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만 뜨면 새로운 전기차 관련 소식입니다. 생존을 위해, 미래 시장 주도권을 쥐기 위해 제조사들 경쟁도 뜨겁습니다. 시장도 점점 더 반응하고 있습니다. 이런 흐름 속에 묘한 특징 하나가 눈에 띕니다. 바로 레트로 바람이죠. 좀 더 정확하게는 오래전에 단종된, 추억 속, 혹은 박물관에서나 볼 만한 옛날 자동차가 전기차로 계속 재탄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정말 좋아하는 미니밴 중에 폭스바겐의 마이크로버스 T1이 있습니다. 불리라는 애칭으로 주로 불렸고, 히피들의 차로 불리기도 했죠. 1950년부터 생산되었으니까 역사 또한 긴 이 자동차는 현재 7세대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폭스바겐은 2017년 모터쇼에서 불리를 모티브로 한 콘셉트카 ID.버즈를 선보였습니다.
그리고 내년이죠, 2022년에 양산형 모델을 내놓기로 했습니다. 물론 전기차로 말이죠. 얼마나 콘셉트카와 디자인이 가까울지는 모르겠지만 마이크로카 T1을 좋아한 팬들 마음을 다시 끓어오르게 하기엔 충분한 소식이 아닌가 합니다. 군용으로, 그리고 험로 주행용으로 많이 이용되며 마니아층을 형성했던 GM의 허머도 다시 만들어졌습니다. 만약 엔진을 달고 나왔다면 내뿜는 CO2 때문에 욕을 먹었겠지만 이제 전기차가 됐으니 이런 논란에서도 자유롭습니다. 타이어까지 친환경이라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요.
우리나라에는 잘 안 알려졌지만 유럽권에서는 누구나 아는 오펠이란 브랜드가 있습니다. 이 오펠이 최근 전기 콘셉트카를 내놓았는데 그게 유럽 자동차 팬들을 흔한 말로 뒤집어 놓았습니다. 1970년 처음 생산돼 1988년까지 출시되었던 만타를 거의 그대로 재현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역시 전기차입니다. 양산 가능성이 없다고 하지만 오펠은 이런 식으로 클래식 자동차를 계속 전기차로 선보이겠다고 했습니다. 시장 반응을 보고 양산 결정을 하겠다는 뜻으로도 읽히네요.
이 외에도 정말 많습니다. 자동차깨나 만들었다는 완성차 업체엔 이제 피할 수 없는 달콤한 유행이 돼버렸죠. 그렇다면 이렇게 클래식 자동차를 다시 소환한 이유는 뭘까요? 가장 직접적 이유라면 '감성 어필'이 아닌가 싶습니다. 새로운 전기차 시장을 활성화하는데 시대의 아이콘들을 다시 불러오는 것만큼 효과적인 게 있을까 싶을 만큼 소비자 반응이 좋습니다. 달콤한 유행이라고 표현을 쓴 것도 이런 환영 분위기 때문입니다.
감성을 깨우다
옛날에 타봤던 차, 또는 어린 시절부터 동경하며 꿈꾸던 자동차를 다시 만난다는 건 보통 흥분되는 일이 아닐 겁니다. 물론 과거 엔진이 주는 그 감성의 영역까지 충족시킬 수는 없겠지만 전기차가 왜 늘고 있는지 그 환경적 이유를 생각한다면 이렇게 나와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나 싶습니다.
위에 언급한 자동차들은 흔히 컬처 카,또는 아이코닉(상징적인) 자동차로 얘기됩니다. 그 시대 자동차 문화를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모델이라는 것이죠. 이런 차들을 전기차로 되살리는 것은 홍보 전략에도 도움이 되고, 또 개발비 부담을 줄일 수 있다는 점에서도 긍정적입니다.
완전한 신차를 개발하는 것보다 실패 확률이 상대적으로 덜 하다는 것도 고려했을 겁니다. 갈수록 자동차 스타일이 획일적으로 바뀌고 있고, 이에 지루해하는 소비자들에게 한 시대를 풍미했던 자동차가 다시 나타나는 것은 오히려 신선한 일이기까지 합니다. 아무리 봐도 레트로 전기차 등장은 일석 삼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독일 시사주간지 슈피겔과 인터뷰한 전 오펠 회장 미하엘 로쉘러는 만타 전기차를 "대단히 감성적인 차"라며 칭찬했고, 역시 전기차로 다시 태어난 르노 5를 두고 CEO 루카 드 메오는 "심장의 차"라고까지 표현했습니다. 또 자동차 디자인으로 유명한 학교 포르츠하임대에 재직 중인 교수 루츠 퓌게너는 '레트로'는 잠재 고객의 기억에서 감성을 작동시킨다고 설명했습니다.
마케팅 전문가들 또한 관심을 끄는 게 중요하다며 전략적으로 필요한 일이라고 했습니다. 역시 슈피겔과의 인터뷰에서 브랜드 관련학 교수 올리버 에리첼로는 "익숙하고 잘 알려진 브랜드 이름이 새 차에 적용되면 주목을 받게 됩니다."라고 했습니다. 이쯤 되면 클래식 자동차와 전기차의 조합은 나쁠 게 하나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우려의 목소리도 있습니다.
장기적으론 전기차 시장에 도움 안돼
새로운 시장에 맞는 새로운 디자인 필요
앞서 소개한 올리버 에리첼로 교수는 슈피겔과의 인터뷰에서 "e-모빌리티에 진지하다는 신호를 주기 위해 제조사는 새로운 시장을 위한 문을 여는 새 디자인의 순수 전기차가 필요합니다."라고 했습니다. 감성을 깨우는 것도 좋지만 전기차 시장의 확장을 위해, 그리고 해당 브랜드가 전기차에 진지하다는 것을 소비자에게 인식시키기 위해서는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디자인의 자동차가 나와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기술 혁신은 디자인을 통해 설명되기도 하죠. 좋은 차, 기술적 시도가 많은 차에 그에 맞는 새로운 디자인이 적용되는 게 필요합니다. 미래를 준비하는 전기차는 말할 것도 없겠죠. 따라서 레트로 전기차에 너무 몰입해 과거 지향적 브랜드로 인식되거나, 또는 차를 팔기 위해 쉬운 방법에 기대는 브랜드로 소비자에게 인식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재규어의 첫 전기 SUV I-페이스는 전문가들이 요구하는 '새로움'을 보여준 전기차라 할 수 있습니다.
I-페이스는 재규어 색깔을 잃지 않으면서도 이전에 없던 새로운 형태의 크로스오버 전기차라 할 수 있습니다. SUV라고 하기엔 낮은 차체이지만 또 해치백이라고 하기엔 지상고가 높고 덩치가 컸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게 무엇인지를 보여주기라도 하듯, 이안 칼럼은 I-페이스를 통해 전기차 시장 진입의 좋은 선례를 남겼습니다. 무엇과도 닮지 않고 미래지향적인 디자인을 통해 I-페이스 그 자체로 남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포드 머스탱 마하 E 역시 독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머스탱은 미국 포니카, 머슬카를 상징하는 스포츠 쿠페입니다. 그리고 고성능 파생 모델인 마하 1도 큰 사랑을 받았죠. 포드는 브랜드 상징과 같은 이 이름을 그대로 가져오면서도 형태는 2 도어 스포츠 쿠페가 아닌 SUV에 가까운 CUV로 결정했습니다. 마치 과거(추억)와 미래(크로스오버)를 조합하듯 말이죠. 또 국내 브랜드로는 기아 EV6 역시 이전에 없던 새로운 형태의 전기차라는 점에서 I-페이스와 같은 길을 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옛 것과 새로운 가치 적절한 조합이라면 활성화에 도움
전기차와 레트로 자동차의 만남은 팬들의 감성을 깨우고 전기차에 대한 관심을 두게 하는 데 무척 효과적입니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새로운 기술, 새로운 디자인으로 무장한 새로운 전기차를 기대하는 마음도 클 수밖에 없습니다. 이 두 가지 요소를 잘 섞는다면, 잘 조절할 수만 있다면, 전기차 시대는 의외로 빨리, 그리고 더 환영받으며 우리의 일상으로 들어오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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