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크푸르트모토쇼가 한창일 때 친분을 쌓아가고 있는 기자분으로부터 연락을 좀 달라는 메일을 받았습니다. 전화를 했더니 반가운 소식을 전하겠다고 하더군요. 내용은 대략 이렇습니다. '지금 프랑크푸르트에 벤츠 디자이너 이일환 씨가 있다. 시간이 되면 연락을 해놓을 테니 한 번 만나 이야기를 나눠보지 않겠느냐?'
그렇지 않아도 예전에 한국에서 한 번 볼 기회를 놓친 탓에 아쉬웠는데 바로 코앞에서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엔 제 쪽에서 도저히 시간을 낼 수가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참 운도 없죠...
요즘 이일환(영어명 : 허버트 리)씨는 F125라는 컨셉카를 책임지고 디자인한 이유로 한국언론에서도 여러번 인터뷰를 했던지라 신선함(?)은 예전에 비해 떨어질 정도로 인지도를 높여놨습니다. 그래도 신문기사에서는 다루기 어려운 내용을 블로그에 올리면 좋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진하게 남더군요. 그래서 제가 그 기자분께 대신 인터뷰한 내용이라도 여기 찾아오시는 분들께 소개하는 게 어떻겠느냐 제안을 했습니다. 이왕이면 인터뷰 뿐 아니라 뒷얘기도 같이 곁들여서 말이죠.
오케이하시더군요. 그렇게 약속된 내용을 메일로 받았습니다. 다른 기사들에서는 만날 수 없는 얘기들이 있어서 저는 참 재밌게 읽었고, 그 내용 전문을 오늘 여기 싣습니다. 좋은 자료를 보내준 조용탁 기자께 감사의 말씀을 전하며, 여러분도 다 읽고난 후 추천 좀 듬뿍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안녕하세요. 포브스코리아의 조용탁이라고 합니다. 이곳에서 소개하고 싶은 분이 있어 대타로 포스팅을 준비했어요. (스케치북님 감사요) 바로 벤츠가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운영하고 있는 메르세데스 벤츠 어드밴스드 디자인 스튜디오의 이일환 센터장 이야기랍니다.
2년 전이었어요. 친한 대학 후배 만나 소주 한 잔 하는데, 그놈이 자기 아는 동생이 ‘우리 사촌형이 벤츠 디자인 한다’고 자랑하고 다닌다고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때 저는 자동차 막 시작한지라, 지금도 아는 거 없지만 자동차 업계 돌아가는 이야기 저저저어엉~~~말 모르고 있었답니다. 그래서 “한국 사람이 어케 벤츠 디자인을 해 말두 안되는 소리, 술이나 더 퍼마셔랏!” 후배 구박했어요. 이넘이 좀 삐진거예요.
며칠 있다 연락이 왔어요. 아는 동생 사촌형이 미국에 있는데, 정말 벤츠 디자인 하구 있구, 쫌만 더 있으면 디자인한 벤츠가 길거리에서 굴러다닐 분위기라는 거예요. 그 아는 동생이 저 하구도 아는 사람(한국은 한두 다리 건너면 정말 거의 다 아는 사람이예요. 착하게 살아야 한답니다)인지라 연락을 주고 받은 다음 이일환씨에게 이메일을 보냈어요. “사촌 동생이랑 이리 저리 아는 사람인데, 요모조모로 연락했는데 시간 되면 보고 싶지만 거리가 좀 멀다 보니 일단 이메일로 나마 인사하구 앞으로 친하게 잘 지냈으면 좋겠다.”
반갑다면서 잘지내자구 연락이 오더라고요. 이후 이메일 주고 받으며 취재에 도움 받곤 헀지요. 기사도 준비하려 했어요. 특히 지난해 3월에는 기사가 코 앞까지 나왔다가, 차마 말하기 애매한 몇 가지 외부적인 요인으로 도중에 기사를 내린 일도 있었어요.
그를 처음 만난 건 연락한지 일년 정도 지나서였어요. 한창 기사 준비할때죠. 2010년 3월 독일 슈투트가르트로 (자비를 들여서요! 저 뭐 받아먹구 좋아하는 기자 아니랍니다. 그러다 보니 항상 배고파요. 스케치북님 맥주 사줘요. 크흑) 찾아간 일이 있어요. 사실은 다른 일로 스위스 제네바에 갈 일이 생겼는데, 기차 타고 조금만 더 올라가면 벤츠 본사가 있는 슈투트가르트인거예요. 이일환씨도 마침 독일에 계실 때라 연락드렸더니 잘 됐다며 맥주나 한잔 하자 하더라고요. 후다닥 기차표 끊어서 찾아갔지요.
당시 제네바모터쇼에 등장한 벤츠의 컨셉트 카 F800 style이 화제가 됐었지요. 그 차 디자인을 이일환 센터장이 했답니다. 화제가 됐고, 인터뷰도 몇 개 올라왔어요. 독일에서 만나 맛있는 맥주 마시며 이런 저런 이야기 나눴지요. 그때 했던 이야기와, 이번에 다시 주고 받은 이야기를 소개하려는 거예요. 제가 포브스에 올린 내용에 조금 더 살을 붙인 기사인데, 한번 읽어 주세요. 감사합니다.
2010년 3월, 벤츠 어드벤스드 디자인 스튜디오의 이일환 센터장은 벤츠의 컨셉트카 F800으로 세계 자동차 디자인 업계의 주목을 받았다. 불쑥 독일을 찾아온 기자를 이 센터장은 두 눈을 반짝이며 반겼다. 그는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일하고 있지만 벤츠의 신차 디자인 프로젝트를 위해 독일 본사와 미국을 오가고 있었다. 그가 디자인한 벤츠의 핵심 모델 CLS는 생산을 앞두고 있었고, 동양인 최초에 최연소 디자인 센터장에 임명되기 직전이었다.
이 센터장을 만난 지 1년 6개월이 지났다. 그의 꿈은 하나씩 현실이 되고 있다. 2010년 4월 그는 어드밴스드 디자인 스튜디오 센터장으로 승진했다. 벤츠 본사는 그가 보여준 능력과 노력에 대한 보상으로 그를 임원급인 스튜디오 최고 책임자에 임명했다. 2006년부터 진행된 2세대 CLS 모델 경쟁에서 선택된 그의 디자인은 자동차로 완성됐다. CLS는 한국에서 지난 8월 31일 출시 됐다.
그는 기쁜 마음으로 고국 방문을 준비했다. 하지만 생각지 못한 일이 생겼다. 부인이 31일 두 번째 아이를 출산 한 것이다. 한국 행 비행기표를 사고, 짐을 꾸려둔 상태였지만 부인을 홀로 남겨둘 수 없었다. “아내가 첫 번째 아이를 낳을 때도 함께 있어주지 못했어요. 아들이 태어날 때 독일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아내를 두 번이나 홀로 병원에 둘 수 는 없었어요. 정말 한국에 가고 싶었는데, 미안합니다.”
결국 이 본부장과의 인터뷰는 이메일과 전화 통화로 진행했다. 여전히 그의 목소리는 씩씩했고, 일에 대한 열정이 넘쳤다.
(인터뷰 내용에 앞서 이일환 씨가 근무하는 캘리포니아 디자인센터 사진 몇 장 참고로 올립니다. 이 사진은 스케치북 다이어리가 준비했습니다. ㅎㅎ)
-자동차 디자이너의 길을 걷게 된 배경이 궁금합니다
“그냥 빠져들었습니다. 어릴 적부터 차가 너무 좋았어요. 5살 때 사각형 상자모양에 바퀴를 그려 놓고는 자동차라고 기뻐했지요. 몇 시간째 자동차만 그리고 놀았던 기억도 있습니다. 한국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도 자동차 디자인에 대한 꿈을 키웠습니다. 그리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그가 입학한 곳은 미국 동부에 있는 로드아일랜드 디자인 스쿨이다. 이곳에서 기초를 닦은 그는 2년 후 미국 최고의 자동차디자인 스쿨인 페서디나 아트 스쿨(Art Center College of Design Pasadena)에 입학한다. 그리고는 무엇에 홀린 듯이 디자인에 매달렸다. 이 센터장은 학창 시절에 대해 “마음껏 자동차 디자인 공부를 할 수 있어 너무 행복했다”며 “학업은 힘들었지만 그 과정을 즐기려고 했다”고 말했다.
-자동차 브랜드는 각각의 특징이 있습니다. 벤츠, BMW, 아우디 혹은 페라리나 포르쉐 같은 곳도 있지요. 이중에서 왜 벤츠를 선택했습니까?
“졸업하고 여러 브랜드에서 입사 제의를 받았습니다. 성적도 좋은 편이었고,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있는 폭스바겐 디자인센터 인턴십 경력도 높게 평가됐습니다. 운 좋게 제가 선택할 수 있는 위치가 됐습니다. 저는 솔직히 말해 세꼭지별(벤츠의 엠블럼)에 반해서 벤츠를 선택했습니다. 어려서부터 제게 최고의 자동차 브랜드는 벤츠였습니다. 제가 디자인한 벤츠를 거리에서 볼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어요. 그 꿈을 이뤄보고 싶어 벤츠를 선택했습니다.”
그는 디자이너의 세상을 1등만 기억해주는 곳이라고 설명했다. 아무리 탁월한 디자인도 2등이면 의미가 없다. 자신이 디자인에 참여한 자동차를 거리에서 볼 수 있는 디자이너는 극히 소수뿐이다.
이 센터장은 입사 이후 4년은 자신과의 싸움이었다고 했다. E클래스를 비롯한 주요 모델 디자인 경쟁에 참여했지만 번번히 고배를 마셨다. 자신이 최고라는 마음은 사라졌고 ‘이곳에서 성공 못할 수도 있다’는 상념이 그를 괴롭혔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짜내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항상 필기도구를 가지고 다닌다. 언제든지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그려두기 위해서다. 미국과 독일을 오가는 비행기 안은 물론, 식사나 샤워 중에도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그림을 그렸다. 포기하지 않고 더 나은 아이디어를 내놓으며 도전하는 그를 상사들이 인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회가 왔다.
-2006년 9월 CLS 디자인 작업이 시작됐죠?
“경쟁이 시작됐습니다. 전 세계 벤츠 디자이너들이 참여했지요. 50여명의 경쟁자들은 심사가 계속되며 줄어 들었습니다. 2007년 초 결국 3개 팀만 남았는데 그 중 하나가 제 작품이었습니다. 최종 선택은 본사 회장을 비롯한 이사진 투표로 결정됩니다. 결국 제 디자인이 선택 받았습니다. 아직도 그 순간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가 디자인한 CLS는 벤츠 안에서 호평을 받았다. 차세대 벤츠 디자인의 방향을 제시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실제로 이후 그가 제안한 디자인은 제네바에서 주목 받은 벤츠의 컨셉트카 F800으로 형상화됐다. 지난해 11월 LA 오토쇼에서 화제가 된 바이오메 컨셉트카 디자인에도 그가 참여했다. 이번 프랑크푸르트 모터쇼에서 주목받은 컨셉트카 F125 역시 그의 작품이다. 그가 센터장이라 특별 대접을 받은 일은 없다. 모든 모델은 치열한 경쟁을 거친 다음 선정된다.
-디자인의 어떤 면이 본사의 호평을 이끌어 냈다고 생각하나요?
“벤츠 디자인은 전통, 혁신, 미래라는 3가지 요소의 집합체입니다. 2세대 CLS는 이 요소들을 바탕으로 디자인 했습니다. 1세대의 아름다움과 우아함을 그대로 살리면서 2세대는 좀더 역동적 이고 감성적인 면을 가미했지요. 1세대의 영혼을 유지하면서 새로운 차를 선보이고자 노력했습니다. CLS는 이성이 아닌 감성과 감각적인 자극으로 사람들을 사로잡는 차입니다. 재해석이 필요했습니다.”
그는 벤츠의 지난 모델들을 꼼꼼히 살피며 고유의 DNA를 찾아 나섰다. 전통적인 느낌을 주면서도 날렵하고 세련된 이미지를 모던하게 해석했다. 디자인 분야에서 보다 혁신적인 변화를 원하던 벤츠 경영진의 의지도 그가 성장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새로운 시각으로 전통을 재해석한 그가 높은 평가를 받은 배경이다.
-디자인이 날렵한 느낌을 많이 줍니다. 직선적이고 세련된 스타일의 디자인을 선호하는 이유가 있나요?
“디자인에 대한 선호는 너무 주관적이라 특별히 이유를 설명하기 어려워요. 재미있는 건 대체로 날렵한 체형의 디자이너들이 유선형의 날렵한 차체 디자인을 선호하고요, 좀 통통한 체형의 디자이너들은 부드러운 곡선을 많이 적용하는 경향이 있어요. 정확한 통계가 있거나 과학적인 근거가 있는건 아니예요.”
-앞으로 어떤 자동차를 디자인하고 싶습니까?
“두 가지로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먼저 캘리포니아 스튜디오에서 새로운 벤츠 시리즈의 디자인이 계속 나올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벤츠는 팀으로 일하는 문화가 강합니다. 제가 힘들었을 때 저를 인정해준 동료가 있었기에 저도 이 자리에 설 수 있었습니다. 저도 그런 동료가 되어주고 싶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세월을 넘어선 자동차 디자인을 하고 싶습니다. 10년, 20년이 지나도 여전히 세련돼 보이고 품이 나는 자동차를 디자인하는 것이 제 평생의 꿈입니다.”
이 센터장은 디자이너를 꿈꾸는 한국의 후배들을 위해서도 조언을 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스스로 즐기겠다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면 기회가 온다는 것이다. “준비된 자에게 기회가 옵니다. 너무 조급해 하지 마세요. 좋은 디자인은 마음의 평온과 여유 에서 나옵니다. 꿈을 크게 갖고 자동차에 대한 열정을 잃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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