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디는 르망 24시간 내구레이스에서의 기록적 우승, WRC 챔피언 등극 등 다양한 자동차 경주 대회에서 트로피를 들어 올리며 자신들의 기술력을 뽐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1930년대 활약한 아우토우니온 은빛화살(질버파일,Silberpfeil)의 질주를 빼고 이들 레이싱 역사를 이야기할 수는 없다.
1934년부터 2차 세계 대전이 터진 1939년까지 루돌프 카라치올라와 헤르만 랑(이상 메르세데스-벤츠 소속), 그리고 한스 슈툭과 베른트 로제마이어(이상 아우토우니온)와 같은 레이서들이 몰던 은빛 경주차들은 여러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당시 레이서들은 독일 최고의 인기 스타였으며, 우승은 나치 정권 프로파간다(선전선동)에 적극 활용되기도 했다. 이들 중에서도 베른트 로제마이어의 삶은 누구보다 화려했으며 또한 비극적이었다.
베른트 로제마이어 / 사진=아우디
1909년 네덜란드와 맞닿은 링엔에서 태어난 베른트 로제마이어(Bernd Rosemeyer)는 1920년대 독일 서민층에게 인기 있던 모터사이클 세계에 뛰어든다. 하지만 그는 25세 때 모터사이클이 아닌 아우토우니온이 운영하던 자동차 경주팀 레이서로 합류하게 된다. 그의 운명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경주용 차에 대한 지식이나 경험이 거의 없던 베른트 로제마이어였지만 오히려 레이싱카에 대한 고정관념이 없다는 게 장점이었다. 당시 아우토우니온 레이싱카 개발에 참여하고 있던 포르쉐 박사와의 인연도 이때 만들어졌는데, 과감한 성격의 베른트 로제마이어는 경주 출전 1년 만인 1935년, 지금의 체코 브루노 지역에 있는 마사리크 서킷 대회에서 생애 첫 우승을 차지한다.
1937년 당시 베른트 로제마이어(좌측)과 아내이자 역시 유명했던 비행사 엘리 바인호른 (가운데), 그리고 페르디난트 포르쉐 (우측) / 사진=위키피디아 독일
이후 독일은 물론 스위스, 이탈리아, 그리고 미국 밴더빌트 컵 대회에서 승리하는 등, 유럽과 그 외 지역에서 많은 우승컵을 차지하며 그의 이름은 널리 알려진다. 1937년에는 아우토우니온이 다섯 번의 독일 그랑프리에서 우승을 하는데 그 중 네 번의 승자가 베른트 로제마이어였을 정도로 탁월한 경기력을 보였다. 레이싱카에 대한 경험이 짧은 그의 이력을 생각하면 놀라운 결과가 아닐 수 없다.
1937년, 아우토우니온 타입 C를 타고 도닝튼 파크 대회에서 우승할 당시의 베른트 로제마이어
라이벌과의 속도 경쟁, 그리고 비극
당시 자동차 회사들은 자신들의 기술력을 알리는 방법으로 레코드카를 제작해 최고 속도 기록에 도전하곤 했다. 베른트 로제마이어는 1937년 아우토우니온의 레코트카로 최초로 공공도로에서 400km/h의 벽(정확히는 406.32km/h)을 깬 레이서가 됐다. 독일 전체가 환호했다. 하지만 그의 이런 기록을 라이벌이 그냥 내버려 둘 리 없었다. 경쟁 상대는 메르세데스-벤츠의 레이서 루돌프 카라치올라.
루돌프 카라치올라는 1938년 1월 28일 오전, 최고 736마력의 출력을 내는 5.6리터 12기통 엔진이 들어간 레코드카를 타고 프랑크푸르트-다름슈타트를 연결하는 아우토반 A5 직선 구간에서 시속 432.7km라는 기록을 세웠다. 그리고 같은 날 베른트 로제마이어도 도전에 나섰다.
400km/h 벽을 깬 1937년 당시 레코드카와 베른트 로제마이어
그가 이날 운전할 레코드카는 6.5리터 16기통에 최고 545마력의 아우토우니온 타입 R이었다. 출력에서 메르세데스-벤츠의 레코드카에 크게 뒤졌지만 베른트 로제마이어는 두 번의 도전에서 시속 429.9km를 찍었다. 마지막 한 번의 주행에서 조금 전 루돌프 카라치올라가 세운 기록을 깰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비극적인 사건을 일어난다.
이론적으로 최고 속도 456km/h까지 낼 수 있었던 레코드카에 앉은 베른트 로제마이어는 도로 옆 숲에서 얼마나 강한 바람이 도로 쪽으로 부는지 모르고 있었다. 출발과 함께 속도를 올리던 레코드카가 430km/h에 다다랐을 때 강풍에 차는 중심을 잃는다. 여러 번 구른 레코트카는 완전히 망가졌고, 28세의 베른트 로제마이어는 10주 전에 태어난 아들의 얼굴을 다시는 볼 수 없게 됐다.
베른트 로제마이어가 탔던 타입 C
오점으로 남은 친위대 가입
타고난 감각으로 당대 최고의 독일 레이서였던 베른트 로제마이어는 1932년, 그러니까 자동차 레이서가 되기 전 나치 친위대에 가입한다. 그가 왜, 무엇 때문에 친위대에 가입했는지, 그리고 어떤 활동을 했는지 자세한 역사적 배경은 찾을 수 없지만 그의 이런 선택은 지금까지도 가장 큰 오점으로 여겨진다.
금발의 잘생긴 독일 레이서를 나치 정권은 최대한 권력 홍보에 이용했다. 특히 비행사였던 아내와 함께 나치는 베른트 로제마이어를 독일의 영웅, 독일의 미래로 홍보했다. 나치 친위대 소속이라는 점에 히틀러는 더 그에게 열광하게 했을지도 모른다.
사진=아우디
이런 경력 때문에 사고가 난 아우토반 근처에 마련된 그의 비석 안내 표지판에서 베른트 로제마이어라는 이름은 삭제되었고, 고향 링엔에서는 그의 박물관을 세우고자 오랜 세월 논의를 하고 있지만 비판 여론 때문에 아직도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독재자 시대에 뛰어난 레이서로 산다는 것은 권력에 이용될 수밖에 없는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친위대 가입이라는 잘못된 선택으로 그의 많은 업적은 지금까지도 좀처럼 레이싱 역사 전면에 나서지 못하고 있다. 4년이라는 짧은 기간 이뤄낸 수많은 우승과 공공도로 최초로 시속 400km 벽을 돌파한 주인공이라는 타이틀이 빛을 잃고 만 것이다. '풀 스로틀 황제' 베른트 로제마이어는 독일 레이싱 역사에서 최고의 드라이버이며 동시에 독일 레이싱 역사의 가장 아픈 손가락이다.
*이 글은 아우디코리아 포스트에 실린 것이며, 원 글은 아래 링크된 주소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29152381&memberNo=5921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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