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이런 착한 잡지를 다 봤나!"
독일은 자동차의 나라답게 관련 잡지가 참 여러 종 있죠. 오래된 클래식 자동차만 다루는 잡지에서부터 비교 테스트만 전문적으로 하는 잡지 등, 수십 여 종류가 판매대를 채우고 있는데요. 오늘은 그 중에서 굉장히 칭찬해주고픈 잡지가 하나 있어 소개를 하려 합니다. 홍보냐고요? 그럴 리가요. 한국엔 판매되지 않습니다.
독일을 대표하는 자동차 잡지 아우토빌트와 아우토모토운트슈포트. 사진=스케치북
아우토빌트(Autobild)라는 잡지가 오늘의 주인공입니다. 매주 발행이 되고 있고, 아우토빌트 프랑스, 아우토빌트 중국 등 해외판도 20여개 가까이 있죠. 독일판은 매주 약 70~80만부가 판매가 되고 있는,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데요. 보통 잡지판에 실린 내용이 홈페이지에 업데이트 되는 데 약 일주일 정도 걸립니다. 그러니까 한 가지 주제가 잡지 구독자 외에도 수백만 네티즌들에게까지 소개되는 셈입니다.
유료 구독자만 매주 80만 명 정도 수준이니 광고주 눈치를 안 봅니다. 그 얘긴 신랄한 비판이 가능하다는 뜻이죠. 그래도 광고는 매주 잡지를 가득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구독자들이 이 잡지에 실린 내용을 100% 수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신뢰할 만한 대중적 매거진으로 최고 수준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아, 그러고 보니 저도 80만 명 중 한 명이군요.
그런데 최근에 이 잡지가 새롭게 구성되면서 그 전에 없던 코너를 하나 신설했습니다. 'Kummer kasten'이라는 건데요. '건의함'이라 되어 있지만 '독자의 소리' 비슷한 내용입니다. 독자들이 자신의 자동차에 문제가 있을 경우 우편이나 홈페이지의 '건의함'을 이용해 도움을 청할 수 있는데요. 그러면 자동차 잡지가 무얼 할 수 있느냐? 접수된 불만 사항이나 도움 요청 내용들 중에 합리적 요구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있으면 독자를 대신해 자동차 회사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죠.
자동차 잡지가 자동차 회사에 이의를 제기한다? 얼핏 우리의 현실에서 보면 '그게 무슨 해결책이 될까?' 생각을 할 수 있겠지만 네, 해결이 되네요. 그것도 아주 제대로 해결해 주는 듯 보입니다. 길게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할 게 아니라 몇 가지 사례를 통해 어떤 것인지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사례 1. 차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요
아우디 Q3. 사진= netcarshow.com
독자 베르너 스테벤너 씨의 사연
" 저는 아우디 Q3 2.0 TDI (디젤) 콰트로 S트로닉 모델을 운전하고 있어요. 2013년 5월에 구매를 했고 현재까지 11,023km를 주행했습니다. 그런데 이 차에 한 가지 문제가 있어요. 주행을 하다가 어느 속도에 다다르면 휘파람 소리 같은 게 차의 어디에선가 납니다. 아무래도 이상해 정비소에 차를 맡겨 검사를 받았는데 소리는 자동차 변속기에서 나는 거라고 이야기를 해줬습니다.
결국 정비소에서 아우디 본사에까지 이 문제를 보고했고 전문가가 와서 다시 검사했지만 결론은 고장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소음은 정상이라는 얘기를 들었죠. 그 얘기를 듣고 나니 불안해졌습니다. 그들의 말이 정말 맞는 건지, 아니면 이 소리로 인해 어떤 더 큰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닌지 걱정입니다. 그래서 도움을 요청합니다. 자동차를 반납해야 하는 걸까요? 아니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하는 걸까요?"
문제를 접수한 해당 매거진은 위의 내용을 아우디에 보여주고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을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아우디는 서비스 파트 책임자로부터 공식적인 답변을 고객에게 전달해줬습니다.
아우디 서비스 부문 답변
" 우리는 미스터 스테벤너 씨께 정중히 제안을 드리는 바입니다. 당신의 아우디 차량을 저희가 다시 정밀하게 검사를 하고 싶습니다. 차를 보내주신다면 그 기간 동안 대차 서비스를 해드리겠습니다. "
아우토빌트의 평가 내용
" 아우디는 아쉽게도 빨리 해결책을 마련하지 않고 우선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식의 말만 했다. 우리가 계속해서 불만을 제기했고, 그제서야 이런 결과를 내놓았다. 자동차 회사의 이런 태도는 고객을 불안하게 만든다. 아우디는 더 노력해야 할 것이다."
# 사례 2. 내 아이폰을 연결할 수가 없어요
메르세데스 GLK 2010년형. 사진= netcarshow.com
칼하인츠 볼프 씨의 사연
"저는 메르세데스 GLK 250 CDI 모델을 타고 있습니다. 네바퀴 굴림 블루 이피션시이고 7단 변속기가 장착되어 있죠. 2011년 9월에 구입을 했고 현재 49,000km 정도 주행한 상태입니다. 이 차에는 커맨드 시스템 (텔레매틱스 기능)이 되어 있어요. 당연히 블루투스 기능이 있어서 음성으로 전화를 걸거나 스피커 폰으로 통화를 할 수 있죠.
그런데 문제는 제가 가지고 있는 핸드폰이 아이폰5라는 겁니다. 핸즈프리 기능을 이용해 안전하게 전화통화를 하고 싶지만 이 차에서는 아이폰5는 연결이 불가능하더군요. 전 이 차를 사는데 이미 많은 비용을 지불한 상태입니다. 그런데 아이폰5를 쓸 수가 없다니, 어떻게 해야 하나요? 전 돈을 더 투자를 해야만 하는 걸까요?"
다임러 측 미디어 담당의 공식 답변
" 아쉽지만 타고 계신 GLK는 아이폰5가 나오기 전에 만들어진 자동차입니다. 그러니 아이폰5의 데이터프로토콜이 없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고객님께서는 해당 스마트폰의 SD카드를 차량 커맨드 시스템으로 보내 아이폰5를 쓰실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아우토빌트 평가
"이 문제에 대해 다임러 측은 친절하게 대응했고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사실 아이폰5가 나오기 전에 만들어진 자동차이기 때문에 이걸 차량의 에러로 보긴 어렵다."
아이폰5는 이 운전자가 GLK를 구입하고 정확히 1년 뒤에 세상에 선을 보였죠. 그러니 이런 경우는 제조사의 책임이라고 하긴 어려울 거 같습니다. 그럼에도 내용을 잡지에 올린 건 아마 이와 비슷한 내용들이 제법 많이 접수가 되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 사례 3. 배출가스 장치가 엔진을 망가뜨렸어요
포드 포커스 카브리오 2008년형. 사진= netcarshow.com
라이몬트 단넨펠트 씨의 사연
"정비소의 이야기에 따르면 배출가스 장치의 고장으로 우리의 2009년식 포드 포커스 카브리오의 엔진이 망가졌다고 합니다. 제대로 배출되어야 할 것들이 빠져나가지 못하고 엔진으로 흡수가 되었고 이게 결국 엔진을 못 쓰게 만들어 버린 것이죠.
포드 직영 정비소에서는 제게 말했어요. 보증 기간이 끝난 상황이지만 회사 측에서 고객을 위해 (kulanz) 엔진 수리비의 10%를 부담하겠다는 내용이었어요. 엔진 수리비는 총 7600유로 (약 1천만 원)가 듭니다. 알아보니 이 엔진은 이미 단종이 된 상태라고 하더군요.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참고로 독일에는 쿨란츠라는 표현의 제도가 있습니다. 영어로는 Goodwill 정도의 뜻이 될 거 같은데요. 보증기간이 끝난 지 얼마 안된 차량이 고장이 났을 경우, 제조사가 선의로 차량의 수리비 일부를 분담하는 그런 제도입니다. 한국에서도 이런 게 있는지, 우리 말로는 정확히 뭐라고 하는지를 몰라서 그냥 독일어 그대로 kulanzantrag (쿨란츠안트락)이라고 적었습니다. 좀 많이 억울해 보이는데요. 이 문제에 대해 포드는 어떻게 답을 했을까요?
포드 고객서비스 담당의 공식 답변
" 쿨란츠안트락을 훨씬 더 높일 수 있는 사안으로 보입니다. 저희가 전체 수리비의 35%를 부담하도록 하겠습니다."
아우토빌트의 평가
"왜 우리가 문제 제기를 하고 나서야 이런 결과를 내놓았는가? 처음부터 정확하게 대응했더라면 서로 불편할 일 없었을 것이다."
# 마지막 사례 4. 고마워요 아우토빌트~
푸조 207CC 2009년형. 사진= netcarshow.com
안젤리카 코속 씨의 사연
"저는 2012년식 푸조 207 CC 모델을 가지고 있죠. 13,800km 주행한 자동차인데 운전석 쪽 좌석 가죽이 푹 꺼졌습니다. 그래서 차를 판매한 딜러에게 연락을 했죠. 처음에는 내가 의자에 부담을 많이 줘서 그렇게 가죽이 울고 꺼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다 나중에 가죽 소재 자체에 이상이라고 말을 바꿨어요.
그들은 저에게 몇 만원 짜리 쿠폰을 주면서 넘기려 했죠. 하지만 전 그걸 원한 게 아니었어요. 그저 정상적인 시트를 원할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아우토빌트의 문을 두드렸고, 결국 당신들(잡지사)의 도움으로 푸조 독일 법인이 의자 수리 비용 모두를 책임졌습니다. 당신들 최고의 도움에 고마움을 전합니다."
아우토빌트 평가
"결론적으로 푸조는 이 문제를 받아들였다. 그 의자는 운전자가 험하게 사용해서도 아니었고, 가죽의 문제도 아니었다. 좋지 않은 쿠션이 사용되었던 것이다. 이제 이제 그녀는 무료로 새로운 시트를 얻었다. 그리고 만족스러워했다. 잘 된 일이다."
감상평
1년에 전 세계적으로 수천만 대의 자동차가 판매됩니다. 수 만개의 부품들이 모여 만들어진 자동차에 어찌 이상이 없을까요? 그래서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제조사의 대응력은 무척 철저합니다. 그러다 보니 고객들의 합당한 요구조차 개인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떤 해결책을 찾게 되나요?
커뮤니티 게시판에 하소연을 하기도, 또 언론에 호소를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지간하게 큰 문제가 아닌, 이슈가 될 만한 내용이 아니면 좀처럼 해결하기 어려운 게 현실입니다. 이런 점은 독일이라고 해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와 독일 사이엔 다른 무언가가 하나 존재하고 있습니다. 바로 독자를 위한 자동차 전문지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자동차 잡지는 독자들, 운전자들을 위해 객관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물론, 이런 억울한 일에 자신들이 대신 발벗고 나서줍니다. 고객들은 그런 잡지를 위해 기꺼이 구독료를 아까워 하지 않고 지불하고 있죠. 그리고 이처럼 지불된 돈은 다시 잡지사가 독자를 위해 무언가 새로운 노력을 기울일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 주고 있습니다. 멋진 순환구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자동차가 독일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산업적으로 절대적입니다. 그러나 자동차를 소비하는 운전자들이 만들어가는 자동차 문화 또한 크고 일상적이기도 합니다. 산업으로서의 자동차와 문화로서의 자동차의 가치가 대등함 속에서 이러한 철저한 독자 중심의 자동차 전문지가 나오는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우리도 이런 잡지 하나 정도는 가져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기 위해선 대한민국의 자동차 문화도 좀 더 일상적이고 대중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저도 이 잡지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제 차에 어떤 문제가 생긴다면 이들이 마련해 놓은 '건의함' 속에 제 사연을 집어 넣어 볼 겁니다. 해결이 될지 안 될지 장담은 할 수 없지만, 적어도 이런 도움의 창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든든한 마음입니다. 어떠세요, 이 정도면 구독료 낼 만하지 않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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