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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자동차 세상/독일의 자동차 문화 엿보기

차번호판에서 조차 과거史 용납않는 독일



최근 독일의 한 지역 언론에 의해 소개된 사연 하나가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았습니다. 뮌헨으로 잘 알려진 독일 남부 바이에른 주의 한 도시에서 화물운송업을 하는 하인리히 하쉬(Heinrich Hasch) 씨는 자동차 번호판을 등록하기 위해 해당 관청에 갔다가 거절을 당했습니다.

 

하쉬 씨는 지역 언론과 인터뷰에서 너무 황당했다고 소감을 밝혔는데요. " 그동안 제 명의로 등록한 차만 서른 대가 넘어요. 그 때도 제 이름 이니셜을 썼고, 다 허가가 나왔었는데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어요." 이 내용이 다시금 독일의 메이저 언론을 통해 소개되면서 독일 전역에서 뜨거운 감자처럼 관심을 받게 되었습니다. 도대체 그 관청에선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요? 

 

아무래도 이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독일의 자동차번호판 제도부터 알아야 할 거 같습니다. 간단하게 정리한 내용을 보고 다시 하쉬 씨의 사연으로 돌아가도록 하죠.




1. 독일 번호판 이야기

 

폴로 R WRC. 사진=폴크스바겐

 

독일의 자동차 번호판은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되어 있습니다. 좀 더 자세히 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사진=위키피디아


이것이 독일 번호판 기본 형태인데요. 각각의 숫자나 표시들은 다 의미가 있죠.

 

 



 

 

1번 : 별과 파란색은 유럽연합을 나타냅니다. 그 아래에 있는 D는 독일(Deutschland)을 뜻하죠.

2번 : 독일 내 도시 (지역)를 의미합니다. RA는 Rastadt라는 도시. 

3번 : 위에 오렌지 색깔로 되어 있는 표시는 차량 정기 검사를 확인시켜 주는 스티커이고, 아래는 독일의 16개 주의 문장이 관인처럼 들어가는 자리입니다. 

4번 : 알파벳 2개와 숫자 4개까지 최대한 쓸 수 있는 차량 소유자가 선택하고 꾸밀 수 있습니다.




씨드 GT. 사진=기아자동차


기아가 유럽에서만 판매하는 씨드의 GT 버젼 사진인데요. 번호판을 보시죠. 앞에 파란색에 D가 있으니 독일에서 등록된 차량이 맞습니다. 그리고 F는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을 뜻하고요. 헤센주를 나타내는 문장 관인이 스티커로 붙어 있군요. 근데 튀프(검사 스티커) 마크는 안 보이는군요. 아마 검사 전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 뒤에 GT 138은 등록하는 사람이 (기아차 유럽 법인이겠죠?) 자신들이 원하는 알파벳과 숫자를 넣습니다. GT카라고 GT라는 알파벳을 넣었고 숫자는, 글쎄요. 나름 뭐 의미가 있겠죠? 대충 이런 식으로 파악이 가능합니다. 한 대만 더 볼까요?



GLA 뒷모습. 사진=메르세데스


이번엔 다임러가 새롭게 내놓은 GLA라는 차에 부착된 번호판입니다. 역시 독일을 나타내는 것이 맨 앞에 나와 있고 그 다음 S가 들어가 있는데 슈투트가르트에서 등록된 차량이란 뜻이 됩니다. 슈투트가르트는 벤츠의 고향이죠. 차량검사 스티커와 문장 관인 스티커도 다 붙어 있고요. 마지막으로 등록자가 자신이 원하는 알파벳과 숫자를 써 넣었습니다. 


MB (우리나라 MB아님) 라고 되어 있는데 메르세데스 벤츠의 이니셜이고 마지막 숫자는 차량 등록일 혹은 만들어진 날짜 정도가 아닐까 예상을 해봅니다. 그런데 번호판은 같은 유럽이라도 국가마다 그 룰이 조금씩 다 다르고, 그렇기에 표기 방식이 다릅니다.




사진=위키피디아


오스트리아 번호판(위)과 덴마크 (아래) 번호판 모습입니다. 맨 앞에 유럽연합 가입국이라는 것과 그 나라를 뜻하는 이니셜은 동일하지만 나머지 부분은 국가별로 조금씩 다르죠. 오스트리아는 독일과 흡사해 보이네요. 그리고 최근 독일에서는 3D로 제작된 번호판을 판매하는 업체도 생겨나서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3D 프린터로 만들어진 번호판. 사진출처=3D-kennzeichen.de


아우토빌트에 소개가 되고 난 뒤에 이 회사는 적극 그 점을 활용해서 홍보에 나서고 있는데, 차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어필할 수 있을 거 같네요.




사진=위키피디아


'0-1'이란 번호판이 독 특별해 보이죠? 독립 연방대통령 관용차입니다. 수상의 경우는 '0-2' 번호판을 사용하고 있는데 주로 BMW와 아우디 등이 관용차로 많이 쓰입니다. 그 외에 맨 뒤에 'H'가 붙어 있는 번호판이 있는데 최소 30년 이상된 일명 '올드타이머' 자동차용 번호판입니다. 그 번호판을 달면 1년에 192유로의 비용을 추가로 내야 하죠. 아마 환경부담금 뭐 이런 금액이 아닐까 싶네요. 


그 외에도 굉장히 다양한데 그걸 다 여기서 소개할 필요는 없을 거 같아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 더 소개를 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독일에서는 지역을 뜻하는 알파벳 (2번에 해당)이 다른 의미로 많이 불리기도 합니다. 일종의 장난이라고 할 수 있지만 나쁘게 보면 지역 폄하라고 볼 수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거의 모든 지역이 해당되기 때문에 하나의 문화(?) 정도로 여기면 될 거 같습니다. 예를 좀 들어 볼까요?


BA : 밤베르크 (Bamberg)라는 지역을 가리키는데 사람들이 이걸 Blutiger Anfänger 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직역하면 피흘리며 시작한 사람 정도가 되는데, '완전초보'라는 뜻입니다. 


DBR : 바트 도베란 (Bad Doberan)이란 지역을 뜻하는데요. Deutschlands beste Raser 라고 장난스럽게 바꿔 부릅니다. 의미는 ' 독일 최고의 과속자' 라고 할 수 있겠네요.


MZ :   마인츠-빙엔 (Mainz-Bingen) 지역을 뜻하는 것인데 Müde Zombies 라고 놀리죠. 의미는 '피곤한 좀비들'


MOL: 뫼르키쉬-오데르란트 (Märkisch-Oderland)라는 지역을 의미하지만 Meine Oma lenkt 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의미는 '내 할머니가 핸들을 쥐었다' 정도가 될 거 같습니다. 거의 모든 지역 알파벳에 이런 식의 의미들이 부여가 되어 있죠. 가끔 이웃한 도시끼리 번호판 가지고  서로 놀리다 쌈도 나고 그런다고 하네요. 그러면 다시 하쉬 씨의 이야기로 넘어가 볼까요?




2. 나치의 흔적을 용납하지 않는 독일


독일은 전쟁을 두 번이나 일으킨 국가입니다. 이건 씻을 수 없는 부끄럽고 괴로운 역사예요. 분명한 사실이죠. 그리고 2차 대전 패망 후 독일인들은 다시는 이런 불행한 역사를 만들지 않겠다고 대내외적으로 다짐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과거사에 대한 반성은 지금 이 순간까지도 계속되고 있죠. 전범 혐의를 받는 사람들을 지구 끝까지 쫓아가 법정에 세웠다는 뉴스를 가끔씩 듣곤 하죠.


이렇듯 철저하다 못해 질릴 정도로 자신들의 잘못을 반성하는 독일은 사회 모든 부분에서 나치나 히틀러 등의 전체주의와 관련한 분위기, 혹은 움직임을 차단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과거 히틀러에게 어떻게 현혹됐고, 그것이 어떻게 사람들을 파멸의 길고 끌고 왔는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권력을 1인에게 집중시키지 않기 위해 대통령과 총리로 나눠 버렸고요. 공공장소에서 히틀러를 찬양하거나 언급하는 경우 경찰에 끌려 갑니다. 아니, 경찰에 끌려가기 전에 일단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저항에 먼저 부딪히게 되겠죠. 


나치 정권 때 관련된 이미지나 용어 등도 거의 금기어입니다. 독일 사람들은 국가도 사실 잘 안부르는 편이죠. 국가나 민족에 대한 통일된 개념이 낮은 편입니다. 물론 게르만의 역사가 잘게 쪼개진 지역 중심으로 이어져 왔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겠지만 히틀러라는 괴물로 인해 더욱 조심하게 됐습니다. 집단 광기를 몸으로 체험한 것이 독일인들만은 아니지만 독일만큼 철저하게 반성하고 제도로 이를 엄격하게 통제하는 나라도 없을 겁니다.


하지만 이렇게 거의 모든 분야에서 전체주의를 배격하는 사회가 되었음에도 네오나치와 같은 극우주의자들은 존재합니다. 비록 소수이긴 하지만 경쟁에서 밀린 일부 젊은이들을 현혹시켜 극단적인 사회배격 운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은 정부에 의해 철저하게 감시되고 있죠. 이들 외에 은근히 과거에 대해 향수를 갖고 있는 드러나지 않는 나치 향수병 환자들에겐 독일은 끊임없이 제도를 통해 싹을 잘라내고 있습니다. 그런 노력 중 하나를 자동차 번호판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1941년 독일제국 의회 모습. 사진=위키피디아




3. 자동차 번호판에 금지된 알파벳 조합


하인리히 하쉬 씨와 인터뷰를 한 지역 언론은 번호판 신청을 거부한 해당 관청에 전화를 걸었죠. 그랬더니 관청에서는 자신들은 연방교통청에서 지정한 규정에 따랐을 뿐 어떤 잘못도 없다고 대답을 해왔습니다. 다시 신문사는 연방교통청에 문의를 합니다. " 왜 하인리히 하쉬 씨의 이니셜 HH가 들어간 번호판이 문제가 되는 건가요? " 


연방교통청은 이렇게 답을 줬습니다. "우리는 예전부터 KZ, NS 등의 알파벳 조합은 번호판에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권고조항을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2010년에 AH와 HH 등을 새롭게 여기에 추가시켰죠. 이 규정을 따르느냐 마느냐는 전적으로 지역 관청의 판단에 따릅니다. " 그렇다면 이제 저 금지된 알파벳 조합이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 알아 봐야겠군요.


KZ : 콘첸트라치온스라거 (Konzentrationslager)는 학살의 상징 같은 '수용소'를 의미. 


NS : 나치오날소치알리스무스 (Nationalsozialismus)는 국가사회주의라는 뜻으로 '나치'의 원래 단어.


SS : 슈츠스타펠 (Schutzstaffe)은 나치친위대를 뜻함.


HH : 하일 히틀러 (Heil Hitler)와 나치 정권의 2인자이자 SS의 우두머리 하인리히 힘러 (Heinrich Himmler)의 약자를 의미.


AH : 아돌프 히틀러 (Adolf Hitler)의 약자.


금지를 권하는 알파벳 조합은 거의 모두가 나치 정권과 관련돼 있습니다. 그 외에는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금하지 않고 있죠. 하일 히틀러에서 하일은 원래 성공, 건강 등을 의미하는 단어이자 종교적으로는 구원을 의미하지만 여기선 '히틀러 만세!' 정도가 될 거 같은데요. 이렇듯 오해의 소지를 없애겠다는, 혹은 의도된 나치추종자들의 시그널을 차단하겠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하겠습니다.


재밌는 것은 대답을 전해들은 하쉬 씨는 " 그러면 함부르크 번호판은 어떻게 되는 거냐? 거기도 금지시켜야 하는 거 아니냐?" 라고 반문을 했다는데요. 갑자기 잘 있는 함부르크시는 왜 걸고 넘어졌을까요? 


사진=kfz-kennzeichen.info


함부르크 번호판입니다. 지역을 뜻하는 앞에 알파벳이 HH로 되어 있죠. HH가 선택할 수 없는 금지어라면 이것도 그러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얘기죠. 연방교통청에서는 "지역의 경우는 고유한 표식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으며, 개인의 선택에 한해서는 금지를 권고한다." 라고 다시 답을 내놨습니다. 또한 함부르크에서도 이 권고조항을 받아들여 실시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함부르크에서는 'HH HH'와 같은 번호판은 볼 수가 없다는 거겠죠. 


독일 여론은 일단 이런 조치에 대해 비판적입니다. 굉장히 많은 의견들이 쏟아졌는데요. 특히 비판적인 입장에 있는 사람들의 얘기를 하나로 묶어 보면 대략 이렇게 정리가 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 오래 전에 전쟁은 끝이 났다. 우리는 많은 부분에서 전쟁의 잔혹함과 아픔을 배우며 살아가고 있다. 또한 나치나 히틀러가 얼마나 무모하고  씻을 수 없는 과오를 저질렀는지 잘 알고 있다. 또한 독일은 이런 잘못을 계속 인정하고 있는 나라다. 학교에서도 늘 배우고 가르치고 있다. 하지만 번호판까지 이렇게 할 필요는 없다.


독일은 AS, HH라는 이니셜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사는 나라다. 그들 모두가 전범 취급을 당하는 건 옳지 않다. 과거는 과거지만 그것이 이런 식으로 우리를 위축시키고 자신감을 잃게 만들어서는 안된다. 앞으로 독일을 이끌어 갈 젊은이들에게 올바른 역사교육 못지 않게 독일 국민으로서 자긍심을 갖고 살게 해야 한다. 정부가 과잉 대응을 하고 있다. "


독일인들의 이런 반응, 한편으론 이해가 됩니다. 그들 스스로 과거의 잘못, 자기 아버지 어머니,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부끄러운 역사를 잘 알고 있는 것이죠. 하지만 너무 많은 부분에서 이런 제도적 장치들이 마련돼 있어 어떻게 보면 사회 전체가 위축되어 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분위기가 싫어서인지는 몰라도 많은 사람들이 다음 생애엔 독일인으로 태어나고 싶지 않다고 설문에 응답을 하기도 했으니까요. 어떻게 보면 지금 세대들은 안됐다는 생각까지 듭니다.  


하지만 우리처럼 슬픈 근대사를 갖고 있는 국민들 입장에선 이런 독일이 어떻게 보면 고맙고, 어떻게 보면 당연한 길을 가고 있는 거라고 보여집니다. 특히 일본의 과거사에 대한 뻔뻔한 대응과 친일 잔재를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부끄러운 현대사를 생각하면 독일이나 프랑스의 과거사에 대한 대응은 모범적으로 보이기까지 합니다. 독일인들의 속상한 마음은 알겠지만 이런 노력이 있어 왔기 때문에 어쩌면 지금의 존경받는 국가로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과연 이 금지 조항이 계속 지켜질 것인지, 아니면 너무 가혹한 것 아니냐는 비판 여론에 따라 변화를 보일지 지켜봐야겠습니다. 먼 독일의 이야기이지만 한국인들에게 남의 일처럼 보이지 않는군요. 당신의 생각은 어떤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