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수벌금제, 한 번쯤 들어보셨죠? 죄를 지은 사람의 하루 수입에 기초해 벌금을 물리는 제도를 말합니다. 같은 범죄를 저질러 벌금형을 받게 되더라도 소득에 비례해 물어야 할 벌금이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월급이 1천만 원인 사람과 월급이 1백만 원인 사람이 같은 죄로 벌금형이 내려지면 그 수입의 차이로 인해 벌금도 그만큼 차이가 나게 됩니다.
1920년대 핀란드에서 처음 만들어져 지금은 독일, 덴마크, 스위스, 오스트리아 등, 유럽 일부 국가에서 활성화돼 있습니다. 제가 있는 독일의 경우 1975년에 일수벌금제(Tagessatz)가 도입되었는데요. 이 법이 적용되기 시작한 당시 독일(서독)은 특히 교통법규를 위반한 운전자들이 법의 주요 대상이었고, 이런 상황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사진=adac
독일의 과속 일수벌금제 적용 예
그렇다면 독일 벌금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결정되는 걸까요? 시내에서 심한 과속을 한 가상의 운전자를 예로 들어보죠. 우선 월 순수입을 확인합니다. 세금 제외하고 3천 유로라고 하죠. 그 수입을 일일 요율 (3.33%)로 나눈 뒤 판사가 결정한 요일 수를 곱하게 됩니다. 3천 유로 월급에 20일짜리 일수벌금제를 받게 되었다면 3천 유로의 3.33%, 그러니까 99.9유로에 20을 곱해 1,998유로(한화 약 280만 원)를 내게 되는 것입니다.
독일은 최소 5회에서 최대 360회까지 벌금 일수를 부과할 수 있기 때문에 소득이 많은 부자는 최악의 경우 수억 원까지 벌금을 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법이 독일에서 무조건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닙니다. 소득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쉽지 않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로 인한 벌금 인플레 현상이 언급되기도 하죠. 또 경제적으로 어려운 빈곤층은 (여러 보완 장치가 있음에도) 오히려 어려움에 빠질 수 있다고 합니다. 감당하기 어려운 벌금을 낼 수도 있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동일한 죄에 대한 벌금이 재산의 정도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과연 합리적인 것이냐는 원론적 물음에도 명확한 답을 하기 쉽지 않은 게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이 제도가 유지되고 있는 것은 벌금의 차등 적용이 법의 공정한 집행이라고 여기는 분위기가 여전히 그 사회에서 우세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시비 가리기 쉬운 것부터 순차 적용도 하나의 방법
우리나라 역시 수십 년 전부터 최근까지 현재 적용 중인 총액벌금제 대신 일수벌금 제도를 들여와야 한다는 주장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특히 일수벌금제가 가장 많이 적용되는 것이 도로교통법 위반이기 때문에 운전자 입장에서 더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데요. 일수벌금제가 한국에 적용되느냐 마느냐는 정치적으로 해결하고 답을 내려야 하는 부분이기에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만약 일수벌금제가 현재 벌금제도를 대신하는 때가 온다면 일괄 법을 바꾸기보다는 효과를 볼 수 있는 경우들에 우선 적용하는 것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동차와 관련한 것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욕했다고 1,400만 원 벌금 낸 유명 축구선수
독일은 경찰에게 모욕죄에 해당하는 욕을 했을 경우 그 욕의 수위(?)에 따라 많게는 수백만 원까지 벌금을 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운전자가 교통경찰에게 단속이 되었는데 흥분한 나머지 손가락을 들어 욕을 했다면 최대 560만 원을 물어야 합니다. 또 여성 운전자에게 심한 욕설을 한 경우에도 2백만 원에 가까운 벌금을 물립니다.
사진=adac
이처럼 욕설을 해서 일수벌금제에 적용된 유명한 독일 사례로 슈테판 에펜베르크라는 전 축구선수의 경우를 들 수 있습니다. 바이에른 뮌헨에서 오래 뛰었으며 독일 국가대표로도 활약했던 그는 불같은 성질머리 때문에 자주 언론에 이름이 올랐던 인물입니다. 몇 년 전 그는 경찰을 향해 쌍욕을 했고, 그 결과 1만 유로(한화 약 1,400만 원)의 벌금을 내야 했습니다. 당시 그가 고소득자였기 때문에 이런 금액이 나왔습니다.
꼭 경찰을 향해서가 아니더라도 모욕죄에 해당하는 심한 욕이나 행동을 한 경우 벌금형에 처해집니다. 문제는 이를 명확하게 입증할 수 있냐는 것입니다. 현장에서 영상으로 찍거나 다수의 목격자가 일관되게 증언을 하지 않는 이상 증명하기 무척 어려운 부분입니다. 심지어 현행법상 일반적인 경우는 아니지만 쌍방이 서로 모욕을 했다면 양쪽을 모두 무죄 처리할 수도 있습니다. 황당하죠?
영국은 반대의 경우로 일수벌금제를 포기했다는 기사도 있었습니다. 서로 모욕죄에 해당하는 언행을 했지만 벌금이 소득에 따라 큰 차이가 났고, 이게 정당한가 논란이 되면서 결국 총액벌금제로 회귀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하지만 일수벌금제가 효과적인 경우도 있습니다.
2001년 노키아 전 부회장 안시 반요키가 핀란드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시속 50km/h 제한속도 구간에서 75km/h로 달리다 경찰에 걸려 우리 돈으로 1억이 넘는 벌금을 납부했다는 소식이 큰 화제가 됐습니다. 연간 소득이 거의 200억에 달했기 때문인데요. 스위스에서도 과속을 한 운전자가 우리 돈으로 3억이 넘는 벌금을 내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과속의 경우는 다툼의 여지가 비교적 적다고 볼 수 있습니다. 명확하게 증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증명할 수 있는 과속, 음주운전, 또는 위협 운전 등, 벌금형에 처할 정도로 잘못이 큰 범법 행위에 대해서는 일수벌금제가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사진=픽사베이
다만 일수벌금제를 적용하고 있는 독일도 과속 운전자의 경우 제한속도를 크게 상회한 게 아니면 일수벌금제가 아닌 기본 벌금형을 일괄 적용하고 있다는 점도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무조건 일수벌금제를 모든 경우에 적용하기보다는 비교적 시시비비를 가리는 게 명확한 몇몇 경우에 우선 적용을 한 뒤 그 결과나 효과를 따져본 후에 법을 확대 적용하는 것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시범 적용을 해보자는 얘기죠.
유럽의 시행착오를 우리가 겪지 않기 위해
운전을 중심으로 일수벌금제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일수벌금제는 어떤 면에서 보면 통쾌하게 여겨질 수 있습니다. "과속 벌금 그거 몇 푼이나 된다고. 그냥 물고 말지."라며 우습게 여기는 그런 이들에게 법이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님을 보여줄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앞서 설명한 것처럼 '모든 이들의 소득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느냐'라는 점부터 해결해야 합니다.
또 '소득이냐 재산이냐' 벌금의 기준을 어디에 둘 것인지에 따라 교묘하게 법을 빠져나갈 이들이 있을 것이라는 점도 우려됩니다. 따라서 우리나라 실정에 맞게 일수벌금제를 적용하려는 고민과 연구가 중요합니다. 그 좋은 예로 도로교통법 위반과 관련한 몇 경우를 대상으로 일수벌금제를 부분 실행해보는 것입니다.
소득 파악이 되는 이들이 저지른 비교적 명확한 도로교통법 위반 사안에 대해서는 일수벌금제로 처벌하고, 소득을 감추는 등, 비협조적인 위법 운전자에겐 다른 방식으로 처벌을 하는 것입니다. 무조건 총액벌금제가 맞다 일수벌금제가 맞다며 다툴 게 아니라, 어느 하나를 버리고 선택하는 방식이 아닌, 총액벌금제와 일수벌금제를 적절하게 섞어 활용해보자는 것이죠. 잘만 적용된다면 유럽의 시행착오를 건너뛰어 좋은 제도로 자리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논란이 큰 만큼 그 무엇보다 차분하고 영리한 검토와 고민이 있어야겠습니다.
'독일 자동차 세상 > 독일의 자동차 문화 엿보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콧수염 회장은 왜 삼각별에 버림받았나? (0) | 2020.11.09 |
---|---|
독일에서 가성비 브랜드 이미지 굳어진 현대차 (2) | 2020.10.26 |
자동차와 자전거 공존의 시험대에 오른 유럽 (0) | 2020.09.28 |
'시속 400km 벽을 깬 천재 레이서 로제마이어' 가장 빛났으나 가장 아팠던 손가락 (2) | 2020.09.24 |
현대자동차가 유럽에서 전기차를 밀어붙이는 이유 (4) | 2020.07.13 |
독일에서 부는 포르쉐 변화의 바람 (0) | 2020.06.29 |
폭스바겐 회장 사건으로 본 삼각 커넥션 (0) | 2020.06.15 |
전기차 보조금 확 키운 독일, 성공할까? (0) | 2020.06.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