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독일 자동차 세상/Auto 이야기

골프공 하나가 포르쉐의 역사를 바꾸었다?


하나의 자동차 브랜드가 현재의 위치에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비와 위기의 시간들을 이겨냈을까요? 특히나 세계 1,2차 대전을 직접적으로 겪은 유럽의 경우는 찾아들어가 보면 별의별 이야기들이 숨어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그런 많은 이야기들 중에서, 하마터면 사라졌을지도 모를 포르쉐 자동차에 대한 이야기를 한 토막할까 합니다.

작은 골프공과 얽힌 이 사연은 2002년까지 폴크스바겐 자동차 그룹의 회장을 역임한 페르디난트 피에히의 자서전에서 짧게 다뤄졌던 내용인데요. 이미 아는 분들도 많겠지만 혹 모르고 계셨던 분들을 위해 제가 마치 하나의 이야기 형식을 빌어 새롭게 구성을 해보았습니다. 도대체 어떤 사연이기에 골프공이 포르쉐를 살렸다는 것인지 한 편의 옛날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시죠.

 "1945년...그러니까 끔찍했던 세계 제 2차대전이 막을 내린 그 해, 유럽 최고의 엔지니어로 이름을 떨치고 있던 페르디난트 포르쉐 박사는 백발 성성히 나이 일흔을 맞는다.

전쟁이 독일의 패망으로 끝이나자 나치에 협력했다는 이유에서 포르쉐 박사는 영국과 미군정에 의해 조사를 받지만 4개월 만에 풀려나게된다.

그가 완전히 무죄였기에 풀려난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독일을 공동으로 점령하고 있던 미국과 영국 그리고 프랑스 모두에게 포르쉐 박사는 꼭 필요한 존재였던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가 갖고 있던 무수한 발명특허와 놀라운 능력을 어느 누구도 차디찬 시멘트 벽 속에 가두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국의 자동차산업이나 항공산업을 위해 그를 이용하겠다는 계획은 전후 복잡한 각 국의 사정들과 맞물려 쉽지만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프랑스 정부로부터 페르디난트 포르쉐 박사는 공식 초청을 받게 된다.  나치에 협력한 이유로 르노 자동차 공장을 국유화했던 프랑스의 새로운 정부가 권력구도 재편 과정에서 프랑스판 국민차 즉, 프랑스의 폴크스바겐을 만들고자 하는 원대한 계획을 위해 포르쉐 박사에게 손을 내민 것이다.

히틀러가 그렇게 독일 국적을 강요했어도 꿈쩍 안했던 그였지만 기계적인 도움을 구하는 일에는 상대가 누구였든 자신의 입장이 어떻든 크게 개의치 않고 나섰던 어쩔 수 없는 엔지니어였던 것이다.

포르쉐 박사는 1945년 11월, 아들인 페리 포르쉐와 사위였던 안톤 피에히 변호사를 대동하고 프랑스 점령 지역이었던 바덴바덴으로 길을 떠난다. 하지만 그들이 바덴바덴에 도착했을 때 프랑스 정부는 급격한 변화를 맞게 되는데, 포르쉐 박사에 관심을 보였던 산업부 장관이 갑작스레 사임을 하고 새로 임명이 된 법무부 장관은 급기야 저녁 만찬 도중에 포르쉐 일행을 모두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리기에 이른다.

왼쪽이 페르디난트 알렉산더 포르쉐. 중앙이 포르쉐 박사. 오른쪽이 페르디난트 피에히. 356 모형을 보고 있다.

 르노의 국유화와 민영화라는 사안을 놓고 대립했던 정치세력들 간의 다툼에 포르쉐 박사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오도가도 못하게 고립되고 만 것이다.

그런데 이런 포르쉐 박사 일행의 체포에 프랑스의 또 다른 자동차 업체인 푸조가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푸조 역시 당시에 폴크스바겐 공장과 포르쉐 박사를 통해 나치와 대단히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그런 자신들의 치부를 가리기 위한 방편으로 법정에서 푸조는 포르쉐 박사에 대한 모종의 진술을 함으로써 체포를 도왔던 것이다. 

체포되고 4개월이 지난 후 먼저 페리 포르쉐가 석방되긴 하지만 포르쉐 박사와 안톤 피에히는 1946년 5월 파리로 이송되게 된다. 이 때부터 포르쉐 박사의 건강상태는 나빠지게 되는데, 그런 가운데서도 포로의 처지에 있는 포르쉐 박사에게 프랑스는 르노 4VC 시험 차량(프랑스판 국민차)의 주행 안전성을 체크하는 일을 맡기게 된다.

사실 그 차량은 무게 배분에 있어 문제가 발견된 상태였고, 이를 해결해주기를 포르쉐 박사에게 바랬던 것이다. 한 때 르노자동차의 창립자인 루이 르노가 쓰던 빌라의 수위실에서 초라하게 먹고 자는 생활을 하던 이 천재 엔지니어는 그 와중에도 차량의 문제점을 잡기 위해 노력한다.

1947년 2월. 유럽의 매서운 한풍이 한창이던 때 다시 포르쉐 박사와 그의 사위는 프랑스의 디종이란 곳으로 이송된다. 난방도 제대로 되지도 않는 열악한 환경으로 옮겨간 그들은 언제 끝날지 모를 포로생활로 계속 지쳐만 간다. 그렇게 힘든 겨울을 지내고  3개월 후, 디종에서 계속된 심문 과정에서 포르쉐 박사는 반전의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여러 증인들의 증언에 따라, 제2 세계대전 중 포르쉐 박사와 프랑스의 관계, 그리고 나치 친위대의 선동 요청에  대항했던 행위들이 하나 두울 밝혀지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기소되 되지 않은 가운데 계속해서 감금상태에 있던 포르쉐 박사와 안톤 피에히의 처지를 결정적으로 바꾼 것은 다름 아닌 골프공이었다!

골프공 비화는 대략 이렇다. 1941년까지 공군 장교로 복무하던 안톤 피에히는 제 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최고의 비행사였던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 대위가 지휘하는 제 8항공 군단에 배정된다. 

골프 마니아였던 리히트호펜 대위는 테니스에 일가견 있던 안톤 피에히를 우연히 알게 되고, 자연스럽게 친해지면서 두 사람은 골프 파트너로 가까와진다.

이렇게 안톤 피에히가 독일의 영향력 있는 장교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음을 알게 된 당시 푸조 자동차 회장 장 피에르 푸조는, 안톤 피에히에게 친필로 헌사를 쓴 골프공을 선물로 보내게 된다.

그리고 오래도록 잊혀졌던 그 골프공이 다시 재판대에 중요한 증거물로 등장을 한 것이다. 장 피에르 푸조가 자신의 회사를 살리고 자신의 친나치 행위를 가리기 위해 포르쉐 박사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고 있었고, 그런 사실을 알고 있던 포르쉐 박사의 딸인 루이제 피에히가 골프공을 떠올리고 이것을 디종에 있던 변호사에게 보낸 것이다. 그리고 이 골프공이 심문과정에서 푸조가 위증을 했다는 하나의 주요한 증거물로 채택되면서 상황이 급반전 되기에 이른 것이다.

이 후, 1947년 8월 엄청난 액수의 보석금을 내고 페르디난트 포르쉐 박사와 안톤 피에히는 오스트리아로 귀환하게 된다.  이 석방과 보석금 마련, 그리고 나중에 다시 보석금의 일부를 되찾는 과정에 여장부 루이제 피에히의 노력은 실로 대단한 일이었다.

이렇게 석방이 되어 돌아완 포르쉐 박사는 심신이 많이 지쳐있었지만, 포르쉐가 첫 모델인 356을 만드는 과정에서부터 1950년 파리모토쇼에 부스를 마련해 참가하게 되는 일련의 과정을 모두 지켜보고 이끌게 된다. 당당히 독립적인 자동차 회사로 세계에 첫발을 내딘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1951년 1월 30일.  페르디난트 포르쉐 박사는 뇌출혈로 쓰러져 생을 마감하게 된다. 칠십 육년의 삶을 살고 떠난 것이다. "

전후 독일 역사에서 나치와 관계된 것으로 인해 포르쉐 박사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게 존재합니다. 하지만 그토록 포르쉐를 잡아 넣으려고 했던 프랑스 조차도 그의 석방 이후, 단 한 차례도 기소를 하지 못할 정도로 그는 떳떳했던 인물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오로지 엔지니어링과 새로운 기계를 만드는 것밖에 몰랐던 '천상기계쟁이'였던 것이죠.

 물론 강제 노동력 착취라는 당시 폴크스바겐 공장의 씻을 수 없는 오점이, 그 때 책임자였던 포르쉐 박사와 무관할 수는 없겠지만, 당대 최고의 마이스터의 기술적인 업적 만큼은 누구도 부인하지 않고 있습니다. 만약, 그 때 골프공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포르쉐 자동차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들이 석방되지 못하거나 혹은 지체되었더라면?...우리가 열광하는 그 포르쉐 브랜드로 지금을 맞이할 수 있었을까요?...

포르쉐 자동차 역사에 있어서 이 골프공 하나는, '포르쉐를 살린 구세주'로 두고두고 기록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