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1월에 있었던 일입니다. BMW는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리는 소비자 가전 전시회(CES)에서 새롭게 업그레이드된 iDrive 시스템을 소개할 계획이었습니다. i드라이브는 BMW가 자체적으로 개발한 운영체계로, 이번에 소개된 것이 8세대가 됩니다. 기어노브 앞에 놓인 다이얼과 디스플레이를 이용해 정보를 제공하고, 안전 및 편의 장비 등을 작동할 수 있던 i드라이브는 2001년 7시리즈에 첫 적용 됐죠.
처음엔 물리적으로 다이얼을 조작하는 방식에 머물렀다면 2008년 이후엔 운전자 음성을 인식하는 단계로 성장했고, 2015년에는 직접 접촉이 없이 손동작, 그러니까 제스처를 통해 일부 작동이 가능했습니다. 갈수록 사용자 경험이 입체적인 단계로 발전했다고 볼 수 있겠네요.
이후 음성 명령 기능은 더 정밀해졌습니다. 그리고 이번 8세대의 경우 센서가 주변 환경을 인식할 수 있어서 스스로 조명 분위기를 바꾼다든지, 주차를 돕거나 부분적으로 자율주행에 도움을 주는 단계로까지 발전했습니다. 그 외에도 실내 온도나 바람의 세기, 음악 선곡 등, 개인 특성에 맞는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고 전해집니다. BMW 측은 이 8세대 i드라이브 시스템을 새로운 전기차 iX부터 적용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자, 이처럼 야심 차게 준비한 시스템이니 홍보에도 신경을 써야겠죠? 그래서 BMW는 4분이 넘는 홍보영상 하나를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이 영상이 문제였습니다. 영상을 본 많은 사람이 비추 버튼을 눌렀고, BMW를 강도 높게 비판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영상은 뮌헨 본사에 있는 BMW 벨트를 배경으로 합니다. 깊은 밤 iX 한 대가 전시관 안으로 들어옵니다. 이 차를 이곳에 전시하기 위해서는 다른 모델을 빼야 한다고 관계자가 이야기합니다. 그랬더니 iX를 운전하고 온 상사로 보이는 남자는 올드한 7시리즈를 치우는 게 먼저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사라진 공간. 갑자기 BMW 760Li 한 대가 스스로 시동을 켜고 iX를 신경질적으로 부릅니다. 자동차를 의인화한 겁니다. 여기에 등장한 7시리즈는 4세대 E66 모델입니다. 2001년에 나온 신형 7시리즈(E65)의 롱바디 모델이죠. 크리스 뱅글 디자인으로 이슈가 되었던 그 4세대 맞습니다.
영상 속 7시리즈는 i드라이브가 처음 적용된 모델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1세대 i드라이브 시스템이 들어간 구형 7시리즈와 최신의 8세대 i드라이브가 적용될 예정인 전기차 iX가 맞닥뜨린 거네요. 젊은 여성 목소리를 입힌 iX, 그리고 괄괄한 목소리에 뭔가 거칠고 고지식해 보이는 노인 설정의 올드 7시리즈는 이때부터 흔한 표현으로 디스전을 펼칩니다. 진짜 차가 아닌, 장난감 자동차는 이 전시대 위에 설 자격이 없다고 선빵(?)을 760Li가 날립니다.
이미 관리자 발언으로 자기가 BMW 벨트 전시장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으니 화가 날 만도 하죠. 이후 서로 자기가 잘났다고 말싸움을 하게 되고, 다양한, 첨단의 기능으로 무장했다며 iX는 계속 구시대 유물처럼 7시리즈를 몰아세웁니다. 결국 두 자동차의 배틀은 무리하게 인터넷 연결을 시도(?)하다 에러가 난 7시리즈가 상처를 받고 물러나며 끝나게 되죠.
미안했던 iX는 E66을 따라가 위로의 말을 건넵니다. 당신(여기서는 1세대 i드라이브를 의미)이 없었다면 난 존재하지 못했을 거라면서 말이죠. iX의 태도에 마음이 풀린 760Li는 농담과 웃음으로 iX를 받아들이고, 결국 두 모델은 나란히 전시대 위에 오르며 영상은 끝을 맺습니다.
<해당 영상>
훈훈하게 마무리된 듯했으나 영상에 좋아요는 4천 1백, 싫어요는 6천 6백 개가 찍혔습니다. 2천 개가 넘는 댓글의 상당수가 기획 의도를 비판하는 것들이었죠. '기술 개발에 너무 많은 돈을 써서 디자인에 쓸 돈은 거의 없었고, 마케팅에는 아예 쓸 돈이 없었던 모양'이라는 재치 있는 비판글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직설적인 표현들이었습니다.
이처럼 나름 신경 써 만든 영상에 비판이 가득했던 이유는 뭘까요? BMW가 첨단의 i드라이브와 미래 먹을거리인 전기차 iX를 홍보하기 위해 자신들의 유산 4세대 7시리즈를 뒷방 노인네처럼 묘사하고 취급했다는 것입니다. 자동차 회사는 모두 자신들만의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죠. 이를 어떻게 쌓아가고, 어떻게 이어가느냐가 곧 그 브랜드의 가치이자 이미지입니다.
그런데 미래 기능, 미래 시장을 너무 생각하다 사람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부분을 BMW가 놓친 것입니다. 이제 시작단계인 전기차보다는 추억이 묻어 있는, 자신들의 경험 속에 있는 7시리즈에 더 애정을 보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특히나 이렇게 어설프게 대립적인 관계 설정을 했을 경우에는 말이죠. 안 그래도 내연기관이 사라질 것이라는 분위기에서 추억, 역사, 전통이 버무려져 있는 과거를 무능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묘사한 것은 실책이라고밖에 설명이 안 됩니다.
참고로 해당 영상 하단에 링크되어 있는 아우디 홍보 영상의 반응을 보면, 왜 사람들이 이처럼 이번 BMW 영상에 비판을 쏟아내는지 더 이해가 쉬울 겁니다. 또한 어떤 점이 소비자의 감성을 자극하는지도 살펴볼 수 있을 듯합니다. (특정 브랜드를 부각하려는 의도는 조금도 없습니다. BMW 해당 영상 페이지에 이 영상이 연결돼 있어서 소개하는 것이니 오해 없기를 바랍니다.)
<아우디 영상>
i드라이브 홍보 영상에 대한 사람들의 싸늘한 반응을 보면서 저는 지금 자동차 업계의 상황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내연기관의 시대가 저물며 자동차 기업들은 이제 새로운 대안, 새로운 시장으로 빠르게 편입해 들어가는 중입니다. 그래서 요즘을 자동차 생태계가 과도기를 맞았다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다르게 보면 그만큼 급격한 변화 속에서 제조사들 또한 혼란스러워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내연기관 자동차에서 전기차로, 기계 엔지니어링의 시대에서 디지털 정보통신기술의 시대로 변화하면서 과거를 어떻게 미래와 연결할지, 이 전혀 다른 느낌의 환경을 어떻게 하나의 헤리티지 안에 담을지 어려워하는 건 아닌가 하고 말이죠.
아마도 혼란은 잠시일 것이고, 결국 우린 새로운 자동차 패러다임에 빠르게 적응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이동성 세상이 완전히 펼쳐지고 자리 잡기 전까지는 우린 어쩌면 이런 혼란을 종종 보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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