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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자동차 세상/Auto 이야기

죽어가던 BMW 숨통을 틔운 이세타 60주년


어느 기업이든 위기는 있어 왔습니다. 지금은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잘 나가는 독일 BMW도 숱한 위기와 이를 극복하는 과정들을 거쳐왔죠. 특히 두 번의 세계 대전은 그들에겐 기회와 위기를 동시에 가져다 주기도 했는데요. 1차 대전 때는 항공기 엔진으로 성공을 거두었지만 패전으로 비행기 엔진 제작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어쩌면 엔지니어 막스 프리츠가 만든 오토바이 R32가 없었다면 BMW는 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다시 전쟁이 발발하자 이 번에도 BMW는 비행기와 엔진에 올인 전략을 세웁니다. 비행기 엔진 제작회사로 출발한 회사임을 기억해낸다면 BMW의 비행기 집착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하지만 또 다시 독일이 패전국이 되면서 BMW는 다시 위기를 맞이하게 되죠. 이제는 비행기가 아니라 자동차와 바이크에 전념해야만 했습니다.


전후 어려운 경제 여건 속에서 BMW 경영진들은 6기통짜리 501이라는 비싼 차를 내놓으며 대 실패를 맛보게 되죠. 이후에 나온 502는 심지어 V8의 알루미늄 엔진이 들어가기까지 했는데요. 좀 팔리는가 싶던 502도 주춤하면서 뒤를 이은 503과 가장 아름다운 BMW라고 칭송 받은 507까지, 고급 모델들이 연이어 쓴 잔을 들이킵니다. 


50년대 들어서면서 적자폭이 커졌고 위기론이 대두됩니다. 아무래도 많이 팔리는 저가의 모델로 돌아서야 하는 게 아니냐는 고민들이 깊어졌죠. 하지만 당시 BMW는 이런 소형차 개발비 조차도 제대로 마련하기 어려운 상황이었고, 소형 모델 생산용이던 공장도 동독 쪽으로 넘어간 상태였습니다. 고민 속에 1954년 제네바모터쇼를 찾는 몇몇의 BMW 엔지니어의 눈에 왠 땅콩만한 이태리산 자동차 한 대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냉장고 등을 만드는 이태리 가전회사 ISO가 내놓은 초미니카였습니다.


ISO 사장과 접촉을 해보니 이미 차의 판권은 몇몇 나라로 팔려나간 상태였죠. 찬밥 더운밥 가릴 형편이 아니었던 BMW는 독일과 스위스, 그리고 북유럽 등의 판매권과 그 외 차에 관련한 권리들을 사들여 1955년에 자신들 로고를 달고 새롭게 내놓게 되는데 이게 바로 BMW 이세타(Isetta)였습니다.




이세타. 사진=BMW



응급처치 제대로 해 준 이세타

차 길이 2.285mm, 휠베이스 1,500mm에 엔진은 1기통 250cc 바이크 엔진, 그리고 3바퀴의 3인승짜리 작은 자동차였던 이세타는 사실 성인 2명이 나란히 앉기에도 좁은 그런 사이즈였죠. 하지만 경제가 안 좋은 당시 상황에서 직장인 평균 월급 반년 치에 해당하는 가격은 비싼 차를 소비하기 어려웠던 사람들에게 매력적이었습니다. 공차 중량이 350kg밖에 안되었기 때문에 연비도 좋은 편이었고 무엇보다 크기가 작아 어디든 갈 수 있었고 복잡한 곳에서 주차하기 좋았습니다. 심지어 독일에서 알프스를 넘어 이태리까지도 갈 수 있는 내구성(?)을 자랑했죠.


사진=BMW


사진=BMW

이세타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문이 하나인데 차의 앞 쪽으로 열린다는 것이었습니다. 냉장고 만들던 회사의 아이디어가 이세타만의 경쟁력이 되어 준 것이죠. 이세타는 거대한 북미대륙으로 넘어가며 다시 한 번 붐을 일으키게 되는데요. 유명한 헐리웃 스타들을 모델로 내세우거나 사진을 찍으면서 사람들의 눈도장을 확실히 받았습니다. 엘비스 프레슬리도 이세타와 사진을 찍은 적이 있는데 자신의 매니저에게 이 차를 선물했다는 얘기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헐리웃 배우 캐리 그란트와 이세타. 사진=BMW

이세타가 잘 팔려나가자 파생 모델이 연이어 나오게 됩니다. 1957년에는 4바퀴에 4인승 모델인 BMW 600이 등장하면서 두 모델은 적자에 허덕이며 법정관리나 매각설에 휩싸이고 있던 회사의 숨통의 틔워줬습니다. 1958년 경우 BMW 600이 BMW 전체 수익의 39%를, 이세타가 27%를 담당했으니 얼마나 효자 역할을 제대로 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당시는 고고모빌이나 하이켈, 또 펜트 같은 회사들이 일명 버블카로 불리던 단순 구조의 초경차들을 만들고 있던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인기도 높은 편이었지만 결국 경제가 나아지면서 더 크고 빠르고 강한 차에 대한 요구로 대부분 70년대가 들어서기 전에 문을 닫게 됩니다. 물론 이세타 역시 62년을 끝으로 생산이 중단되게 됩니다.


55년부터 62년까지 총 161,728대가 팔려나갔고, '도로 구멍 찾는 기계' '아스팔트의 고환' 등 많은 별명들이 이세타에 붙여졌습니다. 좁은 의자로 인해 연인들이 스킨십을 하기 좋다고 해서 '포옹박스'라는 달달한 별명도 가지고 있었죠. 절박함에서 내놓은 차가 그 시대의 문화 아이콘이 된 것입니다.


이세타의 성공으로 BMW는 버틸 수 있는 기초 체력을 만들 수 있게 됐습니다. 50년대 후반 다임러에 넘어갈 위기도 있었지만 대주주인 크반트 가문의 결단으로 BMW는 합병되는 위기를 넘겼고, 이후 마케팅의 천재로 불리는 하이네만을 영입해 프리미엄 브랜드 전략의 기초를 다졌고, 1970년 회장의 자리에 오른 에버하르트 폰 쿠엔하임에 의해 3,5,7시리즈의 시대가 열리려 명실공히 BMW는 프리미엄 브랜드로 자리잡게 됩니다.


이세타가 만들어진 지 60년이 됐지만 BMW 박물관에 가면 돌아다니면서 방문객들을 맞고 있는 녀석을 가끔 볼 수 있습니다. 또 독일 내에서 중고 매물 거래가 활발히 이뤄지는 편인데요. 2만 유로 정도의 높은 가격대가 형성돼 있을 정도로 인기가 있습니다. 


회사를 위기로부터 구해낸 이 땅콩만한 차는 BMW의 소중한 자산이자 문화 아이콘으로 역사에 기록된 채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개인적으로는 전기차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이세타로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어떨까 싶습니다. 충분히 그럴 만한 가치와 매력이 있는 자동차이니까요.


BMW 박물관에서 만날 수 있는 이세타. 사진=BM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