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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자동차 세상/독일의 자동차 문화 엿보기

포르쉐 회장 비데킹, 그는 희생양이었을까?

 

지난 4월이었나요? 독일 언론을 통해 우리의 기억에서 사라졌던 이름 하나를 보게 됐습니다. 벤델린 비데킹. 전 포르쉐 CEO이자 한 때 포르쉐 지주회사 이사회 의장, 그리고 폴크스바겐 자동차 그룹을 집어삼키며 잠시나마 자동차 제국의 왕좌에 올랐던 인물이죠.

 

 

이 남자가 벤델린 비데킹인데요. 생김새만 갖고는 그냥 이웃의 편안한 아저씨쯤으로 보이겠지만 엄청난 야망과 능력, 그리고 차가운 심장으로 유명했던 인물입니다. 현재 그는 독일 검찰에 의해 기소가 되어 있는 상태죠. 이유는 폴크스바겐 지분 인수 과정에서 옵션 거래를 했다는 의혹, 그리고 의도적으로 폴크스바겐 주식을 떨어뜨려 주주들에게 피해를 끼친 등의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만약 재판에 가서 혐의가 인정되면 5년 정도 형을 받게 될 수 있는 상황입니다. 강제로 포르쉐 회장 자리에서 물러난 후 재단을 설립해 좋은 일을 하면서 동시에 레스토랑 체인 사업을 구상하던 그였는데 '지분 전쟁'의 후유증이 너무 커 그의 남은 삶이 과연 바라는 것처럼 편하게 이어질지는 의문입니다. 그 기사를 접하면서 잊고 있던 포르쉐와 폴크스바겐의 지분전쟁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지분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보려고 합니다. 다만 경제적인 관점이 아니라 페르디난트 피에히라는 인물과 벤델린 비데킹이란 인물의 드라마 같은 인연에 이야기의 초점을 맞춰 봤습니다. 남의 나라 그것도 자동차 회사들 사이에 벌어진 암투에 대해 별 관심이 없는 분들도 영화 한 편 본다 생각하시고 이야기를 좇아보시면 어떨까 합니다(내용은 객관적 사실에 약간의 상상력을 덧붙여 구성했습니다 ) 

 

 

페르디난트 피에히, 비데킹에게 손 내밀다

80년 대 중반을 넘어서며 포르쉐는 휘청였다. 미국시장에 너무 의존했던 경영방식 탓에 환율의 하락으로 포르쉐는 큰 손해를 보고 있었다. 거기다 주가폭락은 치명적인 상황으로까지 회사를 몰아갔다. 포르쉐AG(주식회사)의 대주주인 포르쉐 가문이 모두 모였다. 회사의 어려움을 타개할 유능한 경영자를 찾아야했기 때문이다. 

 

포르쉐회사의 전문경영방식은 이미 1970년대로 거슬로 올라간다. 페르디난트 포르쉐 박사가 죽고 그의 아들인 페리 포르쉐는 회사를 경영했으며, 누나이자 포르쉐 박사의 딸이었던 루이제 피에히는 독일어권의 영업을 총괄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남매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피에히 자서전에 보면 누나 루이제와 남동생 페리는 스무 살이 넘은 나이에도 파티가 열리는 집마당에서 주먹질을 하며 싸울 정도였다. 이 둘은 자녀 여럿을 두었고 모두 포르쉐 지분을 갖고 있는 상태였다. 페리 포르쉐를 이어 회사를 경영할 사람을 뽑으려던 문제가 집안갈등으로 무산되자 아예 페리 포르쉐와 루이제 피에히 남매는 누구도 경영을 할 수 없도록 정해버린다. (페르디난트 알렉산더 포르쉐라는 페리 포르쉐 아들이 강력한 회장 후보였지만 그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나중에 그가 디자인한 차는 포르쉐 아이콘이 됐다, 911이란 이름으로...)

 

이렇게 해서 70년대부터 전문 경영인을 외무에서 영입해왔던 포르쉐는 90년대 들어서며 경영이 악화라는 상황을 맞았고, 벤츠, 토요타, 혼다 등의 여러 업체들이 언제든지 포르쉐를 인수하겠다고 이를 드러내고 있는 상태였다. 포르쉐 가문의 외가와 친가 형제들은 긴축재정 정책을 잘 해줄 인물을 찾고 있었지만 페르디난트 피에히는 다른 생각이었다. 긴축재정만으로는 위기를 극복할 수 없고, 혁신적인 경영을 담당해줄 인물이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첫 번째 강력하게 추천한 인물이 BMW 경영진 중 한 사람인 볼프강 라이츨레였다. 하지만 BMW가 자신들의 핵심 인력을 경쟁사에 내줄 리 없었다. 이 때 피에히가 추천한 인물이 한 명 더 있었는데 그가 포르쉐 생산파트를 총괄하고 있던 벤델린 비데킹이었다. 포르쉐 가문의 우려에도 피에히는 그를 밀었고 결국 비데킹은 1992년 10월 마흔 살의 나이로 포르쉐의 대표자리에 오르게 된다.

 

사실 포르쉐에 더 걸맞는 집안의 능력자 페르디난트 피에히가 포르쉐를 맞았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아우디 회장 자리에 있었으며 모회사(아우디는 이 표현을 참 싫어하지만) 폴크스바겐의 회장 자리를 노리고 있었기 때문에 포르쉐는 자신이 선택한 비데킹을 전면에 내세워 막후 경영을 계획했다. 그리고 피에히 아우디 회장은 계획대로 비데킹 회장 선출 1년 후 폴크스바겐 그룹의 대표 자리에 오르게 된다.

 

페르디난트 포르쉐 박사의 외손자이자 폴크스바겐 이사회 의장인 페르디난트 피에히

 

 

비데킹의 마술 포르쉐를 살리다!

당시 포르쉐는 비효율적인 생산방식과, 개발과정에서 엎어진 모델들 때문에 신차 출시는 계속 늦춰지고 있었다. 비데킹은 이 죽어가는 회사를 살려야 했다. 그리고 그의 마술은 완벽하게 성공했다. 포르쉐 자회사에서부터 일본 토요타의 생산 효율방식을 연구하고 있던 비테킹은 이를 포르쉐에도 적용하기로 마음 먹었고, 급기야 토요타의 내부 비밀을 알고 있던 카이젠 컨설팅 사람들까지 끌어와 포르쉐 생산라인을 대대적으로 정비하게 된다. 물론 직원 감축 카드도 활용되었다. 자그마치 2천 명의 직원이 직장을 떠나야 했다.

 

비데킹의 생산 시스템의 효율화는 그가 포르쉐 대표 자리에 오르기 전부터 구상 중이던 카브리오(오픈카)를 911 부품 30% 이상 적용하는 방식으로 원가 부담을 줄여 세상에 내놓게 되는데, 그 차가 바로 박스터였다.

 

 

1996년 선을 보인 박스터는 매 년 3만 대 가까운 판매량을 기록하며 단숨에 포르쉐의 숨통을 틔워졌다. 비데킹은 여기서 다시 한 번 모험을 건다. SUV를 만들어 시장에 내놓겠다는 계획을 실천한 것이다. 처음에 벤츠의 G바겐을 뼈대로한 SUV를 만들려 했지만 포르쉐 경영에 참여하는 조건을 내세우자 포르쉐 가문이 절대 반대를 외쳤고, 피에히가 대표로 있던 폴크스바겐과 협력해 이 프로젝트를 결국 완성시키게 된다. 카이엔의 등장이 그것이다.

 

 

폴크스바겐 트랜스포터의 플렛폼과 아우디 올로드 콰트로의 에어 서스펜션, 그리고 슬로바키아에 있던 VW 공장에서 만들어진 차체에 포르쉐의 엔진을 실은 이 SUV는 많은 이들의 염려를 불식시킨 채 팔려나가기 시작했다. 박스터가 주춤한 시점인 2002년 첫 등장한 카이엔으로 이듬해부터 포르쉐는 다시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된다.

 

비데킹은 1993년부터 2003년까지 매출을 500% 늘렸고, 그 당시 1억 2,000만 유로 적자를 2003년엔 9억 유로 이상의 흑자를 낸 회사로 포르쉐를 완전히 살려냈다. 이제 비데킹의 앞날엔 거칠게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런 놀라운 마술같은 시간들이 결국 그에겐 죽음의 유혹이 되고 말았다.

 

 

피에히 의장? 제낍시다!

비데킹의 기적같은 성공신화는 그에게 많은 부와 명예와 권력을 안겨줬다. 홀어머니 밑에서 힘들게 성장했던 아픈 과거를 갖고 있던 비데킹은 명문 공대를 나와 누구 보다 빠르게 독일에서 가장 많은 이익을 남기는 자동차 회사의 대표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경영의 귀재는 더 큰 꿈을 꾸기 시작했다. 꿈의 최종 목표는 바로 폴크스바겐이었다. 그곳엔 자신을 포르쉐의 회장으로 자리하게 해준 페르디난트 피에히가 있는 곳이었다.

 

2000년대 들어서며 국민차 VW은 의결권 제한을 하고 있던 VW이 EU에 의해 문제제기 되며 사라지게 됐다. 주식을 아무리 많이 가져도 20% 이상의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던 폴크스바겐이 이제 주식을 많이 가진 자가 경영권을 쥘 수 있게 된 것이다. 비데킹은 자신의 오른팔인 재무이사와 함께 폴크스바겐 주식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2005년 차액 한 푼 없이 폴크스바겐 지분 20%를 사들이는데 성공한다.

 

비데킹의 폴크스바겐 지분인수는 이후 계속 된다. 그리고 드디어 50% 지분을 확보하며 폴크스바겐 자동차 그룹의 주인이 포르쉐 지주회사임을 세상에 선언하기에 이른다. 포르쉐 자동차 그룹의 지주회사인 포르쉐 오토모빌 홀딩 SE 이사회엔 피에히도 참여하고 있었다. 그의 지분은 20%가 조금 안되는 상황. 그런데 어떻게 피에히 몰래, 혹은 그의 저항을 피해 폴크스바겐 대주주의 자리에까지 오게 됐을까?

 

이쯤에서 등장하는 한 명의 인물이 바로 볼프강 포르쉐다. 페르디난트 피에히 의장의 사촌동생인 그는 포르쉐 지주회사 이사회 의장의 신분으로 사촌인 피에히 집안의 성장을 두고만 볼 수 없었다. 특히 피에히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그의 형 에른스트 피에히까지 끌어들여 페르디난트 피에히를 권좌에서 축출하고자 했다. 과연 그의 계획이 비데킹의 제안으로 이뤄진 것인지, 아니면 볼프강 포르쉐가 비데킹의 야망을 이용해 피에히를 몰아내려고 했던 것인지는 당사자들 외엔 모르는 일이지만 어쨌든 볼프강 포르쉐와 벤델린 비데킹은 이제 한 배를 탄 동지가 되어 있었다.

 

 

뜻밖의 반전, 그리고 적의 승리

비데킹은 있는 돈 없는 돈을 끌어와 폴크스바겐 주식을 사모으는데 열을 올렸다. 50% 이상의 지분을 끌어온 비데킹은 이제 승리를 목전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뜻밖의 변수가 발생했다. 폴크스바겐의 지분 20%를 가지고 있던 니더작센 주가 인수합병을 거부하면서 버티기에 들어간 것이다.

 

당시는 포르쉐의 폴크스바겐 최종 인수를 위해선 니더작센 주, 그러니까 폴크스바겐 본사가 있는 주의 동의를 받아야지만 가능한 상황이었다. 이 때 니더작센 주지사 크리스토퍼 불프는 피에히 의장과 폴크스바겐을 지지하고 있었고 피에히는 니더작센 주를 이용할 수 있었다. 거기다 VW 노조 역시 포르쉐의 공격적인 지분 확보에 위기감을 느끼고 제동을 걸고 나서게 됐다. 예상대로 니더작센 주는 인수합병을 거부했고, 최종 단계에서 막혀버린 포르쉐는 무리한 지분확보에 따른 부채 증가로 옴짝달싹도 못한 상황에 처하고 만다.

 

사진 왼쪽이 페르디난트 피에히 VW 의장, 중앙이 포르쉐 회장인 비데킹, 오른쪽이 니더작센 주의 주지사 크리스토퍼 불프. 상징적으로 이들의 관계를 보여주는 사진. 크리스토퍼 불프는 이후 독일 연방 대통령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지만 기업에서 제공된 각 종 편의와 대출 의혹 등으로 여론의 뭇매를 맞고 대통령직에서 물러난다.

 

결국 포르쉐 지주회사의 의장이었던 볼프강 포르쉐는 피에히를 찾아가게 됐고, 되레 포르쉐 지분 49.9%를 폴크스바겐이 매입하는 조건으로 지분 전쟁은 피에히의 승리로 끝을 맺게 된다. 승리를 거둔 페르디난트 피에히는 망설임 없이 자신을 배신한 비데킹이 포르쉐 회장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을 합병의 조건으로 내세웠다. 비데킹의 신화가 끝이 나는 순간이었다.

 

비데킹은 5,000만 유로(당시 환율로 약 800억원)의 퇴직금을 받는 조건으로 물러나지만 여론의 따가운 시선에 상당 금액을 포기하게 된다. 40세에 포르쉐 대표자리에 올라 다 죽어가던 회사를 살렸고, 최고의 이익을 내는 자동차 회사로 만든 벤델린 비데킹이었지만 포르쉐 가문, 특히 페르디난트 피에히의 전략 앞에선 그의 꿈도 꺾일 수밖에 없었다. 피에히를 너무 쉽게 생각했던 것이다. 사실 페르디난트 피에히는 비데킹의 능력을 극찬했었고, 자신이 폴크스바겐 경영 1선에서 물러날 때 그 자리를 비데킹이 맡아주길 바랬었다.

 

하지만 다른 생각, 다른 사람과 연결이 되어 있던 비데킹은 이 제안을 거절했고 결국 그것이 그의 패착이 되고 말았다. 현재 피에히 의장은 마틴 빈터코른이라는 확실한 카드를 쥔 채 폴크스바겐 자동차 제국을 호령하고 있다. 최근엔 그의 아내 우르슬라 피에히가 이사회에 참여함으로써 피에히 집안의 영향력은 더욱 강화된 상태. 뛰어난 엔지니어이자 경영자인 페르디난트 피에히는 할아버지와 삼촌, 어머니가 이루지 못한 브랜드 통합의 꿈을 달성하고야 만 것이다.

 

비데킹의 좌절은 결과적으로 피에히 의장의 존재감만 더욱 키워냈고, 이제는 법정에 서서 감옥에 가느냐 마느냐로 힘든 싸움을 벌여야 하는 처지에까지 몰리게 됐다. 만약 그가 욕심을 부리지 않고 포르쉐를 계속 키워왔더라면, 그래서 자신이 기획한 또다른 히트작 파나메라의 성공과 함께 계속 달려갔더라면, 그가 바라는 부와 권력, 그리고 뛰어난 경영자의 모습은 현재진행형이었을 것이다. 골리앗을 무찌른 다윗이 되고 싶었던 비데킹은 그렇게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