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지인으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독일을 대표하는 자동차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저는 3개의 모델을 꼽았습니다. 고급 세단의 대명사인 메르세데스 벤츠 S클래스, 그리고 해치백의 상징으로 독일 국민차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골프, 마지막으로 스포츠카의 상징 포르쉐 911.
개인 취향을 떠나 독일 자동차를 대표하는 모델로 이 세 개를 꼽은 것에 데에 큰 이견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세 가지 모델 모두 상당한 존재감을 보여주는데 그중에서도 포르쉐 911은 누구나 한 번쯤은 타보고 싶어 하는, 스포츠카의 로망으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죠. 이 911이 지난 5월 11일, 백만 번째 모델을 생산했습니다.
백만 번째 911. 박물관 전시될 예정 / 사진=포르쉐
독일 언론에 집중 조명받은 911
특정 자동차가 백만 대 생산을 돌파했다는 소식은 사실 그리 큰 뉴스는 아니죠. 코롤라나 골프 같은 자동차들은 얼마나 많이 팔리고 있습니까. 하지만 포르쉐 911은 고급 스포츠카라는 점에서 의미가 다르며, 특히 포르쉐에 대한 자부심 가득한 독일인들에겐 더욱 특별하게 다가선 듯 보입니다. 공식적으로 100만 대 달성 소식이 나오기 하루 전부터 관련 기사가 독일에서 등장하더니 이후 많은 언론이 비중 있게 소식을 전했습니다.
1억이 훌쩍 넘는 고급 스포츠카가 100만 대를 넘게 생산했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닙니다. 쥐트도이체차이퉁 같은 신문은 ‘가장 민주주의적인 스포츠카’라는 제목으로 911 백만 대 달성을 축하하기도 했죠. 고급 스포츠카 시장에 좀 더 대중이 가까이할 수 있게 했고, 출퇴근용으로도 스포츠카를 사용할 수 있게 했다는 것 등이 높게 평가된 것으로 보입니다.
100만 번째 모델임을 알리고 있다 / 사진=포르쉐
포르쉐의 나라답게 독일에서는 귀한(?) 1세대 포르쉐를 도로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등, 여전히 세대별로 수많은 911이 도로를 달리며 그 존재감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회사 역시 자신들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모델로 911을 꼽고 있죠. 9,1,1이라는 숫자는 회사 주요 전화번호로 쓰이며, 그 외에도 여러 형태로 911이라는 숫자가 회사에서 사용되고 있다고 합니다.
판매량 그 이상의 가치
911이 포르쉐의 대표 모델이라는 점은 분명하지만 판매량만 놓고 보면 비데킹 회장의 회생술(?) 덕분에 순위는 다른 모델에 밀려난 지 오래됐습니다. SUV 카이엔은 포르쉐의 정체성에 대한 많은 비난을 받게 했지만 회사가 위기에서 탈출하는 결정타가 되어주었고, 가성비에서 탁월한 박스터와 카이맨 또한 포르쉐를 먹여 살리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콤팩트 SUV 마칸의 등장으로 포르쉐는 확실하게 큰 이익을 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2016년 기준으로 911은 전 세계 시장에서 32,365대가 판매됐죠. 그에 반해 마칸은 95,642대가 팔려나갔습니다. 3배 가까이 더 팔린 마칸을 911이 판매량에서 당해낼 재간은 없습니다. 하지만 911의 높은 가격을 생각하면 현재 판매량은 결코 무시할 수 없습니다. 911과 경쟁하는 비슷한 가격대와 성능의 모델들 모두의 판매량을 합쳐도 911을 당해내기 쉽지 않기 때문이죠. 내구성, 브랜드 가치, 성능, 존재감 등, 어느 것 하나 911은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간 911의 판매는 어떤 변화를 겪었을까요? 이쯤에서 911의 세대별 판매량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과연 어떤 모델이 얼마나 시장에서 선택을 받았는지 독일 위키피디아와 유럽 최대 포르쉐동호회(PFF) 등의 자료를 토대로 911 판매량을 알아 봤습니다. 다만 공식 단종 이후에도 주문 조립된 것, 그리고 프로토타입과 특별 모델 등의 범위를 어디까지로 보느냐 등의 문제로 집계 결과가 조금 다를 수 있다는 점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1세대 Ur-911 (판매 기간 : 1963~1973년)
1세대 911 / 사진=포르쉐
처음에 901이란 모델명으로 나왔다 상표권 문제로 911로 바뀐 1세대는 여러 파생 모델을 만들어졌습니다. 이때마다 911 숫자 뒤에는 알파벳이 붙었는데요. 독일에서는 이 1세대를 흔히 Ur-modell, 또는 Ur-911이라는 이름으로 부릅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아름다운 911이라 생각합니다. 1세대는 만 10년 동안 약 81,032대가 팔려나갔습니다.
2세대 G-model (판매 기간 : 1974~1989년)
2세대 911 / 사진=포르쉐
우리나라에서는 2세대를 흔히 1세대에 포함시키지만 독일 포르쉐를 포함 일반적으로 2세대를 G-model, 또는 ‘G 시리즈’라고 부르며 별도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1세대가 계속 알파벳을 붙여가며 성능을 조금씩 개선하거나 지역별 모델을 내놓다가 G모델부터 큰 변화를 주며 새로운 도약을 이뤄냈죠. ‘카레라’라는 이름도 이때부터 공식적으로 쓰이게 됐는데, 판매량은 긴 기간만큼 많아 약 196,397대였습니다.
3세대 964 (판매 기간 : 1988~1993년)
3세대 911 / 사진=포르쉐
전작에 비해 큰 디자인적 변화는 없었지만 사실 알고 보면 전체의 80%가 변화된 모델이기도 했습니다. 포르쉐의 위기가 본격화된 시기에 나온 모델이기도 해서 1, 2세대에 비해 판매 시기나 판매량은 상대적으로 짧고 적었습니다. 판매량은 약 63,762대.
4세대 993 (판매 시기 : 1993~1998년)
4세대 911 / 사진=포르쉐
최후의 공랭식 포르쉐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4세대 모델로, 헤드램프가 공기저항을 줄이기 위해 비스듬하게 누우며 911 특유의 똘망똘망(?)한 전면부 느낌이 많이 죽어 버렸습니다. 판매량은 약 68,680대.
5세대 996 (판매 시기 : 1997~2005년)
5세대 911 / 사진=포르쉐
공랭식 엔진의 시대를 끝내고 등장한 첫 번째 수랭식 엔진이 달린 996. 이 문제로 전통적 911 팬들로부터 비난도 많았지만 포르쉐는 변화를 통해 회사를 살리기로 결정을 내린 상태였죠. 무엇보다 헤드램프 디자인이 요상해지면서 비판을 받아야 했고, 그때문에 중고차 시세가 독일에서도 바닥 수준까지 내려가기도 했습니다. 판매량은 175,262대.
6세대 997 (판매 시기 : 2005~2011년)
6세대 911 / 사진=포르쉐
되돌아온 헤드램프가 반가웠던 997이죠. 부드러운 디자인이지만 초대 911의 느낌을 최대한 되살리려 노력한 흔적이 역력합니다. 다시 911에 관심을 끌게 했고, 포르쉐의 듀얼 클러치 변속기(PDK)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도 이때입니다. 판매 대수는 211,327대.
7세대 991 (판매 시기 : 2012~현재)
발터 뢸과 7세대 911 / 사진=포르쉐
본격적으로 연비 효율성과 배기가스 문제 등에 대비한 모델이기도 하죠. 뒷모습의 변화가 여러 얘기를 낳기도 했지만 헤드램프만 망가뜨리지 않는다면 911의 디자인은 크게 욕을 먹을 일은 없어 보입니다. 앞서 알려드린 것처럼 지난 5월 11일 생산 백만 대를 달성했으며, 7세대 판매량만 놓고 보면 약 203,000대가 현재까지 누적 판매됐습니다.
포르쉐는 2018년 8세대인 992 모델을 내놓을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1년에 약 3만 대 조금 넘는 판매량을 보이기 때문에 8세대가 나오기 전까지 세대별 기준으로 보면 991(7세대)이 가장 많이 팔린 911이 되지 않을까 예상됩니다.
중고차 911은 복덩이?
911의 가치는 중고차 가격도 하나의 척도가 됩니다. 911 중 가장 중고차 시세가 안 좋은 것은 첫 수랭식 모델이자 헤드램프를 망가뜨린(?) 5세대 (996)였습니다. 실제로 독일을 대표하는 중고차 사이트에서 996은 2014년 평균 27,700유로에 거래가 됐습니다. 이는 현대 투산 신형 모델과 비슷한 수준이죠. 911 가격이 이만큼 떨어진 것 그 자체로 화제가 됐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불과 2년 만에 996의 평균 거래가는 41,150유로까지 급상승합니다. 한 번 폭락한 중고차 가격이 오히려 시간이 지나 큰 폭으로 이렇게 상승한 것은 흔치 않은 일입니다. 반대로 마지막 공랭식 모델이었던 4세대(993)의 경우 중고차 평균 거래 시세가 2015년에 96,000유로까지 올랐습니다. 현재는 조금 떨어진 평균 87,500유로에 거래되고 있는데, 20년 넘은 모델이 1억 전후로 거래되는 것은 911이기에 가능한 일이겠죠.
993은 현재도 찾는 이들이 꾸준해 급상승한 중고 거래가는 당분간 계속 유지될 것으로 보입니다. 3세대 964 역시 4만 유로 대에서 현재는 96,000유로까지 평균 거래가가 치솟은 상태이고, 2세대 G모델의 경우는 평균 거래가가 약 77,000유로, 1세대는 가장 비싼 평균 114,000유로에 거래가가 형성돼 있습니다.
현재 판매되고 있는 7세대 991과 1세대의 중고차 시세가 거의 비슷한데, 1세대의 경우는 웃돈을 주고서라도 사려는 사람들이 있어 팔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더 좋은 가격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한때 주춤했던 포르쉐 911의 중고차 가격이 이처럼 상승한 것은 그만큼 911을 원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을 뜻합니다. 계속해서 이런 분위기가 이어질지는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분명한 것은 현재 911의 독일 내 인기는 최고 수준입니다.
1967년 911 광고/ 사진=포르쉐
911의 역사, 계속 이어지길
포르쉐 911은 세대를 가리지 않고 지금도 2/3 이상이 운행이 되고 있다는 게 포르쉐의 주장입니다. 평균 주행거리가 짧다는 것을 감안은 해야겠지만 내구성이 뛰어난 스포츠카의 가치가 잘 드러납니다. 또 오래된 1~3세대 모델을 소유하고 있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이들이 많다는 점도 911이 높게 평가되는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합니다. 이제 포르쉐는 과거의 영광을 이어가기 위해 전기 스포츠카인 미션E의 시대를 전사적으로 준비하고 있습니다. 시대 흐름을 포르쉐 또한 거역하긴 어려워 보입니다.
이런 이유로 미션E로 대표되는 전기 스포츠카가 박서 엔진으로 대표되는 포르쉐의 새로운 대안으로, 그리고 포르쉐의 주류로 될 것인지 벌써부터 갑론을박 말이 많습니다. 강력한 배출가스 규제 정책으로 스포츠카 시장도 변화는 불가피해 보입니다. 하지만 911은 처음 시작 때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자신이 달려온 그 모습 그대로 남아주었으면 하는 게 또한 팬의 솔직한 마음입니다. 어떻게 변화하든, 911의 역사만큼은 계속되길 응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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