 VW 눈에 기술력 좋은 샤오펑이 들어온 겁니다.

 

샤오펑은 이제 10년 차에 들어서는 호적에 잉크도 안 마른 신생 전기차 브랜드입니다. 알리바바의 투자를 받았고 테슬라의 오토파일럿 개발팀에 있던 엔지니어가 이곳에서 주행보조 장치를 개발하면서 빠르게 고급 전기차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습니다.

 

샤오펑 입장에서도 폴크스바겐의 자본과 대규모 양산 자동차 시장에서의 노하우를 얻을 수 있다면 치열한 전기차 경쟁에 큰 도움이 될 것이기에 이번 투자 및 기술 협력에 적극 나선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 폴크스바겐이 샤오펑 외에도 리프모터라는 중국 전기차 스타트업과 파트너십을 구축할 것이라는 소문이 나오고 있습니다.

 

같은 그룹에 있는 아우디 역시 중국 상하이자동차그룹과 중국 내 판매를 위한 전기차 개발에 나서기로 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역시 가격 경쟁력을 만들기 위한 아우디의 고육지책이 아닌가 합니다. 언론들은 합종연횡이다 기술 협력이다 해서 관련 기사들을 내고 있는데 폴크스바겐 그룹이 중국 전기차의 경쟁력을 돈으로 산 것이라고 보는 게 냉정한 평가가 아닌가 합니다.

 

그런데 폴크스바겐이나 아우디가 느끼는 이런 위기감은 중국 내에서만 있는 게 아닙니다. 유럽 대륙 전체로 중국산 전기차들이 빠르게 퍼져나가고 있고, 이에 따라 유럽을 본진으로 둔 유럽 자동차 회사들, 그리고 유럽에서 전기차 장사를 야심 차게 하려는 미국과 일본, 그리고 한국 자동차 회사들까지 모두 영향을 받게 됐습니다.

 

이미 유럽 시장을 점령한 테슬라는 판매가를 크게 낮추며 후발 주자들에게 충격을 주었고, 여기에 가격 경쟁력과 나쁘지 않은 기술력을 보유한 중국산 전기차들까지 치고 들어오면서 협공을 당하는 상황에 처한 것입니다. 결국 다른 제조사들도 유럽 시장에서 판매가를 낮추려는 시도를 해야 하는데 문제는 제조 원가가 높은 완성차 업체들의 경우 마진율이 낮기 때문에 마냥 가격 경쟁에 발을 담그기도 어렵습니다.

 

비야디(BYD)와 같은 중국산 전기차 브랜드는 유럽에서 하루게 다르게 성장 중인데 과연 지금 상태로 테슬라 및 중국산 전기차들과 기존 완성차 업체들이 제대로 경쟁을 할 수 있을까요? 이런 상황에서 폴크스바겐이 먼저 자존심을 내려놓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생존이 우선이니까요. 중국시장부터 시작해 가격을 낮출 수 있는 방안을 찾아 그것을 토대로 가격 경쟁에 뛰어들 계획이 아닌가 합니다.

 

최근 스텔란티스가 2 5천 유로 이하의 소형 전기차를 내놓아 중국 전기차와 경쟁하겠다고 밝혔는데요. 일부 프리미엄 모델을 제외하면 앞으로의 전기차는 가격 경쟁력이 가장 중요한 생존 요소가 되지 않겠나 생각됩니다. 과연 이런 흐름이 시장에 어떻게 영향을 끼칠지도 지켜볼 대목입니다. 다만 가격 하락 경쟁이 당장은 소비자에게 도움이 되지 않겠나 기대됩니다.

사진=VW

 

전기차 시대가 오면서 자동차 시장, 자동차 경제의 틀이 그 근본부터 바뀌고 있는 느낌입니다. 기존의 자동차 제조 강자들, 높은 브랜드 가치로 시장에서 굳건하게 지위를 유지하던 기존 업체들이 과연 앞으로도 그 지위를 계속 이어갈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게 됐습니다. 폴크스바겐이 중국 신생 전기차 회사에 손을 내민 것이 이런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사건이 아닌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