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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자동차 세상/독일의 자동차 문화 엿보기

폭스바겐과 현대차 탄생에는 공통점이 있다?

 

언제부터인가 현대자동차는 독일 차를 경쟁의 상대로 지목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인정하든 안하든 그렇습니다. 스카웃하는 인력들을 봐도 그렇고, 프리미엄 브랜드를 추구하는 현대 입장에서는 이제 일본차가 아닌 독일 메이커를 직접적 타깃으로 삼고 있는 것이죠.

 

사실 이와 관련해 '현대 VS 폭스바겐'이란 컨셉으로 지금 잡지에 보낼 글을 정신없이 쓰고 있는 상황입니다. 꽤나 긴 내용이라 다 보여드릴 순 없을 거 같고. 그 중에서 현대자동차와 폴크스바겐의 탄생 배경이 묘하게 오버랩이 되는 부분에 대해서  오늘은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전체 내용 중 별도로 분량도 적고 떼어 내도 앞뒤 흐름과 상관없이 읽을 수 있을 듯해서 한 번 준비해봤는데요. 과연 어떤 과정을 통해 두 회사는 만들어졌고, 또 그 당시 사회적 배경은 어떠했는지, 여러 관점에서 한 번 접근해보시는 건 어떨까 합니다.

 

 

현대자동차의 탄생

현대차의 탄생을 이야기하기 위해선 박정희 전 대통령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유는 그가 5.16으로 권력을 쟁취하고 바로 취한 정책 중 하나가 바로  ‘자동차 공업 보호 육성법 (1962년)’이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일환으로 발휘된 이 보호 육성법으로 실질적인 자동차 회사들이 정부의 지원을 받아 쏟아져 나오게 됐다.

 

우선 재일교포 출신의 박노정이 세운 ‘새나라자동차’는 정부의 특혜 속에 닛산의 자동차를 반조립 상태로 들여와 판매를 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2년 후 새나라자동차는 신진공업사에 넘어가 신진자동차로 바뀌게 되고, 다시 신진자동차는 대우자동차로, 그리고 대우는 다시 한국 GM으로 바뀌는 파란의 역사를 이어가게 된다.

 

또 이 무렵 자전거 만들던 기아가 기아정공으로 이름을 바꿔 삼륜차에 도전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자동차 산업에 뛰어들었다. 기아가 삼륜차를 만들던 1962년 겨울, 지금은 인도 마힌드라에 그 이름을 넘긴 쌍용자동차도 ‘하동환 자동차 공업’이란 이름으로 그 역사의 출발을 알리게 된다. 이후 다시 아시아자동차가 등장했으며, 가장 늦었다고 할 수 있는 1967년, 정주영에 의해 현대자동차가 간판을 올리게 된다. 초대 회장엔 포니 정으로 잘 알려진 동생 정세영을 앉혔다. 

 

그렇다면 현대자동차는 하릴없이 권력의 요구에 끌려 출범을 했는가? 꼭 그렇지는 않다. 이미 정주영 회장은 일제 강점기부터 자동차 정비 관련한 일을 했다. 해방 후 빼앗기다시피 했던 정비소를 되찾아 ‘현대자동차공업사’라는 이름으로 사업을 다시 시작했고 이것이 현대건설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이렇듯 박정희에 의해 한국 자동차 산업은 본격화되었고, 그 당시 자체 기술력이 전무하다시피했던 한국 자동차 산업은 일본과 미국의 자동차 회사들과의 합작, 기술제휴 등을 통해 그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그리고 1965년 일본 토요타와 기술제휴로 신진자동차가 코로나를 내놓자 현대자동차는 3년 뒤 포드와 합작으로 그 이름도 비슷한 코티나로 맞불을 놓으며 본격적으로 경쟁에 뛰어들게 된다.

 

현대자동차는 포드와 결별 후 정세영의 주도 하에 국산차 프로젝트를 4년 이상 준비했다.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고유 모델 (국산화율 90%) 포니가 탄생한 것이다. 한 때 미국은 현대차의 이런 국산화 전략을 무마시키기 위해 회유까지 했지만 현대는 밀어붙였고, 정부의 각별한 지지 속에 현대자동차는 성장해나갔고, 현재의 세계 5위권 내의 거대 양산 메이커로 자리하게 됐다.

 

 

▶폴크스바겐의 탄생

폴크스바겐이란 회사의 탄생 역시 현대차와 조금은 닮은 구석이 있다. 바로 권력자의 의지에 의해 생긴 자동차 기업이라는 점이다. 히틀러는 1차 세계 대전 이후 극심한 경제난 속에서 새로운 희망으로 포장돼 권력을 쟁취했다.

 

히틀러는 자신이 새운 독일 제 3제국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국민적 지지를 유지하기 위해선 경제난을 해소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당시 독일은 베르샤유 조약에서 책정된 막대한 배상금에 발목이 잡혀 견딜 수 없는 어려움에 빠져 있는 상황이었다. 실업자만 600만 명이 넘는 상황에서 그는 국민들에게 희망, 혹은 환상을 심어줘야 했다. 그 환상 중 하나가 ‘국민차 프로젝트’였던 것이다. (히틀러 시대 이전부터 국민차 개념은 있었다. )

 

당시 독일엔 많은 자동차 회사들이 있었지만 여전히 비싼 가격으로 일부만이 누리는 사치품일 뿐이었다. (1932년 독일에선 자전거가 2200만 대, 자동차는 승용차 40만대 포함 220만대 수준이었다.) 대신 국민들의 발 노릇을 자전거가 담당하고 있었다. 자동차를 대중화시키면 나치에 대한 국민적 지지는 절대적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고 판단한 히틀러는 미국에서 그 가능성을 찾게 됐다.

 

1920년대 헨리 포드는 대량생산 시스템을 통해 T모델이란 자동차를 만들었고, 이는 자동차의 확산, 대중화의 신기원을 이룩한 모델이 되었다. 유색인엔 관대한 편이었지만 유대인에는 저항감을 갖고 있던 헨리 포드가 이래저래 히틀러의 눈에는 천사처럼 보였을 것이다. 결국 포드식 양산만이 독일 자동차 경쟁력을 키우는 길이라 확신한 히틀러는 국민차 프로젝트를 꺼내게 된다.

 

1934년, 4인 가족이 저렴한 금액으로 안전하게 탈 수 있는 국민차 개발 프로젝트가 공표됐고, 여러 기업들 중 히틀러는 페르디난프 포르쉐가 설립한 설계 사무소와 손을 잡기로 한다. 하지만 ‘타입1’이라는 컨셉카만 만들어졌을 뿐 이 국민차 프로젝트는 세계 2차 대전의 발발과 함께 묻히게 된다.

 

전쟁 후 볼프스부르크에 위치해 있던 VW 공장은 재가동하게 되었다. 사실 패전국이라는 멍에 속에, 또 히틀러가 만든 자동차 회사라는 원죄 아닌 원죄로 인해 공장은 언제라도 해체될 위기에 처해 있었다. 하지만 당시 그 지역을 점령하고 있던 영국 감독 이사회는 공장을 살리기로 결정을 내렸고, 타입 1 컨셉카는 비틀(미국 수출명)이란 이름으로 소수가 만들어지는데 이것이 결국 비틀 신화의 발화점이 되었다.

 

하지만 얼마 못가 영국은 이 공장 신탁권을 독일 정부에 이양함으로써 손을 떼게 되었고, 폴크스바겐은 포르쉐 박사가 미국 포드에서 데려온 독일계 기술자들에 의해 국민차 브랜드로 독일 재건의 한 축을 담당해나갔다.  여담이지만, VW 설립자는 나치가 만든 어용노조 독일노동전선(DAF)이고, 이들은 자신들이 세운 ‘독일국민차 준비 위원회 유한회사’의 회장에 페르디난트 포르쉐 박사를 임명했다.

 

비록 시간 차이를 두고 전혀 다른 대륙에서 벌어진 일이지만 나라를 대표하는 두 자동차 회사의 설립 배경엔 당시 권력자(혹은 독재자)의 의지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공통점이 보입니다. 둘 다 자국의 자동차 산업 강화라는 동일한 목표가 있었던 것이죠. 물론 히틀러의 경우 단순히 산업에만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었음이 곧이어 터진 전쟁을 통해 그 속내가 드러나게 됩니다.

 

반면 박정희의 경우 그의 최대 정적이라는 장준하 선생의 지지를 끌어 내는 등, 적어도 5.16은 정변 직후 이승만 시대의 무능과 정치적 퇴폐 상황을 해소를 위한 긍정적 사건으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문제는 그 마음이 그리 변질되고, 잘못된 방법으로 구현되려 했다는 점이겠죠.  어쨌든 현대자동차는 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속에서 피어난 자동차 회사였습니다.

 

이처럼 현대자동차와 폴크스바겐의 탄생은 당시 권력자와 관련이 있었다는 점. 그리고 자국 자동차 산업의 발전에 두 회사 모두 나름의 역할을 했다는 점. 그리고 현재 자국을 대표하는 자동차 브랜드로 성장했다는 점 등이 닮아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럼 다른 점은 뭘까요? 그건 8월에 나올 잡지에서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