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2019년 신차 판매량은 약 3백6십만 대였습니다. 시장은 계속 성장 중이었고, 2020년은 별다른 일만 없다면 연간 판매량이 처음으로 4백만 대를 넘기는 해가 될 것으로 예상했죠. 하지만 팬데믹으로 2020년 신차 판매량이 3백만 대를 넘기지 못한 것은 물론, 이듬해인 2021년에는 반도체 칩 부족이라는 복병을 만나며 판매량이 더 줄어 2백6십만 대를 겨우 넘긴 것에 만족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눈에 띄는 지표가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폭스바겐의 국민차 골프Golf의 끝없는 추락, 그리고 테슬라 모델 3의 가파른 상승세가 교차한 한 해였다는 점입니다. 폭스바겐은 지난해 독일에서 총 489,962대의 자동차를 팔았습니다. 전년과 비교해 6.8% 마이너스 성장을 했지만 2위인 메르세데스(225,392대)와 차이는 여전히 컸습니다.
반면 테슬라는 총 39,714대를 팔며 브랜드 종합 순위에서 19위에 머물렀습니다. 판매량만 놓고 보면 두 브랜드는 비교할 수준이 안됩니다. 하지만 조금 더 파고 들어가 보면 멀리서는 안 보이는 내용이 드러납니다. 우선 지난해 독일에서 가장 많이 팔린 자동차 top 10 결과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1위 : 폭스바겐 골프 (91,621대)
2위 : 폭스바겐 T-Roc (57,424대)
3위 : 폭스바겐 티구안 (55,527대)
4위 : 오펠 코르사 (49,475대)
5위 : 폭스바겐 Up (46,708대)
6위 : 폭스바겐 파사트 (45,696대)
7위 : 미니 (42,938대)
8위 : BMW 3시리즈 (41,704대)
9위 : 스코다 옥타비아 (40,663대)
10위 : 피아트 500 (35,787대)
10위 안에 폭스바겐 모델만 5개가 이름을 올렸고, 골프의 1위 자리 수성은 변함없었습니다. 2위를 기록한 폭스바겐 티록의 성장세도 전기차가 아닌 모델로는 상당한 수준이었습니다. 그런데 상위 그룹에서 가장 큰 폭으로 판매량을 끌어올린 건 11위를 차지한 테슬라 모델 3였습니다.
총 35,262대가 팔렸는데 전년과 비교해 무려 132.0%가 늘었습니다. 1위를 차지한 골프가 전년 대비 -32.8%라는 큰 폭의 하락을 보인 것과 선명하게 대비되는 결과였습니다. 테슬라 자동차들 중 모델 3 판매 비중은 88.78%에 해당할 정도로 절대적이었죠. 불과 2년 전 독일 판매량(9천 대)을 생각하면 놀라운 결과가 아닐 수 없습니다.
▶2021년 독일 순수전기차 판매량 순위 (자료=연방자동차청)
1위 : 테슬라 모델 3 (35,262대)
2위 : 폭스바겐 e-Up (30,797대)
3위 : 폭스바겐 ID.3 (26,693대)
4위 : 르노 Zoe (24,736대)
5위 : 스마트 포트 (17,409대)
6위 : 현대 코나 EV (17,240대)
7위 : 스코다 엔야크 iV (13,026대)
8위 : 폭스바겐 ID.4 (12,734대)
9위 : 피아트 500e (12,516대)
10위 : BMW i3 (12,178대)
또한 폭스바겐이 전기차 시장에서 물량 공세를 했음에도 1위 자리는 모델 3에게 돌아갔습니다. 모델 3만 아니었다면 자국 시장에서 폭스바겐이 1위 자리를 놓치는 일은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닙니다. 독일인들 기준에서는 또 하나 놀랄 만한 자료가 있습니다. 바로 개인등록(Privatzulassungen) 순위입니다.
‘개인등록’은 딜러나 제조사, 그리고 렌터카나 그밖의 법인용 자동차로 등록된 것을 제외한 신차를 말합니다. 독일은 제조사와 자동차 대리점 딜러들이 자동차를 먼저 등록해 짧게는 이틀, 길게는 일주일 정도 자신들 소유로 가지고 있다가 판매합니다. 그냥 신차나 다름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는 이유는 할인 때문입니다. 많게는 30% 이상 정가보다 저렴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판매 비중이 높은 편입니다. 하지만 이런 중간 과정 없이 신차를 주문한 다음 바로 출고장으로 차를 찾으러 가는 개인 소비자들도 있습니다. 이 비중이 약 30% 전후 수준입니다. 1990년 중반까지만 해도 60%를 넘었지만 지금은 그 비중이 크게 줄었습니다. 어쨌든 업무용 자동차, 또 할인을 위한 제조사 등록 신차를 제외한 순수한 개인등록 신차만 놓고 순위를 따져봤습니다.
▶개인등록 신차 top 10 (자료=독일연방자동차청)
1위 : 테슬라 모델 3 (24,930대)
2위 : 폭스바겐 골프 (23,638대)
3위 : 미니 (22,928대)
4위 : 폭스바겐 T-Roc (22,682대)
5위 : 폭스바겐 Up (21,112대)
6위 : 폭스바겐 티구안 (15,992대)
7위 : 다치아 산데로 (15,987대)
8위 : 미쓰비시 스페이스 스타 (15,670대)
9위 : 폭스바겐 T-크로스 (13,501대)
10위 : 피아트 500 (13,313대)
모델 3는 전체 판매량의 약 70% 이상의 신차가 이처럼 개인등록을 통해 번호판을 받았습니다. 반대로 골프의 경우 약 25%만이 개인등록 방식을 이용했습니다. 거래 방식의 차이를 고려해야겠지만 그래도 워낙 판매량 볼륨 자체가 컸던 골프였던지라 비중이 낮은 개인등록 순위에서조차 그간 1위 자리를 내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난해 그 자리를 테슬라에 내준 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였습니다.
골프가 독일에서 2017년까지만 해도 약 23만 대가 팔렸습니다. 많을 때는 1년에 40만 대 이상 팔리던 모델이죠. 그런데 지난해 판매량이 91,621대까지 곤두박질했습니다. 시장 분석을 주로 하는 JATO다이내믹스는 1980년 이후 최저 수준이라고 했습니다. 테슬라가 모델 3로 독일에서 최고의 한 해를 보낸 것과 상반된 결과였습니다.
골프의 이런 추락은 티구안, 티록과 같은 자사 SUV 모델들의 선전, 그리고 I.D와 같은 전기차 등장, 여기에 소프트웨어 문제에 따른 판매 지연, 그리고 반도체 칩 부족으로 인한 생산량 감소 등, 많은 문제에 따른 결과였습니다. 꼬여도 단단히 꼬인 한 해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 연말, 독일의 유력 경제지 뷔르트샤프츠보헤에는 ‘짜증 나는 디스, 하지만 디스가 맞다’라는 제목의 기사가 올라왔습니다. 여기서 디스는 폭스바겐 그룹 회장 헤르베르트 디스를 뜻합니다. 내부자들 증언에 따르면 그는 늘 테슬라를 외치고 다녔습니다. 모든 비교가 테슬라였을 정도였죠. 그런 회장의 집착에 많은 직원들이 괴로워했다고 전했습니다.
헤르베르트 디스는 독일 자동차 업계 인물 중 테슬라의 소프트웨어와 그로 인한 생태계 구축을 누구보다 부러워하고 염려했던 인물입니다. 테슬라는 전기차 브랜드로 전환을 선언한 폭스바겐의 롤 모델이자 동시에 극복과 타도의 대상이었던 겁니다. 그런 테슬라가 독일에 공장을 짓고, 자신들의 안방에서 모델 3를 앞세워 무섭게 성장하고 있으니 그의 이런 테슬라 집착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갑니다.
과연 2022년에는 어떤 결과를 보일까요? 독일에서 골프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차가 아무리 좋아도 하릴없이 무너져 내리는 현실 앞에서 마냥 “우리의 국민차”만 외칠 수는 없습니다. 무엇보다 폭스바겐은 올해도 반도체 칩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래저래 골프의 반등이 쉽지 않다는 게 폭스바겐의 고민이 아닐까 합니다.
반면 모델 3를 앞세운 테슬라의 진격은 어느 독일 네티즌의 말처럼 충격 그 자체입니다. 베를린 공장에서 모델 Y까지 본격 생산된다면 테슬라가 어디까지 치고 갈지 아무도 모릅니다. 물론 독일 자동차 회사들이 그냥 지켜만 보고 있진 않을 겁니다. 그래도 시장을 선점한 그 효과는 결코 무시될 수 없고, 이는 판매 결과가 보여주고 있습니다. 테슬라는 올해도 과연 상승세를 이어갈 수 있을까요? 테슬라라는 강한 자극제가 자동차에 있어서만큼은 자존심 강한 독일인들을 어떻게 자극할지도 지켜볼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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