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자동차는 1977년 그리스에 포니를 수출하는 것으로 유럽 시장 공략의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초기 판매량은 정말 보잘것없었죠. 몇 년을 팔아도 합쳐 1~2만 대 수준에 머물렀으니까요. 좀처럼 뚫기가 어려운 유럽 시장에 비해 북미 시장은 상대적으로 성장세가 빨랐고, 그렇게 미국은 현대차의 가장 중요한 해외시장이 됐습니다.
사진=현대자동차
그러다 1990년대 들어서면서 현대차는 다시 유럽 시장에 힘을 쏟기 시작합니다. 기아 브랜드까지 품은 현대차는 유럽에 현지 법인을 설립, 시장 공략에 박차를 가합니다. 그리고 꾸준히 판매량을 늘려 2018년에는 현대와 기아 합쳐 유럽에서 연간 판매량 1백만 대를 돌파합니다. 당시 일부 언론에서는 이런 성과가 고성능 모델을 늘리고, 친환경과 SUV 모델의 성공에 힘입었다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유럽, 특히 현대차의 유럽 시장 본거지라 할 수 있는 독일에서 보는 현대차는 국내 언론들이 이야기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면이 있습니다. 바로 ‘가성비’ 브랜드로 자리를 잡은 것이죠. 정말 이런 평가가 맞는지 알 수 있는 지표가 하나 있습니다. 독일 유력 전문지 아우토모토운트슈포트가 매년 실시하는 브랜드 이미지 조사가 그것인데요.
프랑크푸르트 근처 뤼셀스하임에 있는 유럽 본사 전경 / 사진=현대자동차
매년 10만 명 이상 독자가 참여하기 때문에 여기서 나오는 결과는 업계는 물론 자동차 시장을 분석하는 이들에게 유용하게 쓰입니다. 질문 중에는 당연히 가성비 부분도 있습니다. 우선 2011년부터 2020년까지 10년 동안 현대와 기아차가 가성비 카테고리에서 어떤 변화를 보였는지 확인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우토모토운트슈포트 이미지 조사 中 가성비 항목 순위 변화 (10개 양산 브랜드 기준)
현대 / 기아
2011년 : 8위 / 7위
2012년 : 4위 / 5위
2013년 : 4위 / 3위
2014년 : 7위 / 5위
2015년 : 6위 / 6위
2016년 : 4위 / 6위
2017년 : 5위 / 6위
2018년 : 4위 / 5위
2019년 : 3위 / 4위
2020년 : 3위 / 4위
아우토모토운트슈포트 독자들이 뽑은 2020년 가성비 브랜드 순위
1위 : 스코다 (38%)
2위 : 다치아 (29%)
3위 : 현대자동차 (25%)
4위 : 기아자동차 (23%)
5위 : 세아트 (20%)
6위 : 포드 (18%)
7위 : 오펠 (18%)
9위 : 폭스바겐 (13%)
10위 : 토요타 (9%)
지난 10년간 독일에서는 스코다와 다치아가 가성비 항목에서 1, 2위를 변함없이 유지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토요타는 10년 연속 10위였고요. 현대와 기아의 경우 2013년 각각 4위에 3위에 이름을 올린 후 몇 년 동안 순위가 낮아졌다가 2018년부터 다시 상승, 올해를 포함 최근 2년은 연속해서 3위와 4위 자리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순위는 거의 굳어진 느낌인데요. 이는 또 다른 전문지 아우토빌트의 조사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납니다. 한마디로 현대차는 가성비 브랜드라는 게 현재까지 독일 운전자들의 대체적인 생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얘기하는 가성비는 무엇일까요? 두 가지 관점으로 봐야 합니다.
사진=현대자동차
첫째 : 상대적으로 저렴하다
2위에 이름을 연속해서 올리고 있는 다치아의 경우 르노그룹 계열로 말 그대로 저렴한 가격으로 승부하는 브랜드입니다. 이해하기 쉽게 현대 소형 SUV 코나와 비교해 보죠. 독일에서 판매 중인 코나 가솔린 라인업 중 가장 낮은 급인 1.0 T-GDI (120마력)의 가격은 17,730유로입니다. 동급인 다치아 산데로 Tce 90 가솔린(90마력) 모델은 10,650유로로 7천 유로 이상 저렴합니다. 산데로 75마력 모델 같은 경우 6,990유로라는 충격적(?)인 시작가를 보입니다.
현대뿐만 아니라 그 어떤 브랜드도 다치아와 가격 경쟁은 불가능합니다. 싼 가격은 다치아의 경쟁력이고, 이 경쟁력을 가지고 유럽 시장에서 매년 놀라운 성장을 거두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현대차는 어떤 경제적 이점이 있기에 독일인들은 가성비 좋은 브랜드라고 평가하는 걸까요?
이미 많아 알려진 것처럼 현대차는 유럽에서 5년(주행거리 무제한) 무상 보증제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기아는 7년(15만km)으로 가장 길죠. 전문지들의 평가에서도 늘, 빠지지 않고 이 부분을 언급합니다. 현대와 기아의 덕인지 이후 브랜드들끼리 무상 보증 기간을 늘리는 등, 유럽에서 보증과 관련한 경쟁은 늘 뜨겁습니다.
또 하나는 같은 가격이라도 기본적으로 장착되는 사양이 많다는 점입니다. 독일의 프리미엄 브랜드의 경우 별것 아닌 것들까지 선택하도록 해놓았습니다. 기본가만 보면 큰 차이가 안 나는 듯하지만 비슷하게 사양을 적용한 뒤에 보면 가격은 차이를 보입니다. 따라서 실질적으로 현대나 기아차를 사는 유럽 고객들은 경제적 이점을 얻을 수 있고, 이 점은 분명한 경쟁력으로 작동합니다. 하지만 무조건 가격만으로 가성비 카테고리에서 상위에 이름을 올리는 건 아닙니다.
유럽 전략형 소형 해치백 i20 / 사진=현대자동차
둘째 : 실용적이고 괜찮은 품질
현대와 기아는 그동안 다양한 내구성 테스트 결과를 통해 과거보다 품질이 많이 좋아졌다는 걸 증명했습니다. 독일 오너들 역시 설문 등을 통해 자신이 소유한 현대차, 기아차에 대해 괜찮게 만족도를 표했습니다. 독일 전문지들이 잘하는 비교테스트를 봐도 갈수록 성능이 나아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스코다가 10년 동안 가성비 항목에서 절대적으로 1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도 스코다 모델들의 품질과 실용성에 만족도가 높기 때문입니다. 다치아가 무조건 싼 가격에 포커스를 맞췄다면 스코다는 그 가격대에서 구입할 수 있는 좋은 품질의 자동차라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현대와 기아도 스코다만큼은 아니지만 품질 경쟁력을 끌어올렸고, 그 결과 가성비 영역에서 높은 순위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한 마디로 현대차와 기아는 실용적이고 품질과 주행성 괜찮은 차를 상대적으로 경제적 부담 덜한 가격에 살 수 있다고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유럽에서 현대차의 신차 판매를 견인해야 할 투산 신형 / 사진=현대자동차
가성비는 판매에 영향을 끼칠까?
그렇다면 이 가성비는 자동차를 선택하는 데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칠까요? 역시 아우토모토운트슈포트 자료를 보죠. 시장 조사 기관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대략 19개 정도의 자동차 선택 요소가 있는데 이 중 1위는 높은 신뢰성(77%)이었고, 그 뒤를 안전성(74%)과 좋은 주행 안락함(72%)이 이었습니다. 가성비는 68%로 신뢰할 만한 영업사원(58%) 항목을 큰 차이로 따돌리고 4위를 차지했습니다.
지난 수년간 가성비의 중요성은 독일에서 계속 60% 중간대를 유지했죠. 그만큼 신차 선택에 있어 중요한 요소라는 얘기입니다. 결국 가성비에서 좋은 평가를 받는다는 것은 판매량에도 좋은 영향을 끼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경차를 비롯해 대체로 콤팩트한 자동차 중심으로 사업을 해온 현대나 기아에겐 이런 가성비 이미지는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 겁니다. 하지만 유럽 진출을 노리는 제네시스 브랜드엔 반대로 조심해야 할 부분이기도 합니다.
제네시스에서 현대차 색깔을 빼야 한다?
현대가 GV70을 공개하면 아마 그때부터 제네시스 브랜드 유럽 진출 움직임을 좀 더 구체화하지 않을까 합니다. 제네시스가 유럽에서 어떤 성과를 낼 수 있을지 무척 궁금한데요. 독일 프리미엄 3사가 지배하는 시장에서 제네시스가 안착하기 위해서는 혁신적인 기술, 놀라운 마케팅, 뛰어난 스타일 등, 여러 요소가 잘 버무려져야 합니다. 그래야 그나마 보수적 유럽 소비자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테니까요. 그리고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바로 제네시스에 현대차 이미지가 덧칠해져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앞서 소개해드린 것처럼 현대차는 독일을 비롯해 유럽에서 가성비 브랜드라는 인식이 강합니다. 제네시스는 럭셔리 브랜드로 유럽에 진출을 하려는 것이고, 그렇다면 제네시스와 현대차는 최대한 구분된 가운데 유럽인들에게 인식되어야 합니다. (가성비 브랜드인) 현대차가 만든 제네시스가 아닌, 한국에서 건너온 럭셔리 브랜드 제네시스로 말이죠. 그렇지 않아도 공략이 쉽지 않은 유럽 시장에서 제네시스는 신경 써야 할 게 너무 많아 보입니다.
업그레이드 기회가 찾아왔다
코나 EV / 사진=현대자동차
가성비 이야기를 하다 제네시스 브랜드까지 얘기가 이어졌는데요. 지금까지 현대차와 기아는 유럽에서 가성비 브랜드로 인식되어 왔습니다. 특별한 변화가 없다면 이 이미지는 지속할 가능성이 큽니다. 현대차가 바라는 것처럼 브랜드 부가가치를 높이고 이익률을 더 높이기 위해선 가성비 브랜드 이미지에만 머물러선 안 되는데 변화가 사실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자동차 시장은 현재 급격하게 전기차, 그리고 자율주행 등의 첨단 정보 통신 기술을 보유한 기업들에 유리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유럽은 이 변화의 중심에 있습니다. 현대차가 앞으로 급변하는 시장에서 어떤 투자를 하고 어떤 전략으로 결과를 만들어 내느냐에 따라 굳건하게 감싼 가성비 브랜드 이미지를 벗어나느냐 아니냐가 결정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이 바로 그들이 바라는 대로 글로벌 시장에서, 특히 유럽에서 브랜드 가치를 끌어올릴 기회입니다. 과연 그럴 준비가 되어 있나요? 현대차와 기아의 미래를 이런 관점에서 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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