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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자동차 세상/Auto 이야기

에어백보다 더 많은 사람 살린 ESP, 개발 비화


자동차 안전은 계속 발전해 왔습니다. 초기 자동차는 완전히 개방된 형태를 하고 있었죠. 그러다 지붕과 문이 생겼고 앞유리에 와이퍼가 달립니다. 또한 차체는 점점 더 강해졌습니다. 안전벨트와 에어백 등이 개발, 적용되었고, 보다 안전하게 차를 멈출 수 있게 ABS(고착 방지 제동 시스템)가 장착됩니다. 그리고 자동차는 지금 이 순간에도 더 안전해지기 위해 계속 연구되고 있습니다. 그런데요.


이런 다양한 안전장치들 중 어떤 면에서는 안전벨트 이상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게 있는데 바로 '차체자세제어장치'입니다. ESP, 또는 VDC, DSC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데 아무래도 원조의 이름을 따 ESP(Electronic Stability Program)라고 부르는 게 편할 거 같습니다. 이 ESP가 처음 자동차에 달려 나온 지 올해로 20년이 된다고 합니다.


ESP 표시등. 사진=위키피디아



차체자세제어장치란?

쉽게 말해 자동차가 선회할 때, 혹은 운전자가 갑자기 운전대를 급히 꺾어야 하는 상황에서 차가 안전하게 자세를 취할 수 있게 해주는 장치를 말합니다. 굉장히 다양한 센서들이 차의 곳곳에 달라붙어 있고 이 센서들은 차가 속도를 내거나 노면과 마찰을 일으킬 때, 그 순간을 계산해 잘못 주행이 되고 있다고 판단하면 바로 개입해 전복되거나 경로에서 이탈되는 걸 방지하게 됩니다.


흔히 안전벨트나 에어백은 사고가 난 뒤에 작동하는 수동적 안전장치라 부르고 있고 ABS나 트랙션 컨트롤 시스템 (TCS), 그리고 ESP 등은 사고를 예방한다는 차원에서 능동적 안전장치로 부르기도 하죠. ABS는 제동력과 관련해서, 그리고 TCS는 구동 시 미끄러짐 등과 관련이 있다면, ESP는 차가 횡적 운동, 그러니까 좌우로 코너링 등을 할 때 안정적으로 돌아가도록 해줍니다. 언더, 오버스티어링과 밀접하죠. 


사진= 보쉬


사진=보쉬


우리가 잘 모르는 이름

ESP의 아버지 '안톤 판 잔텐'

이런 ESP는 메르세데스 벤츠와 독일의 부품그룹 보쉬가 공동개발한 것으로 보통 알려져 있는데요. 엄밀하게 따지면 개발은 보쉬의 몫이었습니다. 벤츠도 자체적으로 같은 개념의 기술을 개발하고 있었지만 보쉬의 ESP를 받아들임으로써 결국 개발은 중단되게 됩니다. 그리고 이 기술의 직접 개발자는 보쉬의 자랑스러운 인물 중 한 명으로 기록돼 있는 안톤 판 잔텐(Anton van Zanten) 박사였습니다.


70대 중반의 나이인 안톤 판 잔텐 씨는 최근 독일의 일간지 쥐트도이체 차이퉁과의 인터뷰에서 원래는 성능이 개선된 ABS를 개발하려고 했는데 그게 발전돼 ESP가 나오게 됐다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1995년 벤츠 S클래스 쿠페에 처음 장착되며 존재를 알렸는데 사실 시작은 23년 전인 1972년부터였습니다.


안톤 판 잔텐 박사. 사진=보쉬 글로벌 유튜브 영상 캡쳐

이론에 불과했던 ESP 개발 계획은 8년이 지나서야 겨우 회사로부터 승인은 받아 실제 테스트됐고 그 가능성이 확인되게 됩니다. 하지만 센서가 문제였습니다. 차의 미끄러짐 정도를 확인하는 센서는 당시 군사용 로켓에만 적용이 된 상태였는데 엄청난 가격으로 인해 도저히 자동차 부품으로 쓸 수가 없었다고 판 잔텐 씨는 신문과 인터뷰에서 밝혔습니다.


하는 수 없이 가격이 떨어지길 기다리며 다시 테스트가 진행되기까지 6년이 지나야 했습니다. 1986년 겨울 테스트는 몇 주에 걸쳐 계속됐고, 다시 엄청난 데이터를 소화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의 개발까지 3년이란 시간이 더해지면서 1989년에야 ESP를 완성차 업체들에게 소개할 수 있게 됐습니다.



S클래스용 고급 기술

그러나 엉뚱한 사고로 급반전

보쉬는 몇몇 자동차 제조사들에게 연락을 했고 미국의 포드와 다임러 벤츠 등이 관심을 가졌지만 포드는 비싼 가격 때문에 포기하고 맙니다. 결국 벤츠는 1995년 내놓을 S클래스 C140모델에 장착할 수 있도록 기일을 맞춰달라는 요구를 했고 보쉬가 이에 응하면서 두 회사는 드.디.어 ESP를 세상에 내놓을 수 있게 됩니다.


다임러는 이 비싼 안전장치를 고급 옵션으로 오래동안 유지를 하고 싶었을 겁니다. 하지만 1997년에 일어난 그 유명한 A클래스 엘크테스트 전복사건으로 인해 ESP는 전혀 다른 길을 가게 되죠. 공교롭게 방송국 촬영팀이 A클래스가 전복되는 현장에 있었고, 결국 이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며 다임러는 초비상이 걸립니다. 


그리고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내놓은 방법이 바로 A클래스에 이 ESP를 옵션이 아닌 기본 장착하는 것이었습니다. 비싼 장비고 뭐고 일단 회사가 살고 봐야 한다는 위기감이 결국 비싼 옵션을 다임러의 가장 저렴한 승용차에 기본 장착하게 만든 것이죠. 


메르세데스 S 600 쿠페 (C140) 사진=다임러


1세대 A클래스 테스트 장면. 엘크테스트와는 상관없는 자료 사진입니다. 출처=다임러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된 ESP

에어백 보다 많은 사람 살려

독일 연방고속도로연구소는 ESP가 장착되면서 국도 사고의 48%가 감소되었다고 밝혔고, 또 쾰른대학의 연구에 따르면 ESP로 인해 유럽에서는 1년에 4천 명 정도가 생명을 건지고 있다고 합니다. 또 쥐트도이체 차이퉁은 미국 연방 사고조사원의 자료를 인용해, 만약 ESP를 모든 차량에 장착한다면 1년에 미국 내에서만 1만 명이 목숨을 건질 수 있다고 전했습니다. 이는 에어백의 4배에 해당된다고 하네요.


현재 출시되는 자동차는 이제 법적으로 차체자세제어장치가 기본 장착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판 잔텐 씨의 노력의 결과물이 모든 차에 심어졌고, 그것으로 더 많은 사람이 목숨을 건지거나 부상을 당할 위험에서 벗어나게 됐습니다. 그는 2003년 보쉬를 나와 현재 카운셀링과 강의 등으로 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고 하는데요. 자동차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개발품이면서 의외로 과소평가 되고 있는 ESP와 그 개발자에게 마음으로 응원의 박수를 보내는 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