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이 이럴 줄은 몰랐습니다. 한 5년쯤 됐나요, 해치백과 왜건의 나라라는 글을 쓴 것이? 그리고 지금, 두 차종은 여전히 독일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 듯하지만 좀 더 들여다보면 예전의 굳건한, 마치 성벽 같던 분위기는 SUV의 돌진에 균열을 맞은 듯 보입니다. 많은 세단 고객이 SUV로 돌아서고 있기 때문이죠.
지난 한 해 SUV 신차 판매는 독일에서 약 72만 대 수준이었습니다. 전년 대비해 20%대의 성장률이었죠. 전체 신차 판매량의 22% 수준을 SUV 한 차종이 담당한 것입니다. 5년 전엔 10% 이하였습니다. 독일뿐 아니라 유럽 전체적으로 약 아흔 개가량의 SUV 모델이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경쟁 속에서 또 다른 경쟁이 일어나고 있는데 바로 소형 SUV입니다.
모카X / 사진=오펠
SUV 왜 좋아하나?
몇 차례 언급했던 부분이지만 SUV 인기의 핵심은 높은 차고에 따른 시야의 개방감이라 할 수 있습니다. 탁트인 맛, 이거죠. 또 실용적 공간 활용도 장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탑승자에게 큰 덩치의 SUV는 심리적 안정감을 주기도 합니다. 물론 단점도 있습니다.
세단에 비해 기름을 더 먹고, 고속 주행에서의 안정감 역시 상대적으로 떨어집니다. 좌석의 안락함도 세단에 비하면 평균적으로 뒤처진다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단점이 있지만 워낙 SUV가 주는 매력이 강해서인지 매년 큰 폭의 성장세입니다. 유럽이 이런 상황이니 다른 지역은 더 말할 것도 없겠죠.
소형 SUV, 규제에 대한 대응책?
하지만 SUV에겐 또 다른 부담이 있는데 바로 배출가스 부분입니다. 예전엔 큰 비중이 아니었지만 디젤 게이트 이후로는, 그리고 새로운 배출가스 측정법이 도입되는 올해부터는 이 점이 SUV에 큰 영향을 끼칩니다. 소비자들은 여전히 SUV를 좋아하지만 제조사는 배출가스 규제에 맞서 브랜드 평균 이산화탄소나 질소산화물 배출 기준을 낮춰야 합니다.
SUV의 붐을 이어가면서 동시에 배출가스 평균 배출량을 줄일 수 있는 것은 현재 SUV보다 덩치가 작은 소형 SUV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렇다 보니 최근 3년 사이에 새로운 B세그먼트 기준의 소형 SUV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유럽에서는 벌써 20여 개의 소형 급이 판매 경쟁을 하고 있죠. 독일만 하더라도 SUV 전체 판매 순위에서 상위권을 차지한 소형 모델이 꽤 됩니다.
2016년 독일 소형 SUV 판매 TOP 5
1위 : 오펠 모카X (SUV 전체 3위, 32, 052대)
2위 : 르노 캡처 (SUV 전체 10위, 21,194대)
3위 : 스코다 예티 (SUV 전체 11위, 20,495대)
4위 : 푸조 2008 (SUV 전체 18위, 14,455대)
5위 : 마쯔다 CX-3 (SUV 전체 19위, 14,305대)
CX-3 / 사진=마쯔다
이익과 점유율이라는 두 마리 토끼 잡기
하지만 배출가스에 대한 대응이 정말 중요한 과제라면 SUV를 안 만드는 게 맞습니다. 소형 SUV는 윗급 시장 소비층을 끌어오기보다는 소형 해치백 등을 타던 유럽 소비자를 유인하고 있다고 보는 게 좀 더 현실적입니다. SUV 볼륨이 커지는 게 배출가스 규제에 대응하기 위한 제조사의 적절한 대응책은 아니라는 것이죠.
그렇다면 어떤 점이 이런 작은 SUV를 자꾸 생산하게 하는 걸까요? 역시 제조사들이 얻게 되는 이익이 크다는 점일 겁니다. 소형 해치백을 파는 것보다 소형 SUV를 팔았을 때 순이익이 더 좋을 것입니다. 물론 덩치 큰 SUV가 얻는 마진율에 비하면 이익이 떨어지겠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아 보입니다.
또 소형 SUV는 기술적으로 큰 도전 없이 시장에서 점유율을 끌어 올릴 수 있는 괜찮은 자동차이기도 합니다. 남들 다 만드는 소형 SUV에 발을 담그고 있는데 우리만 안 할 수는 없는 것이니까요. 소비자들이 가격 부담 덜 받으며 SUV를 타고 싶어 한다면, 소형 SUV는 안성맞춤입니다.
쌍용을 살리고 동시에 한국에 소형 SUV 바람을 일으키는 데 역할을 한 티볼리 / 사진=쌍용자동차
소형 SUV, 나오고 또 나오고
SUV 시장은 계속 커가고 있습니다. 계속 새로운 모델들이 나오고 또 준비 중입니다. 제조사는 더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어 좋고, 소비자는 선택의 다양성이란 측면에서 좋습니다. 특히 콤팩트 SUV 못지 않게 시장 확대력이 좋아 보이는 소형 SUV는 지금까지 보다 더 빠르게, 더 많은 신차들이 나올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프리미엄급 브랜드로는 처음으로 아우디가 Q2를 내놓았죠. 작년 가을부터 유럽 일대에서 대대적 홍보를 하고 있는데 판매량도 3, 4개월 판 것 치고는 나쁘지 않습니다. BMW도 정확하게 이름이 정해지진 않았지만 현재 Q2와 경쟁할 소형급 CUV를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내년 정도면 만날 수 있을 거라고 하는군요.
벤츠도 베이비 G바겐이라 불린 GLB라는 모델을 곧 내놓게 됩니다. B세그먼트까진 아니지만 작은 SUV 시장에 역시 어떻게 해서든 뛰어들 태세를 다임러 역시 갖췄다 봐야겠습니다. 볼보도 XC40이라는 콤팩트 SUV를 곧 선보일 것입니다.
Q2 / 사진=아우디
쏟아지는 소형 SUV들, 단숨에 읊어 봅니다
쉐보레 트랙스의 형제 차 (더 비싸고 더 고급스러운) 모카로 재미를 보자 오펠은 크로스랜드와 아담 X라는 A, B세그먼트급 SUV를 연달아 내놓겠다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르노 산하 다치아라는 저가 브랜드 역시 A세그먼트 급 SUV를 1만 유로 이하의 가격으로 판매할 것이라는 보도도 있었습니다. 폴크스바겐이 2년 후 경차 급 SUV를 내놓을 예정이니 시트로엥 등과 함께 최소 사이즈까지 영역을 넓히게 됩니다.
폴크스바겐은 늦어지고 있지만 폴로를 기초로 한 소형 SUV를 내놓게 되며, 자매회사인 세아트도 폴크스바겐의 도움으로 같은 급 아로나라는 이름의 소형 SUV를 생산할 계획입니다. VW이 티구안보다 작은 골프 SUV를 내놓겠다 하자 포드 역시 포커스를 베이스로 한 경쟁 SUV를 내놓게 됩니다. 대충 크기가 기아 니로 정도 될 것으로 보입니다.
참고로 소형 SUV의 가장 큰 시장인 유럽에서 B세그먼트 SUV는 전장 기준으로 4.3미터 이하입니다. 니로와 토요타 C-HR 등, 하이브리드 SUV가 4.3미터 이상, 콤팩트 SUV 기준인 4.4미터 미만입니다. 배기가스나 연비 문제로 디젤이 부담될 경우 니로와 C-HR과 같은 하이브리드형 소형 SUV를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다른 영역이 탄생하게 되는 것이죠.
C-HR / 사진=토요타
현대와 기아도 모두 올해 소형 SUV를 공개할 것으로 보이는데요. 역시 니로보다는 작은 사이즈가 될 듯합니다. 현대 기아가 한국에서도 만약 판매한다면 티볼리와 트랙스, 그리고 QM3 등과 본격 경쟁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언급한 소형 SUV 외에도 더 많은 것들이 준비되고 있습니다. 계속 이야기해보죠.
단종하겠다던 랜드로버 디펜더는 SUV의 광풍 앞에 완전히 계획을 틀어 다시 요즘 흐름에 맞는 SUV로 내놓을 것이며, 아우디는 Q2보다 더 작은 Q1도 나올 수 있다는 얘기가 나왔습니다. 스포츠카 브랜드로는 처음으로 도심형 SUV 시장에 발을 담근 포르쉐는 또 하나의 SUV를 준비해 놓고 있습니다. 사하라라는 이름의 4기통 엔진이 들어간 쿠페이며 2020년, 혹은 2021년에 소개될 거라는 독일 매체의 기사를 봤습니다. 소형급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 외에도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줄줄이 대기 중입니다. 재규어 역시 F-Pace 위아래로 SUV를 내놓고, 그 외에 아우디 Q6, 메르세데스 EQC 등과 함께 전기 SUV 시장에도 들어가 테슬라 모델 X와 경쟁할 겁니다. SUV가 뭔지도 모를 것 같았던 알파 로메오 역시 생존을 위해 SUV를 개발했습니다.
SUV 전체적으로 보면 나올 새로운 모델들이 산처럼 쌓여 있습니다. 올해 100여 종을 넘어서지 않겠나 싶고, 2~3년 안에 120~130종까지도 가능해 보입니다. 콤팩트 급에서 SUV 쿠페가 쏟아질 것이고, 이보크 컨버터블에 이어 폴크스바겐이나 아우디도 소형급 SUV 컨버터블을 소개할 가능성이 높아졌습니다. 정말 숨가쁘게 설명해 봤는데요. 이제 SUV는 가장 많은 모델을 보유한 세그먼트가 되었고, 조만간 가장 많은 판매량을 기록하는 세그먼트가 될 것입니다.
2014년 공개된 컨셉트카 T-ROC. 전장 4.12미터의 소형급 모델 / 사진=폴크스바겐
SUV 세상에서...
좀 차갑게 이야기하자면 자동차는 욕망의 대상입니다. 그리고 현재 그 욕망을 해소하는 데 가장 다가서 있는 자동차는 SUV입니다. 롤스로이스도 발을 담갔고, 애스턴마틴도 SUV를 내놓겠다 합니다. 조용했던 로터스까지도 소형 SUV를 내놓을 거라죠. 하나 빠짐없이 모든 브랜드가 모든 체급에서 SUV를 내놓게 됨으로써 명실상부 SUV가 지배하는 자동차 시장이 될 것입니다.
이게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솔직히 지금은 뭐라 말을 못하겠습니다. SUV가 갖고 있는 이기적 유전자를 언급하기엔 이제 너무 영역과 존재감이 커져 버렸고, 그래서 SUV에 대한 냉철한 시각을 갖자는 목소리도 의미가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저 또한 아내를 위해서라도 다음 차는 SUV로 가야 하는 게 아닌가 고민 중이니까요.
어쨌든 지금 그 어느 차급보다 SUV의 성장세가 가파르다는 것, 그리고 제조사와 소비자 모두 SUV에 대해 관심이 높기 때문에 성장세가 특별한 요인이 없다면 쉽게 꺾이지 않으리라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 소형 SUV는 성장세에 강력한 촉매제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덧붙이고 싶은 말이 하나 있습니다.
좋아하는 차를 선택하는 권리와 즐거움만큼이나 자동차의 환경적인 면, 그리고 SUV 운전자로서 갖춰야 할 교통 문화 측면도 함께 고민했으면 좋겠다는 겁니다. 다소 엉뚱한 마무리인가요? 그래도 하고 싶었던 말입니다. 광풍처럼 휘몰아치는 SUV의 열풍 속에서 우린 어떤 소비를 해야 하는지, 잠시 한 번 같이 생각해 봤으면 합니다. 오늘 내용 여기까지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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