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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자동차 세상/독일의 자동차 문화 엿보기

히틀러 자동차 대중화 공약으로 무얼 노렸나?

오늘 같은 날 무엇을 써야 하나... 고민끝에 히틀러 얘기를 좀 하고자 합니다. 독재자 얘기를 지금 이 시점에 왜 하느냐고 따질 분 혹시 계실지 모르겠는데요. 그냥 별 다른 뜻 없습니다. 보이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어쨌든!


우리가 히틀러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할 때 꼭 나오는 것 중 폴크스바겐(Volkswagen)이라는 이름의 자동차 프로젝트, 그리고 아우토반 건설 등이 있습니다. 이 '동력화사업'이라 불리우는 프로젝트를 통해 히틀러와 나치가 진짜로 얻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보려고 하는 건데요. 오늘 내용은 쿠르트 뫼저가 쓴 '자동차의 역사 (Geschichte des Autos)'라는 책을 기본으로 해서 나름 열심히 정리했습니다. "좋은 거 혼자 먹기 없기!" 라는 이 블로그 본래의 목적에 맞게 공유하자는 뜻에서 써봤으니 차분히 읽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아, 이 책은 물론 한국에도 출판이 되었구요. 저 역시 한국어 번역본을 토대로 했음을 밝힙니다. 




두둥~! 국민차 프로젝트


나치 이전에 바이마르 공화국이라고 있었습니다.정확히 말하면 1919년부터 히틀러가 수상에 오른 1933년까지, 그리고 이듬해 총통이 된 히틀러에 의해 완전히 사라지기까지 유지됐던 된 독일 최초의 공화국이었습니다. 이때 독일은 교통발전을 통해 국가적인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노력했습니다만 자동차 보다는 철도에 대한 관심이 높았던지라 도로나 개인교통수단은 여전히 적극적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던 게 히틀러의 나치가 정권을 잡으면서 상황은 완전히 바뀌게 되죠.


나치는 정권을 잡고 바로 '민족동력화' 프로그램을 선언하게 됩니다. 1933년 베를린 국제 자동차 박람회에서 자동차 보급을 지원하겠다고 히틀러가 밝히면서 시동이 걸린 거죠. 대략 이런 정책들을 내놓게 됩니다. 


1. 모든 신규 등록 자동차에 대한 세금 철폐

2. 낡은 차에 대한 자동차세 일회성 공과금으로 대체

3. 자동차에 유리하게 제국도로교통법 개정

4. 트럭 구매 시 세금 감면

5. 운전교습 의무 철폐 (얼씨구~)

6. 자동차 속도제한 규정 철폐


어떠세요, 엄청난 공약들이죠? 무모해 보이는 감세정책에 엄청나게 강력한 자동차 활성화 방안을 보면서도대체 재정은 어떻게 감당하려고 저러나 싶지만 당시 쑥대밭이던 독일 경제는 어떻게 해서든 돌파구를 찾아야했고, 그래서 히틀러가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어 밀어부칠 수 있었습니다. 정권이 일단 방향을 잡자 당시 언론들은 일제히 히틀러의 정책을 지원하게 됩니다. 


여러 관이 주도한 조직이 생기게 되고, 정부와 언론, 자동차 단체 등이 동력화 프로젝트에 한 목소리를 내면서 '개인 교통을 통한 국민 통제'라는 방향성이 안정화되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런 개인 자동차의 활성화가 단지 경제의 돌파구 마련이라는 목적으로만 볼 수 있는 걸까요? 제가 아는 바로는 히틀러는 운전을 하지 못했습니다. 면허증이 없었죠. 하지만 자동차는 굉장히 좋아했습니다.


베를린 올림픽 당시. 히틀러는 벤츠를 무척 좋아했다고 합니다.


책에 보면 1923년 처음 마련한 차부터가 벤츠였다고 할 정도로 히틀러는 벤츠를 즐겼습니다. 여담입니다만 최근까지도 벤츠가 나치 정책에 일부 가담했다는 사료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기회되면 이런 내용들도 포스팅을 해보고 싶습니다. 여하간 이렇게 차를 좋아한 히틀러는 미국의 포드자동차에서 큰 영감을 얻게 됩니다.


단순인력들을 가지고도 자동차를 대량생산하고 소비하게 하는 포드주의에 강한 인상을 받은 히틀러는 이게 독일에 적용되면 경기 회복과 함께 일자리를 창출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봤던 것입니다. 또 자동차의 대중화는 도로의 확충이라는 것이 필연적으로 따라오게 됩니다. 자연스럽게 시멘트와 철, 기계, 공구, 타이어, 석유화학 제품 등의 수요 증대가 일어나게 되는 것이죠.


자동차 판매가 늘어나자 대리점도 늘어났고, 자동차를 정비하는 기술자들 또한 활발한 활동을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나치의 이런 자동차에 대한 집중 지원은 경기부양책으로 더할나위 없는 대상이 되어준 것이죠. 국민들에게 자동차에 대한 관심과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효과로까지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쿠베와 같은 학자는 '동원을 위한 완전한 동력화'라는 자신의 책에서 "히틀러 정권이 자동차에 대한 열광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그 집단적 꿈을 철저하게 정치적으로 동원해 민족공동체를 건설하고자 했고, 자동차에 대한 꿈이 실현되는 것을 곧 지도자의 승리로 묘사하고자 했다." 라고 비판했습니다.


한마디로 경기를 부양하기 위해 자동차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불러일으켰지만 그 배경에는 자신의 정치적 지도력을 뽐내고, 전쟁을 위한 단합을 다지는 의도가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자동차를 통해 중산층 확대를 꾀한 히틀러였지만 결국 그 중산층의 확대라는 달콤한 청사진은, 국민행복이 아닌 철권 통치를 위한 도구로 사용된 것이죠. 쿠르드 뫼저는 더 신랄하게 이 대목을 비판했는데요. 한번 그대로 옮겨 보도록 하겠습니다.


"자동차는 (당시)노동 계층이 스스로를 중산층으로 오인하도록 했고, 나아가 포드적인 '백색 사회주의' 컨셉트에 따라 노동 계층을 좌파 계급투쟁 이념으로부터 분리시키는 데 기여했다. (중략) 그것은 꿈의 기계를 소유하려는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이었다. (중략) 자동차의 대중적 보급은 정치적 억압에 대한 완충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


우리가 흔히 말하는 라인강의 기적. 그 경제 성장과정을 통해 중산층의 증대가 이뤄진 것이 아니라 이미 히틀러 정권때부터 정치적인 이유로 이러한 시도가 있어다는 건  흥미로운 이야기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너무 좀 어렵고 지루한가요? 한마디로 정리하면요. 당시 나치를 비판하던 공산주의와 관계가 있던 좌파, 그리고 그들과 결속되어 있던 노동자들을 자연스럽게 단절시키면서 민족주의(라 쓰고 파시즘이라 읽는)를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자동차를 이용한 것입니다.


국민차 비틀 모형을 가지고 히틀러에게 설명을 하고 있는 페르디난트 포르쉐(좌)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자동차 대중화가 실현되었을까요? 승용차가 많이 늘어난 건 사실이지만 그건 초반에 반짝이었고, 이런 증가의 상당부분은 경제 위기 때 굴러다니지 않고 처박아 두었던 중고차들이 다시 등록된 것이 차지했습니다. 상용차의 경우는 목표치의 30%가 조금 넘는 수준에 머물렀고 결국 300~400만대까지 늘리겠다는 히틀러의 계획은 2차 대전 이전까지 150만대 늘린 것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이 정도는 이웃 나라들의 성장 수준과 비슷한 것이어서 나치정권의 특별한 결과물이 될 수 없었습니다.


또한 화려하게 내뱉은 규제철폐 등의 공약은 퇴보하게 되고 1938년 이후로는 다시 속도 제한, 연료 배급, 운행 금지 등의 강제 조치가 취해졌고, 고속도로 건설은 3,800km를 끝으로 중단되게 됩니다. 전쟁을 준비하려다 보니 자신들의 정책을 그대로 수행할 수 없었던 것이죠.




아우토반, 그 위대한(?) 삽질의 시작


일자리 창출. 이게 당시 나치가 겉으로 내세운 가장 중요한 프로파간다(정책)였습니다. 당시 독일 인구가 대략 6천9백만 명이었는데요. 경제활동 인구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튼 통계에 따르면 600만 명 정도가 실업자였습니다. 이중 10%인 60만 명이 아우토반 건설 사업에 참여해 삽을 들게 됐습니다.


 앞에서도 잠시 나왔지만 자동차 대중화를 위한 도로건설은 단순 도로건설 참여인원 외에도 다양한 분야에서 일자리를 늘렸습니다. 자동차가 기대만큼 늘어나진 않았지만 그래도 나름 경제적인 측면에서 긍정적 효과를 거둔 것이죠. 그리고 이를 지속적으로 이어가기 위해 반드시 자동차 전용도로(아우토반)는 늘어나야만 했습니다. 


이미 바이마르 공화국 때 세계 최초로 건설된 이태리의 자동차 전용도로를 분석했던 독일이었기에 아우토반 계획은 충분한 자료들을 가지고 추진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 명이라도 더 일자리를 늘리고, 그것을 통계로 잡아 국민들에게 선전을 해야 했던 나치는 숙련자나 건설을 위한 기계장비들을 최소화했고, 힘겨운 육체노동에 익숙하지 않았던 많은 사람들이 '삽질병'에 걸리게 됐습니다.


고속도로 만큼 히틀러를 드높여 보이게 하는 사업도 드물었는데요. 현대적인 교통 도로임을 국민들에게 보여주고, 대단한 결과물인냥 자랑함으로써 자연스럽게 게르만의 우월의식을 고취시킬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아우토반은 매우 튼튼하고 과학적인 토목의 결과물이었습니다. 그 슬픈 유산을 지금의 독일이 물려 받고 있는 것이죠. 


1933년 9월. 아우토반 기공식에서 첫 삽을 뜨는 히틀러. 삽질의 시작!


하지만 이 토목사업은 겉으로는 경제성장의 동력으로 아우토반을 내세웠지만 실질적으로는 정권의 홍보를 위한 도구로 더 많이 사용됐습니다. 이는 각 종 홍보물이나 영화, 뉴스 등을 통해 보여지면서 국민들을 계속해서 세뇌시켜 나갔습니다. 저 '삽질의 추억'은 지금까지도 일부 독일의 극우주의자들에겐 아름다운 장면으로 기억되고 있는데요. 거대한 국토의 대통합, 게르만의 통합이라는 가치는 1차 대전의 패전국, 경제적으로 위기에 몰린 국민들에겐 희망의 도로로 비춰지기에 충분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도로를 채울 만한 교통량이 형성되지 않았고, 실제로 아우토반은 처음의 약속과는 달리 독일 전체를 연결하지 못한 가운데 전쟁의 이동로로 사용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아우토반에 대한 기술적인 평가는 대단히 높습니다. 하지만 이런 정치적 이용, 전쟁에 활용되어버리고만 슬픈 역사로 인해 죄인 취급을 당해야 했죠.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독일 자동차 산업을 지금의 자리까지 올려놓은 숨은 공신이 되었고, 이제는 자동차를 좋아하는 전세계 사람들에게 자유로운 질주의 공간으로 사랑받고 있습니다.




느낀점


히틀러가 보여준 자동차 대중화와 아우토반 건설과정을 보면서 이게 남의 나라 역사 속 독재정권의 얘기라고 하기엔 묘하게 익숙한 느낌이 들었는데요. 당시 국민들을 철저하게 기만하고 (혹은 국민들 스스로가 기만당하고자 했을지도 모를) 그들을 전쟁의 볼모로 삼아 개인의 비뚤어진 야욕을 채우려 했던 히틀러에게 일말의 연민도 느낄 수 없었습니다.


물론 그의 강력한 경기부양책은 부분적으로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과오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혹자는 그래서 히틀러를 필요악이라고 부르기도 하죠. 어쨌거나 현재의 독일은 과거 자신들의 잘못을 철저하게 반성하고 살고 있습니다. 또 두 번의 전쟁으로 무너진 국가의 진정한 재건은 독재자 히틀러가 아닌 국민들 스스로의 힘으로 일궈냈다는 점에서 우리와 교집합이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역사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얘기하고, 어떤 방향으로 살아가야할지를 보여줍니다. 독일인들은 누구 보다 그 것을 잘 알았고, 처절하고 철저하게 반성과 속죄의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최근엔 많은 독일인들이 다시 태어난다면  독일인이 아니길 바란다는 충격적인 설문결과도 공개가 됐는데요. 그럼에도 그들은 개인의 자유와 인권, 환경과 미래를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해법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히틀러가 만들어준 경제의 환상을 붙잡고 큰 것이 아니라, 히틀러라는 독재자의 과오에 대한 죄의식이 지금의 독일을 만든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읽느라 고생들 하셨습니다. 따뜻한 금요일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