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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자동차 세상/Auto 이야기

Big3가 쓰러뜨린 '터커 자동차'를 아시나요?


늘 미국의 자동차 역사를 되돌아 볼 때 꼭 덜커덕하고 제 마음에 걸리는 한 인물이 있습니다. 프레스톤 터커 (Preston Thomas Tucker)인데요. 포드, GM, 크라이슬러 등 일명 빅 3라 불린 메이져 자동차 회사들에 의해 그 꿈을 제대로 펼치지 못했던 그의 이야기는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더딴지'에 기고했던 글인데 보다 많은 분들이 읽어 보셨음 하는 마음에 올립니다.  



프레스톤 터커. 사진=위키피디아



1890년 미국에서는 한 가지 의미 있는 법안이 대통령의 서명을 받아 통과된다. 존 셔먼 상원의원이 발의한 셔먼 반독점법(Sherman Antitrust Act)은 개인이나 기업의 상거래 활동을 제한하는 행위들, 그러니까 방해 목적의 계약이나 담합, 혹은 상대 기업을 무너뜨리기 위한 음모 등을 금지하고 이를 어길 때는 제재를 가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10여 년 동안 이 법안은 제대로 된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렇게 유령같던 법이 실제 역할을 하게 된 것은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에 의해서였다. 테디라는 애칭 (테디 베어의 그 테디임)으로 불리며 1901년부터 8년 간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셔먼법을 근거로 기업들의 무분별한 몸집 불리기에 제동을 걸게 된다.


당시 이 법안에 적용을 받은 대표적 기업은 스탠다드 오일이라는 석유회사였는데 소유주가 그 이름도 유명한 록펠러다. 경쟁 회사들을 갖가지 방법으로 방해하고 아예 흡수하는 방법을 통해 그 싹을 자르며 성장한 스탠다드 오일은 한 때 미국 내 석유사업의 90%를 장악하기도 한, 전무후무한 독점 기업이었지만 1911년 대법원의 판결로 인해 회사는 조각조각 분리되었고, 이 사건 이후 록펠러는 현역에서 은퇴하고 사회사업에 전념하게 된다.                                             


존 셔먼에 의해 시작돼 루즈벨트 대통령으로, 그리고 다시 클레이튼 독점법 등으로 다져진 반독점법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의 횡포를 막을 수 있는 상징적인 법으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하지만 반독점법과 같은 법이 가끔은 소용이 없다는 걸 확인하게 된다. 자동차에 대한 열정 가득한 사업가 프레스톤 터커 이야기를 통해 기득권 자본 세력의 비열함과 욕심의 민낯을 들여다 보도록 하자.



11살 때 이미 운전을 했던 맹랑한 녀석


1903년 페퍼민트 농장이 있던 미시간 캐팍이란 곳에서 태어난 터커는 2살 때 농부였던 아버지를 잃는다. 어머니와 단 둘이 살던 그는 이미 11살 때 운전을 배웠고 16살 때엔 중고 차를 사 분해 조립을 한 후 되팔아 이익을 보는 등, 기계에 대한 뛰어난 감각과 장사 수완을 함께 발휘했다. 


학교도 기술고등학교를 다닐 정도로 자동차 관련 기술에 관심이 높던 그는 결국 생활인으로, 그리고 자동차에 대한 원대한 포부를 품고 학교를 중퇴하고 캐딜락 공장에서 롤러스케이트를 타며 잡일을 보는 사환으로 일하게 된다. 완전히 밑바닥부터 시작한 그의 자동차 관련한 인생은 잠시 어머니의 반대에 부딪힌다.


그는 전혀 자신과 맞지 않는 경찰 공무원으로서의 삶을 살지만 스피드에 대한 끓는 욕망은 결국 자동차와 관련된 삶으로 그를 되돌려 놓았다. 스무 살에 결혼한 터커는 6개월 정도 주유소를 임대했는데, 아내가 주유소에서 일을 할 동안 그는 포드의 조립라인에서 자동차 조립일을 했다. 이후 그는 다시 자동차 세일즈 일에 뛰어들게 되고, 이렇게 자동차와 관련한 많은 일들을 직접 몸으로 체험하며 자신의 이름을 내건 자동차를 만들기 위한 토대를 쌓아갔다.



경찰차에 구멍을 내버린 괴짜 


주유소 임대 기간이 끝나자 포드 조립라인에서도 나온 터커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다시 경찰서로 복귀하게 된다. 그는 복귀 첫 해 겨울 상상치도 못한 일을 벌이는데, 순찰차 대시보드를 토치로 구멍을 뚫어버린 것이다. 이유는 엔진에서 나오는 열을 실내로 들어오게 해 차량의 히터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것이다. 이 황당하고 맹랑한 괴짜에게 경찰복은 확실히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경찰복을 벗은 터커는 자동차 세일즈맨의 눈에 띄어 판매일을 하게 됐고, 그 와중에 자동차 경주에도 큰 관심을 보였다. 레이싱에 심취했던 그는 재능 있는 해리 밀러라는 엔지니어와 인연을 맺게 되는데, 이것이 계기가 돼 인디에나폴리스로 이사를 해 맥주 운송회사의 매니저로 일을 하며 레이싱에 참여하며 구체적인 자동차 사업의 밑그림을 그려갔다. 


이 때 세계 2차 대전이 터진다. 하지만 전쟁을 사업을 위한 기회로 본 터커는 군용 무기에 관심을 갖고 디자인을 하게 된다. 그의 디자인은 함께 한 해리 밀러의 엔진 기술력과 합쳐져 터커 장갑 전투 차량으로 이어진다. 이후 군용 엔진 납품 등을 위해 '터커항공'이란 회사를 설립하며 본격적으로 사업에 뛰어들게 된다. 하지만 전쟁이 끝이 나고 그가 그토록 믿고 함께 했던 해리 밀러가 죽자 터커는 사업의 방향을 원래 가고자 했던 자동차 쪽으로 수정해 모험 같은 일을 벌이게 된다.



36,852달러로 1,200만 달러를 만들다


전쟁 후 미국 정부는 군사용으로 사용된 기지나 공장 등을 싼값에 임대하거나 판매하고 있었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던 터커는 미국에서 가장 큰 규모의, B29 폭격기 엔진을 생산하던 닷지 공장을 임대해 그 곳에 '터커주식회사'라는 간판을 올리게 된다. 


회사를 세운 1946년 이전부터 자동차를 만들 계획 아래 모아 온  전문가 그룹 안에는 디자이너 조지 S 로손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비록 2년 후 터커와 뜻이 맞지 않아 회사를 떠나게 됐지만 그가 기초를 다진 터커자동차의 디자인은 알렉스 트레뮬리스에 의해 특별한 결과물로 완성이 될 수 있었다. 이 차가 바로 터커가 만든 최초의, 그리고 최후의 자동차 터커 토페도( Tucker Torpedo)였다.




터커 48. 사진=favscar.com


하지만 터커에겐 이 원대한 계획을 마무리하기 위한 자본이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돈을 끌어와야 했던 터커는 주식을 발행했고, 자동차 판매 대리점을 모집해 영업권을 넘겼으며, 고객들에게 차량 구입 대금을 미리 받는 등의 조치를 통해 총 1,200만 달러의 거금을 모을 수 있었다. 놀랍게도 이 모든 일은 첫 차가 만들어지기도 전에 일어났다.



놀라움 그 자체 '터커 48'


전쟁 중 미국 시장을 장악하고 있던 Big 3, 그러니까 GM, 포드, 크라이슬러는 군수사업에 매달리며 신차를 내놓지 않고 있었다. 터커는 이런 상황이 자신에겐 기회가 된다고 봤고, 군수사업에 뛰어든 상황에서도 그는 자신의 이름을 내건 자동차를 만들기 위한 꿈을 포기하지 않고 구체화시켰다.


그리고 1948년, 드디어 많은 사람들 앞에서 터커는 자신의 꿈인 첫 차를 선보일 수 있게 되었다. 터커 48, 흔히 토페도로 불리는 이 희대의 자동차는 끈질긴 집념이 만들어낸 달콤한 열매였다. 그리고 언론들은 터커가 내놓은 자동차에 "20년이나 앞선 자동차"라는 극찬을 쏟아냈다. 터커는 이 차를 2,450달러에 판매할 것이며 매년 천 대씩 생산을 할 것이라고 큰소리쳤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자동차 안전벨트는 중요하게 취급되지 않고 있었다. 의무적으로 장착해야 하는 게 아니었기에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상황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터커는 자신의 자동차에 안전벨트를 달아 안전에 대한 적극성을 보였다. 또 차체는 비틀림을 최소화한 구조로 설계가 되었고 전면 유리창은 부딪혔을 때 운전자와 동승자를 보호하기 위해 밖으로 꺾이며 튀어나가게끔 설계되었다. 역시 안전에 대한 고민이 만든 독특한 결과물이었다.


거기다 지금은 당연하게 여기는 디스크 브레이크와 4바퀴에 따로 반응하는 독립식 서스펜션, 퓨얼 인젝션 및 반자동 변속기 등이 터커 48에 적용되었고, 운전자 보호를 위해 대쉬보드에는 완충제를 부착했으며 범퍼 안 쪽에는 엔진의 열을 식힐 수 있는 공기 흡입구 등이 달려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요즘 커브를 돌 때 알아서 방향을 트는 지능형 헤드램프가 늘어가고 있지만 이미 이런 개념을 터커는 자신의 자동차에 적용을 했다. 외눈박이로 불린 가운데에 있는 헤드램프는 운전대와 연결되어 최대 10도 정도의 각도를 틀 수 있었다. 왜 언론이 20년은 앞선 자동차라고 호들갑을 떨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들이다.


알루미늄 블록을 한 5.5리터 배기량의 166마력 엔진은 최고 196km/h의 속도를 낼 수 있었으며 당시로서는 놀라운 수준의 가속력을 뽐냈다. 캐딜락이 시속 130km/h까지 도달하는 데 1분이나 걸렸지만 터커 토페도는 15초면 가능했다. 또한 연비도 좋아 당시 기준으로 리터당 10km 정도의 거리를 갈 수 있었다. 이 정도면 혁명적인 차가 등장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시장을 지배하고 있던 빅 쓰리가 놀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터커 토페도. 사진=위키피디아




시련과 실패, 그리고 죽음


수천 명을 초대해 선을 보인 토페도의 첫 판매용 모델은 1948년 3월에 완성되었다. 하지만 이미 터커자동차는 재정적으로 어려움에 직면해 있었다. 공장을 담보로 대출을 해주겠노라 약속했던 은행이 돌연 대출을 하지 못하겠다며 터커를 외면했고, 어떻게 된 일인지 토페도에 관심을 보이던 호의적 언론들도 비판적인 논조로 방향이 급선회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공공연한 비밀이라고 말하는, 이 모든 일들을 뒤에서 조종했다고 의심받는 이들이 있었으니 바로 미국의 3대 자동차 회사 Big3였다. 이들이 '터커 죽이기'에 개입했다는 객관적 증거는 없었지만 터커의 시련과 실패가 누구에 의한 것인지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터커는 상황이 어렵게 되자 무리한 행보를 펼치게 된다. 만들어지지 않은 차로 계약을 시도했고, 결국 공장을 닫아야 했으며 직원들을 해고해야 했다. 엄청난 금액을 투자한 투자자들은 그를 사기죄로 고소했다. 터커를 공식적으로 기소한 곳은 미국증권감독위원회였지만 증권감독위원회는 터커 고발을 위한 표면적인 기구였을 뿐 이들을 움직인 것이 빅 쓰리였다고 모두 수근거렸다. 언론과 은행을 움직이고 미시건 주 상원의원까지 동원해 터커를 압박했던 것이다.


1950년 터커는 15만 달러의 벌금과 징역 115년이라는 기소장 내용에 쇼크를 먹고 기절했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싸웠다. 이길 수 없을 것만 같은 그의 법정 다툼은 그러나 놀랍게도 1월 23일 무죄 판결을 이끌어낸다. 모두가 터커를 등지고 돌아선 상황에서 자신의 무죄를 극적으로 입증해낸 것이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이미 쓰러질 대로 쓰러진 그의 꿈과 열정, 그리고 자동사 회사는 다시 일으켜 세우기엔 너무 많이 뭉개지고 파괴되어 있었다.

 

브라질 투자자와 함께 새로운 스포츠카를 만들겠다는 마지막 희망을 품었던 터커는 1956년 폐암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53세의 나이로 죽게 된다. 평생을 자동차에 대한 열정과 꿈으로 살았던 터커는 그의 행보를 위협으로 간주한 포드, GM, 크라이슬러라는 거대 자본, 기득권 세력에 의해 하릴없이 무너져버렸다. 최종판결이 있던 날 터커는 법정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거대한 조직이 개인의 아이디어와 자유를 짓누르는 것은 이 나라의 미래를 말살시키는 행위이며, 내가 태어난 조국이 나에게 준 고통과 슬픔이다. 언제 어떻게 미국의 자동차가 위협을 받을지 그 누가 알겠는가? 한때 적국인 나라에서 자동차나 라디오를 사들여야 하는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 나는 조국의 건전한 양심을 믿으며 아메리카의 꿈 또한 영원하리라 믿는다"



연설 중 군중의 환호에 답하는 터커. 사진=위키피디아




에필로그


단 51대가 만들어진 터커 토페도는 대부분 경매처분 되었지만 터커 그 자신과 그를 늘 염려했던 어머니에게 다행히 남겨졌다. 처분된 토페도 중 한 대는 스타워즈의 조지 루카스 감독이 구입했으며, 또 한 대는 터커의 꿈을 꺾은 포드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토페도의 또 다른 오너이자 터커의 팬이었던 대부의 감독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는 그의 삶을 다룬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제프 브리지스 주연의 영화 터커 포스터. 1988년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