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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자동차 세상/독일의 자동차 문화 엿보기

그래도 독일은 수동 변속기?

승용차 운전하는 분 중 현재 한국에서 자동이 아닌 수동변속기 모델을 타는 분이 혹시 계십니까? 저는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찾기 어렵지 않나 싶습니다. 어떤 통계에 따르면 이미 2019년에 신차 승용의 99% 이상이 자동 변속기가 장착되어 있다고 합니다. 트럭 신차들 또한 자동변속기 장착 비율이 50%를 넘겼다고 하죠.

르노의 경차 트윙고의 자동 변속기 / 사진=르노

 

이처럼 자동변속기가 대세가 된 지 오래인 우리나라 환경에서 수동변속기 얘기를 하는 건 사실 별 의미가 없을 줄 압니다. 시대의 흐름과 완전히 동떨어진 얘기일 테니까요. 그래도 운전 좋아하는 이들에게 수동 변속기는 일종의 그리운 추억 정도는 될 수 있겠다 싶습니다.

 

역시 수동 변속기 하면 유럽을 떠올리게 됩니다. 자동 변속기가 주류를 이루던 다른 지역과 달리 유럽은 수동이 당당하게(?) 자동차 문화 중심에 있던 곳입니다. 그런데 이런 유럽도 이제 별수 없나 봅니다. 자동차와 수동 기어에 부심 강한 독일 같은 곳만 봐도 그렇습니다. 최근 아우토차이퉁이라는 독일 자동차 매체에 실린 기사가 있습니다.

 

DAT(자동차와 관련한 광범위한 데이터를 수집하는 곳) 2022 10월까지 나온 올해 신차의 자동변속기 장착 비율을 조사해봤더니 66.4%나 됐습니다. 20년 전인 2000년에 독일 자동차의 자동변속기 비율은 고작 19.6%였습니다. 20년 만에 50% 가까이 그 비율이 는 겁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한국에서 독일로 넘어와 운전하려던 분들의 큰 고민 중 하나는 중고차 구입 시 자동변속기 자동차를 찾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작은 차의 경우 자동 변속기 매물을 찾기는 상대적으로 더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단적으로 수동 변속기로 면허를 취득하는 게 당연한 일이었던 유럽이지만 점점 자동 변속기 운전면허 취득자가 늘고 있습니다.

오펠의 소형차 코르사에 적용된 무려(?) 8단 자동 변속기 / 사진=오펠

 

자동 변속기가 주는 편안함, 그리고 운전 안전성 등에 젊은 운전자들이 반응을 적극 보였습니다. 찾는 이들이 늘며 비싸던 가격도 내렸습니다. 시장이 이처럼 반응을 보이자 효율 높은 변속기 개발에도 업계는 적극적이었죠. 그렇게 분위기가 무르익는 요즘, 그런데 재밌는 통계가 하나 나왔습니다.

 

2020 YouGov라는 기관에서 변속기 취향 관련한 설문지를 독일인들에게 돌린 것입니다. '당신의 취향은 수동인가 자동인가?'라는 질문을 했는데 1,062명의 응답자 중 46%가 수동 변속기를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자동 변속기를 좋아한다고 답한 비율은 29%뿐이었죠. 나머지 25%는 변속기가 무엇이든 별로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연령대별로 선호도에 차이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25세에서 34세 사이의, 비교적 젊은 운전자의 경우 33%만이 수동 변속기를 좋아한다고 답했습니다. 반대로 45세에서 54세 사이의 운전자는 50%가 수동 변속기를 선호했습니다. 그렇다면 자동 변속기를 왜 좋아한다고 답했을까요?

 

편안함이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그 외에 시동을 켤 때의 적은 부담감, 기어 마모 감소를 장점이라 답하기도 했습니다. 반대로 수동을 왜 좋아하냐고 물었더니 그들은 자동차 제어력 향상, 구매 시 가격적인 이점, 스포티한 운전 경험을 꼽았습니다. 충분히 이해가 되는 대답들이었습니다.

 

이번 설문에 참여한 이들 중 72%는 수동 변속기 사용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수동 변속기 경험 없이 자동 변속기로 자동차를 배운 이들이 28% 정도 된다는 건데, 그들의 경우 당연히 자동 변속기의 손을 들었을 확률이 높습니다. 이런 부분을 고려하면 수동과 자동 모두 경험한 이들로만 국한한다면 수동 선호도 비중은 보이는 수치 이상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골프 GTI의 수동 변속기 / 사진=VW

 

그렇다면 자동차를 살 때 독일인들은 변속기가 결정의 주요 요인 중 하나일까요? 그렇다고 답한 이들은 절반이었습니다. 반대로 보면 나머지 절반은 수동이든 자동이든, 자동차 선택에 있어 변속기가 우선 선택 요인이 아니라는 얘기가 됩니다. 여전히 수동 변속기에 대한 익숙함이 이들 문화 속에 남아 있다는 게 느껴지네요.

 

작은 차, 경제성, 운전의 재미, 수리 시 부담이 적은 문제 등, 유럽의 실용주의 마인드와 수동 변속기는 확실히 어울리는 구석이 있습니다. 하지만 전기차 시대가 오면서, SUV가 득세하며, 작은 모델보다는 큰 모델, 마력이 높은 모델 수요가 늘고 있는 상황에서 수동 변속기는 더욱 그 존재감을 잃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독일 운전자들은 여전히 수동 변속기 운전을 좋아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런 변속기와 멀어지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마냥 수동 변속기를 고집만 하기도 어려울 것입니다. 제조사들 역시 계속 안 팔리는, 마진 적은 모델보다는 더 비싼, 고마력의, 크고 고급스러운 모델 판매 쪽에 신경을 쓰고 있기 때문에 경제적인 수동 변속기 장착은 의도적으로도 더 피하게 됩니다.

 

통계를 보니 수동 변속기 천국이었던 독일도 많이 변했다는 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속, 기억 속에서는 여전히 클러치를 밟고 변속기 노브를 꾹 움켜쥔 채 단수를 조절하며 아우토반을, 검은 숲 굽이굽이 와인딩 로드를 달리는 그림이 남아 있는 듯합니다. 전자 장치의 제어를 덜 받는 날 것 그대로의 자동차 한 대쯤 죽기 전에 제대로 다시 한번 경험하고, 즐겨봐야겠단 생각이 요즘 더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