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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자동차 세상/독일의 자동차 문화 엿보기

프랑스로 팔려가는 오펠, 독일은 왜 반길까

이곳 유럽 시각으로 6일 오전 9시 15분, 한국 시각으로는 오후 5시 15분이 되겠군요. 푸조∙시트로엥 그룹은 파리 본사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오펠 인수를 공식 발표하게 됩니다. 지난 2월 중순 GM과 PSA(푸조∙시트로엥 그룹) 간의 오펠 인수협상이 진행되고 있다는 소식이 대중에게 알려지고 약 3주 만에 그 결과를 전하게 된 것인데요.


이로써 PSA는 폴크스바겐 그룹에 이어 유럽에서 두 번째로 자동차를 많이 판매하는 기업이 됐습니다. 좀처럼 침체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프랑스 자동차계에는 반가운 소식입니다. 물론 적자에 허덕이는 오펠 인수로 PSA까지 흔들리게 되는 거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지만 PSA를 흑자로 돌려놓은 최고경영자 카를로스 타바레스는 자신의 결정에 확신을 가진 듯 보입니다.

폴란드 글리비체에 있는 오펠 공장의 모습 / 사진=오펠

우려에서 찬성으로 바뀐 이유 

감원 없고 공장 폐쇄도 없다

오펠은 독일 헤센주 뤼셀스하임에 본사를 두고 유럽 전역에서 사업을 하고 있죠. 영국에서는 복스홀이라는 이름으로 판매되고 있는데 연간 100만 대 안팎의 판매량을 보이는 수준입니다. 1929년 미국 기업 GM에 팔렸지만 150년이 넘는 오펠 역사 내내 독일에 근거지를 두고 있는 기업이라는 점에서 독일인 누구나 오펠을 자국 자동차 회사로 여깁니다.


따라서 이번 오펠 인수는 미국 회사와 프랑스 회사 사이의 거래만이 아닌, 독일과 영국 등이 포함된, 상당히 복잡한 구조 속에서 이뤄졌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폴란드와 오스트리아, 스페인 등, 오펠 공장이 있는 나라들 역시 이번 인수 과정을 주의 깊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당장 일자리 문제 등이 걸려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그랬는지 오펠 인수 소식이 전해진 초기만 하더라도 독일에서는 부정적 기류가 있었습니다. 카를로스 타바레스가 푸조∙시트로엥 최고경영자 자리에 오른 후 구조조정을 통해 인원 감축을 한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인데요. 금속노조와 독일 정부 등이 강하게 반발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카를로스 타바레스는 독일과 영국 정부 및 노동자 단체 등과 만나 이런 우려를 해소시키기 위한 노력을 보였습니다. 구조조정에 따른 해고나 공장 폐쇄는 없을 것이라고 약속한 것이죠.

카를로스 타바레스 회장 / 사진=PSA

또 한델스블라트 같은 경제지는 오펠이 독일 기업으로 남기를 바라며, 기업을 망치거나 프랑스 자동차를 독일 이름으로 마케팅하는 등의 행위를 않겠다는 익명의 PSA 관계자 발언을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여러 경로를 통해 푸조∙시트로엥의 계획과 의지가 확인되면서 우려의 분위기는 잦아들었습니다.


GM은 못 믿어도 PSA와 프랑스 정부는 믿는다?

사실 오펠은 2009년 GM 파산과 함께 캐나다 부품제조사인 마그나에 인수될 수 있었습니다. 독일 장관까지 나서 마그나 인수가 확정됐다고 발표까지 했으니까요. 그러나 GM 이사진은 당시 유럽 시장을 놓칠 수 없다고 판단해 오펠 인수를 막판에 거부합니다. 45억 유로라는 천문학적 금액의 지불보증까지 섰고, 유럽 다른 나라에게 욕을 먹어가면서까지 오펠 파산을 막아 마그나에 인수되길 바랐던 메르켈 정부로서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후 보훔 공장의 폐쇄라는 상황까지 맞게 된 독일 정부 입장에서는 GM은 미덥지 못한 기업, 어떻게 오펠을 처분할지 모르는 불안정한 기업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던 와중에 푸조∙시트로엥이 오펠을 인수하겠다고 나섰고, 오펠을 지금보다 더 큰 회사로 키우겠다는 의지까지 보였으니 독일 정부나 오펠로서는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 볼 수 있게 됐습니다.

메르켈 총리와 오펠 회장(우측 마이크 든) / 사진=오펠

여기에 푸조∙시트로엥의 지분 14%를 가지고 있는 프랑스 정부가 나서 오펠 인수 자금 등에 관심을 두겠다고 했기 때문에 독일은 물론 영국 및 유럽 내 오펠 공장을 갖고 있는 국가들로서는 그 약속을 믿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게 됐습니다. 특히 프랑스와 독일은 경쟁관계이기도 하지만 유럽연합 내에서 가장 강력한 협력 관계를 펼치는 국가이기도 하죠.


미국과는 다른 문화적 공감대

독일과 프랑스는 모두 노조 문화와 노동법에 대한 이해가 깊습니다.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 같은 문화권 안에 있고 보조를 맞춰 갈 수 있다는 점에서 오펠이 다른 곳으로 팔려가는 것보다 훨씬 낫다는 것이 독일의 여러 전문가 의견이기도 합니다. 2009년 때처럼 거액의 보증을 정부가 설 일도 없고, 구조조정의 걱정도 현재로써는 크지 않으며, 오히려 오펠을 지금보다 더 키우겠다는 경영진의 확고한 의지와 프랑스 정부의 지원이 기대되는  등, 여러 면에서 푸조∙시트로엥의 오펠 인수는 독일 입장에서 최적의 거래로 평가될 수 있을 듯합니다.


눈에 띄는 특별한 조건

GM과 PSA는 이번 오펠 인수 과정에서 눈에 띄는 조건 하나를 내걸었습니다. GM이 오펠 직원들의 연금 일부를 지원하는 대신 GM의 기술로 만들어진 오펠 자동차가 유럽 이외 지역에서 판매할 수 없도록 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쉐보레 전기차 볼트를 거의 그대로 가져온 오펠 암페라e는 쉐보레 볼트가 판매되는 지역에서 서로 판매 경쟁을 할 수 없습니다.


또 한국 GM에서 만든 스파크를 기반으로 한 오펠의 경차 급 모델 카를 역시 유럽 외 다른 지역에서 스파크 등과 경쟁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유럽 외 GM 차들이 판매되는 지역에서 오펠이 사업을 할 수는 있지만 GM 플랫폼을 통해 나온 오펠의 자동차는 팔 수가 없는 것입니다. 

경차 Karl / 사진=오펠


해외 시장 진출 의지 밝힌 PSA 회장

그렇다고 오펠이 유럽 외 다른 지역 진출을 포기했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이미 타바레스 회장은 독일 차라는 이미지를 부각해 오펠을 해외로 진출시키겠다고 밝혔기 때문인데요. 다만 앞서 밝힌 조항에 따라 일부 모델은 GM 모델과 경쟁할 수 없게 됩니다. 


하지만 주력인 코르사, 아스트라, 그리고 아담과 등은 큰 영향을 받지 않을 것으로 보이며, 올해부터 연속해서 나올 SUV들 역시 푸조의 플랫폼을 통해 나올 예정이기 때문에 나름 경쟁력 있는 오펠 모델을 한국 시장에서도 만날 기회는 열려 있게 된 셈입니다. 


독일인들에게 오펠은 안타까운 자동차 회사입니다. 독일에 평생 뿌리를 박고 사업을 하고 있지만 20년 가까이 적자에 허덕이고 있죠. 항상 공장 폐쇄나 해고 등의 위험을 안고 있고, 언제 어디로 팔려갈지 늘 긴장 속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PSA 인수를 통해 오펠은 새로운 도약이 가능해졌습니다. 이번을 계기로 좋은 차 많이 만드는 그런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으면 합니다. 88년 만에 새 주인을 맞는 오펠의 앞날에 좋은 일만 가득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