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역사를 쭈욱 따라가다 보면 많은 인물들을 만나게 되는데요. 그 중에서도 이 두 사람, 아돌프 히틀러와 헨리 포드는 좀 특별하게 다가옵니다. ‘포드야 그렇다 쳐도 히틀러는 왜?’ 라고 고개를 갸웃할 수도 있겠지만, 독일 자동차 산업이 양산체제를 갖추고 대중화의 길을 가게 된 계기가 히틀러로 인해 마련됐다 볼 수 있기 때문에 그를 떼 놓고 자동차 역사를 이야기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정작 히틀러 자신은 죽는 날까지 운전을 하지 않았지만 자동차의 기술적인 면에도 관심이 높았고 또 자동차 경주도 무척 좋아했습니다. 마치 이태리 독재자 무솔리니가 그랬던 것처럼 레이싱을 정치적으로 활용을 했죠. 한마디로 히틀러는 나치 정권의 정당성과 게르만 우월주의를 자동차를 통해 모두 드러내고 싶어했습니다.
바다 건너 멀리 살고 있던 헨리 포드는 이런 히틀러에게 우상과 같은 존재였죠. 히틀러는 포드에게서 영감을 얻었고 또한 동질감을 느꼈습니다. 한 번도 직접 만난 적 없는 포드의 실물 초상화를 걸어 넣고 업무를 볼 정도로 그에게 매료됐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포드의 어떤 점이 히틀러를 그렇게 만들었을까요? 오늘은 히틀러가 포드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히틀러 & 헨리 포드, 사진 =위키피디아
대공황 속 악마, 권력을 쥐다
1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은 패전국 입장에서 연합국 측에 의해 평화협정이라는 베르샤유 조약을 체결하게 됩니다. 이 협정은 그러나 독일 입장에선 제재 조약이었고 굴욕적인 내용들로 가득했는데요. 영토와 국민 일부도 주변 독립국에 빼앗기고 군대, 외교, 경제 등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고통을 당했습니다.
특히 전쟁 배상금은 천문학적인 (1,320억 제국 마르크) 액수였고, 그로 인해 독일인들은 궁핍함은 물론 자존심에도 크나큰 상처를 입게 됩니다. 히틀러 역시 마찬가지였죠. 특히 역사적으로 늘 게르만을 괴롭혀 왔던 프랑스가 독일에 대한 압박을 강하게 했고, 이는 결과적으로 2차 대전 중 프랑스가 독일에 점령 당하는 하나의 자극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이런 상황에서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29년 10월 24일 일명 ‘검은 목요일’, 미국 주가는 대폭락을 하게 됩니다. 바로 대공황이 시작된 것이죠. 독일은 최악의 상황에 빠져듭니다. 1,200만 명의 근로자 중 절반인 600만 명이 실직을 했습니다. 혼란과 고통의 시절 속에서 아돌프 히틀러라는 괴물이 급부상하게 됩니다.
1933년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어쩔 수 없이 나치당 당수 히틀러를 바이마르 내각의 수상 자리에 앉힙니다. 하지만 그의 야망은 여기에 머물지 않고 결국은 공화국을 해체하고 민족 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일명 나치)이 주도하는 제 3제국을 건설하기에 이릅니다. 독재자는 이처럼 민초들의 굶주린 배를 움켜 쥐고 권력을 쟁취하게 된 것이죠.
1936년 3월.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딸 아이를 데리고 배급을 기다리고 있는 여성의 모습. 도로디어 랭의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자동차로 돌파하라!
히틀러는 당연히 당장의 실업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히틀러에게 자동차는 경제 문제를 돌파하고 나치 정권의 정당성을 세우는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소재가 되었죠. 내각수상의 자리에 오르자 마자 베를린 국제 자동차 박람회에서 자동차와 레이싱 스포츠를 통한 독일 재건의 계획을 발표하고 국민차(폴크스바겐) 프로젝트를 선언합니다.
히틀러가 이처럼 자동차, 레이싱, 그리고 도로 건설 등을 나치제국의 주요 아젠다로 설정한 이유는 간단합니다. 대규모 고용창출이 가능하고 자동차와 고속도로 건설 등을 통해 연관 산업의 활성화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었죠. 경기 부양을 통해 정권을 더욱 공고히 다지고자 했던 것입니다. 당시 3제국 교통부 자동차 담당부서에서는 국민차가 갖춰야 할 조건을 이렇게 정했습니다.
차량 구입비는 1000제국 마르크를 넘지 않아야 한다. 연비는 가솔린 기준 리터당 최대 20km 정도까지 달려야 한다. 최고속도는 시속 80km/h가 되어야 하며 어른 3명과 아이 1명이 앉을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한다. 만약 전쟁 시엔 군인 3명에 기관총 한 대를 장착할 수 있어야 한다.”
사실 히틀러는 국민차 프로젝트를 주도한 페르디난트 포르쉐 박사를 만나 좀 더 기술적으로 진보된 것을 요구했습니다. 공랭식의 3기통 디젤 엔진이 그것이었죠. 하지만 그의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참고로 디젤 엔진은 1936년 다임러에 의해 벤츠에 달려 나오게 됩니다만 국민차와는 거리가 있는 고급 모델이었습니다.
사실 당시 상황에서는 이런 까다로운 조건은 매우 달성하기 어려운 요구였습니다. 특히 가격적인 면이 그랬습니다. 하지만 히틀러는 미국에서 헨리 포드가 이뤄낸 자동차 기적을 익히 알고 있었고, 미국이 하면 독일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헨리 포드가 이룬 업적은 히틀러에겐 동경이자 목표가 되었던 것이죠.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사열을 받고 있는 히틀러. 1935년. 사진 출처 = 위키피디아
포드, 미국을 자동차의 왕국으로 만들다
교육을 제대로 배운 바 없는 헨리 포드는 1908년 가장 위대한 자동차로 평가될 수 있는 ‘포드 T 모델’을 내놓습니다. 자동차가 특정 부류의 사치품에서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대중의 것으로 변신하는 역사적 순간이었죠. 히틀러가 콧물 닦던 어린 시절부터 이미 독일은 포드의 대량생산 시스템에 큰 충격을 받고 각 분야에서 이를 접목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1913년 컨베이어 시스템을 완성시킨 후 T 모델의 가격은 더 떨어졌고 더 많은 사람들이 자동차를 소유할 수 있게 됐습니다. 당시 전 세계 시장의 자동차 생산대수를 다 합쳐도 미국에서 생산된 것의 절반 수준밖에 되지 않았으니까 미국에서 자동차가 얼마나 붐이었고 대중화 되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미국이 자동차 세상을 점령한 것이죠.
1910년에 제작된 포드 T 모델. 사진=위키피디아
설계 중심의 독일 메이커들에게도 포드 시스템은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그리고 T 모델과 같은 생산 중심의 차를 만들려는 노력들이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이런 분위기에 동조한 건 아니었는데요. 칼 벤츠 같은 이는 반대를 했습니다. 수작업이 갖는 품질의 보장을 통해 미국 대량생산 시스템에 맞서려 했던 것이죠.
어쨌든 국민차에 대한 도전은 계속됐지만 현실적으로 이를 구현할 시스템이 없었습니다. 그걸 히틀러는 잘 알고 있었고 어떻게 해서든 저가의 국민차 프로젝트를 포드의 방식으로 이뤄내고자 했습니다. 그것이 곧 독일 자동차 산업의 경쟁력을, 아니 독일의 경쟁력을 강화하는 길이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나치는 포르쉐 박사를 두 차례에 걸쳐 미국으로 보냅니다. 첫 번째는 포드 하이랜드 파크 공장과 GM 공장 등을 견학하는 목적이었는데 포르쉐 박사 역시 이야기로만 듣던 포드의 대량 생산 라인에 큰 감동을 받게 됩니다. 두 번째 미국 방문은 보다 구체적이었습니다. 포드의 어셈블리 라인을 독일에 적용할 수 있는 독일계 미국인 20명을 설득해 데려오는 일이었죠. 결국 이들이 합류하며 양산이 가능한 폴크스바겐 공장의 기초가 다져지게 됐습니다.
자동차 컨베이어 시스템이 만들어진 지 100년이 되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독일 자동차 잡지
독일 볼푸스부르크에 있는 폴크스바겐 공장의 모습. 굴뚝을 보며 전쟁의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사진=위키피디아
히틀러와 포드를 연결한 강한 끈 ‘반유대주의’
포드는 자신의 공장 노동자들에겐 아버지 같은 존재였습니다. 근로시간은 일 8시간으로 못박았고, 주 5일제 근무에 급료 역시 2.6달러 수준의 경쟁 업체들에 비해 두 배 가까이 되는 5달러로 책정했습니다. 공장 건물은 최대한 많은 유리창으로 되어 있어 좀 더 쾌적한 환경에서 일하게 했고, 사내 마켓에서는 시중에서 보다 더 저렴하게 물건들을 살 수 있었습니다.
이런 정책들 때문에 포드는 전통적인 보수파들에게 비판을 받기도 했는데요. 하지만 그의 이런 결정들에는 노동환경의 우울한 민낯을 가리고자 하는 의도도 담겨 있었습니다. 컨베이어 시스템에 의해 기계화된 노동환경에 지친 노동자들이 포드를 떠나는 일이 잦아지자 이를 막기 위한 수단으로써 다양한 복지 정책을 폈던 것이죠.
하지만 포드의 가치관을 보면 반드시 이직을 막기 위한 이유로만 볼 수는 없을 거 같습니다. 워낙 그는 자기 주관이 뚜렷한 인물이었거든요. 이윤 보다는 배분이 중요했고, 과거의 가치관에 얽매이는 걸 싫어했습니다. 또 자동차는 싸 게 만들어 싸게 팔려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린 이런 걸 포드주의라고 부릅니다. 또 흑인, 장애인, 여성 등을 가리지 않고 직원을 뽑는 등 인종에 대한 편견도 없었습니다.
다만 한 가지, 유대인에게만은 적대적이었는데요. 굴뚝산업을 가치 있게 여기는 포드의 눈에 세계 금융시장을 쥐고 흔드는 유대인들은 불편한 존재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또 노조를 인정하지 않았는데요. 노동조합 간부들이 너무 정치적이라는 점, 그리고 노조를 주도하는 세력들이 유대인들이 많다는 점을 이유로 내세웠습니다. 한 마디로 “이렇게 회사가 너희들에게 잘 해주는데 무슨 노조냐?” 는 것이었죠. 그의 노조 탄압은 악명 높았습니다.
포드는 자신이 만든 언론사에 60여 회에 걸쳐 반유대인 칼럼, 반공산주의 칼럼을 기고합니다. 이 글은 ‘국제 유대인’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묶여 많은 사람들에게 읽혔고 독일어로 번역되기도 했습니다. 이런 포드를 우상 시 했던 나치 정권은 1938년 그에게 훈장을 수여하죠. 그리고 포드 역시 이듬 해 히틀러에게 선물로 답례를 합니다. 과연 어느 정도까지 포드가 히틀러와 연결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두 사람이 정서적으로 공감대를 갖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로 남아 있습니다.
1944년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던 유대 여인들과 어린이들 모습. 사진=위키피디아
시스템을 동경했고 가치관을 공유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간단히 정리를 해볼까요? 히틀러는 포드의 대량생산 시스템이 만든 세상의 대변화를 부러워했고 그걸 독일 사회에도 적용하고자 했습니다. 당장의 먹고 사는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고 독일인들의 우월성을 선전할 수 있는 방법이 여기에 있다고 봤던 것이죠. 성공만 한다면 나치 정권을 더욱 단단하게다질 수 있다 믿었을 것입니다.
또한 그는 포드의 반유대주의에도 환호했습니다. 백인 아리안 우월주의, 게르만 우월주의에 포드가 동의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히틀러의 반유대주의에 대해선 포드 역시 공감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히틀러의 광기 가득한 증오보다 포드의 비판은 상대적으로 논리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 비판의 목소리들이 있지만 포드는 20세기 최고의 미국인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반대로 히틀러는 최악의 역사적 인물로 기록돼 있죠. 전혀 연결점이 없을 거 같은 이 두 사람 사이엔 하지만 ‘자동차’와 ‘반유대주의’라는 연결고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고리가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낳았는지 우리는 역사를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동시대에 살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요? 과연 히틀러의 광기는 동력을 잃었을까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히틀러와 포드의 관계였습니다.
헨리 포드
포드자동차회사 창립자. 1863년 미국 미시간 주 디트로이트 농촌마을에서 아일랜드 계 부모에게서 태어남. 16세 때 디트로이트의 작은 기계제작소에 견습공으로 들어가 기술을 배우기 시작. 잠시 농사를 짓던 그에게 에디슨 조명회사의 기사 초청이 옴. 근무하던 중 내연기관을 완성, 1896년 포드 사륜차 선보임.
에디슨과 지역 사업가들 후원 아래 1903년 자동차 회사 세운다. 1908년 T모델 발표. 18년 동안 약 1500만대의 T 모델이 팔림. 컨베이어 벨트를 통해 대량생산과 부품 표준화를 이뤄냄. 포드주의로 일컬어지는 경영, 생산의 혁신을 이뤄낸 인물. 하지만 반유대주의로 인해 나치와의 연관설이 끊임없이 제기 되고 있다.
1947년 미시간 디어본에서 83세의 나이로 세상을 뜸. 2000년 포츈이 '20세기를 대표하는 인물'로 선정했으며 타임지의 표지인물로도 선정됨. 채식주의자였으며 나선형 복지 구조의 틀을 마련한 인물로 유명함. 노조를 인정하지 않고 탄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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