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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자동차 세상/독일의 자동차 문화 엿보기

독일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교통표지판

한국과 독일은 서로 운전면허증을 조건 없이 교환할 수 있는 협약에 가입돼 있죠. 따라서 한국에서 면허를 취득한 사람이 독일 현지 면허증을 발부받는 과정은 비교적 간단합니다. 협약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독일에 와 새로 면허시험을 치러야 했으니 그때와 비교하면 다행히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면허증 교환으로 끝내다 보니 막상 한국과는 다른 교통체계, 특히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독일 현지 교통표지판을 맞닥뜨렸을 때 당황할 수밖에 없게 되고, 표지판 의미를 몰라 사고가 나거나 다른 운전자에게 욕을 먹었다는 얘기를 자주 듣게 됩니다.


저 역시 처음 독일에서 운전할 때 거의 정보가 없는 상태였던지라 아내에게 끝없는(?) 잔소리와 교육을 받아야 했죠. 그 덕에 빨리 적응했고 이제는 익숙해졌지만 처음엔 왜 그리 낯설고 어려웠던지. 그런데 이런 독일의 복잡한 교통표지판 중 이방인인 저의 눈에 특별하게 들어온 것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마치 독일 교통문화를 상징한다고나 할까요? 어떤 것인지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교통완화지역 (Verkehrsberuhigter Bereich)

파란색 바탕의 교통완화지역 표지판이 눈에 잘 띄는 곳에 설치돼 있다

평범한 독일 주택가 진입로 모습입니다. 사진 우측에 보이는 표지판은 인도와 차도가 구분이 없는 곳임을 알려주는 것으로, 반드시 자동차가 보행자의 걷는 속도에 맞춰 주행을 해야만 합니다. 대략 시속 10km/h 전후가 될 텐데요. 이곳은 아이들이 뛰어놀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기 때문에 속도를 더 올리는 건 위험한 행위로 간주됩니다. 


그렇다고 차량의 이동권을 보행자가 함부로 방해하는 행위도 안 된다고 분명히 명시돼 있습니다. 한마디로 차와 사람에게 동등한 이동 속도와 권리가 주어진 공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1977년 처음 도입돼 1980년부터 본격적으로 적용됐고, 독일 주택가 등에서는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 표지판입니다. 그리고 이와 비슷한 개념은 유럽 곳곳에 또한 있습니다.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베게그눙스존/ 사진=위키피디아, Herzi Pinki

오스트리아 등에서는 '만남의 공간'이라는 의미의 베게그눙스존(Begegnungszone)이 있는데, 여기서 자동차는 최고 시속 20km/h까지 달릴 수 있으며 대신 독일과 달리 보행자의 권리가 우선됩니다. 이 개념은 스위스에 먼저 도입돼 이후 벨기에, 프랑스, 오스트리아 등으로 퍼져나갔죠. 독일의 교통완화지역 보다 훨씬 다양한 지역에 적용되고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차이라고 하겠습니다. 


보는 분에 따라 이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우리나라에도 독일의 교통완화지역, 또는 스위스의 베게그눙스존과 같은 보행자 철저 보호 구간이 주택가나 아파트 단지 등에 적용되면 어떨까 합니다. 참고로 독일의 '교통완화지역을 직역하면 '교통진정지역' 정도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추월금지 및 속도제한 해제 

(Ende sämtlicher streckenbezogener Geschwindigkeitsbeschränkungen und Überholverbote)

추월금지 및 속도제한 해제 표지판 / 사진=위키피디아

굉장히 긴 이름의 표지판이죠? 흔히 '표지판 넘버 282'라 불리는데 다른 곳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말 그대로 독일에만 있는 그런 표지판입니다. 바로 속도 무제한 구간임을 알리는 것으로 독일 아우토반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 표지판이 세워져 있는 곳에서는 추월 제한도 없고 속도의 제한도 없어서, 말 그대로 운전자들에겐 자유의 상징과도 같습니다.


이 표지판이 처음 설치된 것은 1956년으로, 상당히 일찍 적용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당시 나라가 갈린 상황에서도 동독과 서독이 같은 해, 거의 같은 타입의 속도제한 해제 표지판을 적용했다는 점입니다.

이미지 출처 = 위키피디아

또 새롭게 개선된 속도제한 해제 표지판이 1971년부터 적용됐는데, 이 역시 공교롭게도 시기나 스타일에서 거의 비슷했습니다. 동독의 것은 빗금이 4개라면 서독의 것은 빗금이 5개라는 것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죠.


통일된 이후에는 서독의 것으로 합쳐져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데요. 바로 이 표지판이 그리워 스위스나 네덜란드 등, 이웃한 나라에서 많은 운전자가 아우토반을 찾기도 합니다. 다만 환경 문제 등으로 인해 점점 속도 무제한 구간이 줄고 있는데, 앞으로도 이런 변화는 천천히, 하지만 계속 이어질 것으로 예상됩니다.

독일 지방도로 초입 풍경

그런데 속도제한 해제 표지판이 아우토반에만 있는 건 아닙니다. 위 사진 속 표지판은 시속 70km/h의 제한구간이 끝났음을 알리는 것으로, 독일 지방도로 최고제한속도인 시속 100km/h까지 달릴 수 있음을 뜻합니다. 또 제한속도 시속 30km/h 구간에서 이런 표지판을 있다면 여기서는 시속 50km/h의 속도까지 달릴 수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도로 환경에 따라 다양하게 적용되고 있습니다.

독일 주택가 30km/h 속도제한 해제 표시


절제와 질주, 그 극과 극을 만날 수 있는 곳

이 외에도 우리나라와는 다른 이곳만의 교통표지판이 여럿 있는데요. 하지만 오늘 소개한 '속도완화지역' 표지판이나 '속도제한해제' 표지판만큼 그 성격이 극과 극을 달리는 것도 없습니다. 바로 이 대비감이 어떤 것보다 독일의 교통문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철저한 보행자 보호, 하지만 달릴 수 있는 곳에서는 제한 없이 마음껏 질주할 수 있는 환경이 이처럼 공존할 수 있는 것은 꼼꼼한 운전 교육과 좋은 교통 인프라, 그리고 여기에 룰을 지키려는 운전자들의 의식이 합쳐졌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 교통 문화 발전을 위해서도 이런 조합이 한국에서도 꼭 이뤄졌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