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들어서며 본격적으로 존재를 알리기 시작한 SUV는 이제 자동차 시장에서 가장 인기 있는 쟝르가 됐습니다. 100여 종에 이르는 다양한 모델들이 전 세계 시장을 누비고 있죠. 그리고 이런 인기는 갈수록 힘을 얻고 있습니다. 연비가 떨어진다든가 주행 안전성이 상대적으로 세단에 비해 떨어지는 점, 가격이 비싸다는 단점 등이 있지만 탁 트인 시야, 탑승자에게 주는 심리적 안정감, 그리고 공간 활용성 등은 단점을 지우고도 남는 장점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또 빠르게 단점을 개선해 나가고 있다는 점도, 그리고 중고차 시장에서 잔존가치가 높다는 점 등도 SUV의 앞날이 쾌청할 것임을 보여줍니다. 이렇다 보니 저가 브랜드에서부터 고급 브랜드까지, 너나 할 것 없이 SUV 시장에 발을 담그고 있는데요. 특히 스포츠카 브랜드, 혹은 럭셔리 브랜드들의 최근 움직임이 눈에 띕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과연 이렇게까지 덤벼들어야 하나?' 싶은 생각입니다. 아마 포르쉐가 카이엔으로 큰 이익을 얻었던 것이 럭셔리 브랜드와 스포츠카 브랜드에게 굉장한 자극이 된 것으로 보입니다.
카이엔 / 사진=포르쉐
비데킹 회장의 결단으로 박스터와 카이맨, 그리고 SUV 카이엔이 포르쉐 로고를 달고 출시돼 적자에 허덕이던 당시 회사를 흑자로 돌려세웠고, 최근엔 카이엔 아래급인 마칸이 끝없이 팔려나가며 기록적인 수익을 거두고 있죠. 스포츠카 브랜드가 SUV를 만든다고 했을 때 얼마나 많은 비판이 있었습니까? 하지만 포르쉐는 이제 세계에서 가장 이익을 많이 내는 스포츠카 브랜드로 자리했습니다.
경쟁 브랜드는 물론 고가 전략을 펴는 럭셔리 브랜드들에겐 포르쉐의 SUV 성공은 이제 남의 것이 아닌 자신들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더 이상 이 성장하는 시장을 외면할 수 없게 된 것이죠. SUV의 넉넉한 마진은 지금까지 보다 더 많은 돈을 벌어다 줄 것입니다. 그리고 드디어, 화려함으로 장식한 고급 SUV들이 하나둘씩 그 정체를 드러내기에 이르렀습니다.
F-Pace / 사진=재규어
어찌 보면 늦었다고 얘기할 수 있는 재규어의 첫 번째 SUV F-Pace가 본격적인 판매에 들어섰습니다. BMW와 벤츠 등 독일 프리미엄 3사가 달달하게 SUV 시장에서 성공의 열매를 먹고 있는 것을 더 이상은 지켜볼 수 없었을 겁니다. 더군다나 걸출한 레인지 로버라는 SUV 명가와 한핏줄이니 노하우 전수도 충분히 있었을 거라 봅니다.
벤테이가 / 사진=벤틀리
영국 출신의 화려함을 자랑하는 벤틀리 또한 벤테이가라는 이름의 SUV를 브랜드 최초로 내놓으며 판매에 들어간 상태인데요. 12기통 엔진에 600마력의 힘을 자랑하는 벤테이가는 최고속도 301km/h까지 달릴 수 있다고 합니다. 벤틀리가 먼저 내놓기는 했지만 이태리 럭셔리 브랜드 마세라티 역시 르반떼를 최근 선보이며 흐름에 동참하게 됐습니다.
르반떼 / 사진=netcarshow.com
르반떼 역시 올해 여름부터 판매가 예정돼 있는, 마세라티의 첫 번째 SUV 모델입니다. 마세라티 같은 비교적 적은 규모의 고급 브랜드가 SUV를 어떻게 만들 수 있었을까요? 역시 피아트 크라이슬러 그룹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지프 체로키 등의 플랫폼을 통해 마세라티만의(?) 스타일로 재탄생이 됐는데요. 과연 얼마나 날카로운 주행감을 선보일지 기대, 그리고 조금의 우려를 함께 하게 되네요.
사진=롤스로이스
상황이 이쯤 되니 클래식과 럭셔리의 끝판왕이라고 할 수 있는 롤스로이스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겠죠. 대략 2년 후쯤으로 출시가 예상되는 롤스로이스 SUV 컬리넌의 각종 예상도가 온라인에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브랜드에 대한 자존심으로는 둘째 가라고 하면 서러워할 롤스 로이스조차 높은 이익을 보장하는 SUV를 외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롤스로이스 또한 SUV를 만들 수 있는 토대는 충분히 갖고 있는데요. 바로 모회사인 BMW가 뒤를 받쳐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벤틀리의 벤테이가 역시 아우디와 포르쉐라는 그룹 내 브랜드의 도움을 받았던 것처럼 롤스로이스 역시 BMW의 전폭적 지원 아래 2년 후를 열심히 준비하고 있습니다. 과연 롤스로이스 현재 모델들과 어떤 차별화를 꾀할 수 있을지 좀 의문이긴 하지만, 어쨌든 관심 있는 부호들의 지갑은 열릴 준비가 된 모양입니다.
이렇게 고급 브랜드들이 마구마구 이전에 만들어 본 적 없던 SUV 만들기에 뛰어드는 가운데, 오래전부터 SUV를 내놓을 것이라는 소문이 돌던 스포츠카 회사를 빼놓을 수는 없을 거 같습니다. 바로 이태리의 대표적 브랜드 람보르기니입니다.
우르스 컨셉카 / 사진=netcarshow.com
이태리 스포츠카의 양대산맥 중 하나인 람보르기니는 그 독특한 디자인으로 특히 유명하죠. 페라리와 맞설 목표로 등장해 계속해서 판매량을 늘려가며 단단한 팬층을 이미 확보한 브랜드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천하의 람보르기니도 SUV를 조만간 내놓게 됩니다. 역시 같은 그룹 내 아우디의 SUV 노하우가 가득 들어가 가능한 도전인데요. 벌써부터 벤테이가를 능가하는 가장 빠른 SUV가 될 것이라고 얘기되고 있습니다.
맥라렌이나 로터스, 쾨니세그 등, 비교적 적은 규모의 스포츠카 제작 업체들을 제외한다면 사람들에게 알려진 럭셔리 브랜드, 그리고 고급 스포츠카 브랜드 중에 이제 SUV 시장에 들어올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브랜드는 하나 남았습니다. 바로 페라리입니다.
사진=페라리
페라리는 F1 레이스를 통해 전 세계에 수많은 팬들이 함께 하는 명실공히 가장 인기 있고 유명한 스포츠카 브랜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페라리의 붉은색만큼이나 이 브랜드가 보여주는 자기 색깔과 정체성은 분명하죠. 엔초 페라리가 죽고 그의 뒤를 이은 루카 몬테제몰로 전 회장은 휘청이던 페라리를 지금의 위치로 올려놓은 장본인이자, 페라리가 어떤 마케팅과 전략, 그리고 어떻게 자신들의 존재감을 유지해야 할지를 명확하게 보여준 경영자였습니다.
23년 동안 페라리를 이끌던 전 회장 몬테제몰로 / 사진=페라리
몬테제몰로 회장이 물러나고 피아트 크라이슬러 그룹을 이끄는 세르지오 마르치오네 회장이 페라리를 이끌면서, 뭔가 페라리에도 변화가 오는 게 아니냐는 얘기들이 있었습니다. 그 변화의 중심엔 새로운 SUV 출시가 담겨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특히 페라리가 뉴욕 증시에 상장되며 주주들의 요구에 결국 SUV를 내놓게 될 거라는 관측이 있지만 오래전부터, 그리고 지금까지 페라리는 결코 SUV는 나오지 않을 거라고 하고 있습니다.
특히 세르지오 마르치오네 회장은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결코 페라리가 SUV를 만드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1년에 7천 대 수준의 판매량을 유지하면서 브랜드의 가치를 지켜가겠다는 몬테제몰로 전 회장의 경영 방침이 현재까지는 유지되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고급 차들의 SUV 시장 참여는 독일 업체들이 이끌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닌데요. 벤틀리와 람보르기니는 모두 아우디가 이끌고 있고, 롤스로이스는 BMW, 마세라티는 피아트 그룹의 방침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언급은 안됐지만 007 제임스 본드가 사랑한 차 애스턴 마틴도 DBX 같은 크로스오버 차량을 내놓으며 SUV 를 내놓겠다고 했습니다. (독일 업체들 특유의 돈 냄새 맡는 능력이 얄밉기까지 합니다)
독일 자동차 그룹이 주도하는 호화 SUV 전략이 람보르기니라는 스포츠 카에게까지 스며든 것을 못 마땅하게 여기는 전문가들도 있지만 그에 못지않게 기대하는 팬들도 있다는 걸 생각하면 이걸 무조건 잘잘못의 잣대로 평가하긴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페라리가 보여주고 있는 자기 정체성 유지, 자기 고집과 묘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과연 페라리의 이런 고집, 그리고 브랜드 가치 유지 정책이 계속 이어질 수 있을까요? 누구도 이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만큼 SUV 시장이 뜨겁기 때문이고, 실패하기 어려운 달콤한 유혹이기 때문이죠. 그럼에도 지금까지 페라리는 이전과 같은 길을 가겠다고 선언한 상태입니다. 그리고 이 브랜드 하나쯤은 자신의 색깔을 선명하게 지켜나갔으면 좋겠다는 게 솔직한 제 심정입니다. 람보르기니엔 스포츠카 브랜드로서의 고집이 없고, 페라리에는 그 자존심이 살아 있다 보는데,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페라리 창업자 엔초 페라리 / 사진=페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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