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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자동차 세상/독일의 자동차 문화 엿보기

독일의 자동차 번호판 'H', 그 낭만에 대하여

'번호판도 문화다.' 그렇습니다. 자동차 번호판에는 차량과 소유자의 등록 정보를 확인할 수 있는 고유 기능 외에도 차가 소비되는 지역의 문화도 스며들어 있습니다. 미국과 캐나다 번호판은 운전자 개성에 맞게 화려한 색상으로 꾸밀 수 있고, 반대로 유럽연합의 번호판은 하나의 유럽을 지향한다는 의미에서 차별성보다 통일된 디자인 형식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물론 유럽연합 번호판도 기본 틀 안에서 국가별 차별성을 꾀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핵심은 통일성이라 할 수 있겠죠. 그런데 유럽, 그중에서도 독일 자동차번호판에는 색다른 것이 하나 존재합니다. 'H' 번호판이 그것인데요. 오른쪽 끝에 알파벳 'H'가 들어가는 순간, 그 자동차는 문화와 역사의 옷을 한 겹 더 입게 됩니다.

밀레 밀리아 클래식카 대회에 참가 중인 328 번호판에 H가 있다 / 사진=BMW


H 번호판 장점과 자격 조건

독일은 클래식카를 그들만의 방식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흔히 올드타이머(oldtimer)라 합니다. 첫 출시 후 (혹은 등록된 후) 30년째가 되면 그때부터 올드타이머로 분류되죠. 또 올드타이머까지는 아니어도 20년 정도 된 자동차는 영타이머(youngtimer)라는 젊은(?) 명칭이 부여되기도 합니다.

올드타이머의 경우 'H 번호판'을 달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집니다. 이 번호판에는 여러 장점이 있는데요. 배기량과 연식 등에 상관없이 자동차세를 1년에 191.74유로(약 2십 4만 원)만 내면 됩니다. 바이크의 경우 46.02유로죠. 또 보험사들이 이 번호판을 좋아합니다.

차를 잘 관리했을 거라는 게 전제되어 있고, 또 주행거리가 대체로 짧기 때문에 저렴하게 보험료를 낼 수 있게 했습니다. 보험사에 따라 1년 주행거리를 1만km로 제한하는 경우도 있죠. 또 촉매장치가 없어도 되고, 친환경 지대 역시 유로 6가 아니어도 자유롭게 다닐 수 있습니다. 이 정도면 독일에서 큰 혜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자동차가 오래됐다고 해서 무조건 이 번호판을 부착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H 번호판'을 달 수 있는 자격은 앞서 얘기한 것처럼 출시된 지 30년 이상이 되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차량의 상태가 담당 기관이 정한 기준을 충족해야 하죠. 사고가 잦았거나 너무 상태가 좋지 않으면 H 번호판을 달 수 없습니다. 또 튜닝이 많이 된 경우도 제외됩니다. 될 수 있는 한 원형 그대로, 관리가 잘 되어 있을 때 H 번호판이 주어집니다.

H 번호판을 달고 있는 비틀 / 사진=폴크스바겐


H 번호판 비용

1997년부터 적용된 H 번호판 장착에는 우선 등록비용 28유로가 들며, 원하는 알파벳이나 숫자를 적용하고 싶다면 11유로(약 1만 3천 원)를 추가로 내면 됩니다. 또 유럽연합의 규격 번호판이 아닌, 자동차의 형태에 어울리는 H번호판을 달 수도 있는데 그때는 100유로를 추가로 내야 합니다. 또 H 번호판을 달기 위한 올드타이머용 전용 차량 검사비가 100유로 정도 소요됩니다. 

이처럼 처음에만 비용이 좀 들지 그 이후에는 자동차세와 보험료 등이 저렴하게 적용되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도 큰 부담을 주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H 번호판이라는 별난 제도를 만든 것일까요?

1927년형 SSK가 오스트리아 클래식카 경주대회에서 질주하는 모습 / 사진=다임러


클래식카의 문화적, 경제적 가치를 인정하는

H는 독일어 historisch의 머리글자에서 나온 것으로, '역사적', 혹은 '역사적 의의가 있는' 등으로 해석합니다. H 번호판을 장착함으로써 자동차는 역사, 문화적 가치가 있는 것으로 인정받게 되는 것이죠. 오래된 자동차를 잘 관리하는 것을 큰 즐거움이자 자랑으로 여기는 문화, 그리고 이런 차를 운전하는 것을 로망으로 여기는 문화가 H 번호판 제도를 만들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날씨 좋은 주말, 올드타이머를 꺼내 아이, 혹은 부부가 함께 드라이빙을 즐기는 것은 자동차 문화가 오래된 나라에서는 익숙한 풍경입니다. 제가 사는 독일 동네에서도 어렵지 않게 H 번호판을 단 자동차를 볼 수 있는데요. 아빠와 아들이, 엄마와 딸이, 노부부가 함께 올드타이머에 몸을 묻고 숲길을 달리는 모습은 낭만 그 자체입니다. 가끔씩 젊은이들이 오래된 카브리오를 타고 지나가는 모습을 보게 되는데, 얼굴에 여유가 묻어납니다.

사진=다임러

클래식카를 탄다는 것은 치열한 현실에서 벗어난다는 걸 의미하고, 부모님 세대가 누린 문화를 이어간다는 문화적 연속성을 경험하는 것이 됩니다. 또 옛날 자동차를 즐기는 이들이 많다는 것은 클래식카 시장 또한 작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경제적 측면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가치가 만들어지는 것인데요. 수백억씩 하는 빈티지카들이 경매를 통해 거래되고, 도시마다 마련돼 있는 올드카 매장에서는 끊임없이 거래가 이뤄집니다.

고급 휴양지에서 클래식카를 뽐내기도 하고, 자연 좋은 곳에서 도로 경주를 즐깁니다. 그리고 꼭 비싼 차일 필요 없습니다. H 번호판을 단 자동차라면 무엇이든 경주대회에 참가해 실력을 겨루고, 또 누구와도 자신의 자동차에 얽힌 히스토리를 이야기합니다. 매우 자연스러운 모습입니다.

69년형 라일리 엘프 / 사진=BMW

어떤 이들에게 H 번호판이 달린 클래식카는 투자의 대상일 것이고, 어떤 이에겐 어린 시절 꿈을 이루기 위한 대상일 것입니다. 무엇이든 좋습니다. 옛날 자동차들이 첨단의 시대에 이처럼 소비되고 있다는 것은 자동차 문화가 미래만 바라보는 게 아닌, 지난 시절을 온전히 품고 달리는 것도 포함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매년 연말과 연초가 되면 독일 자동차 잡지들, 또는 일간지들은 새롭게 올드타이머가 되는 자동차 리스트를 공개합니다. 페라리 F40, 오펠 Senator 3.0 CD, 혼다 Prelude, 캐딜락 Allante, BMW 3시리즈 투어링 (E30) 등이 2017년 1월 1일부로 올드타이머가 됐으며, 이 차들은 독일에서 H 번호판을 달 수 있게 됐습니다.

1970년형 아우디 100 쿠페 S

멀리서 찾지 말자

대한민국에서 이런 클래식카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마이너 문화를 이야기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거기다 올드카에 대한 관심이라면 미국이나 유럽 자동차에 국한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또 어느 정도 경제력이 뒷받침 되어야 하므로 먹고 살기 척박한 상황에서 이런 이야기를 꺼낸다는 게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오늘 이야기는 비싸고 고급스러운 영역의 것이 아닙니다. 내 아버지가 타던 자동차, 어릴 적 꿈꾸던 자동차를 잘 관리하고, 그 세월을 끄집어내 함께 즐길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값지고 의미 있다고 생각합니다. 독일처럼 정부가 번호판이라는 제도로 문화를 뒷받침하는 세세한 노력은 기대도 하지 않습니다. 일단은 우리부터, 우리의 자동차를 문화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당신의 자동차를 쓰다 되팔아 버리는 물건쯤으로 여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소중한 추억, 그리고 시대를 담고 있는 자동차이기에, 그것을 즐기는 그런 마음으로 자동차를 바라본다면, 지금보다는 훨씬 풍요롭고 낭만적인 올드카 문화가 대한민국에서도 뿌리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