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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자동차 세상/독일의 자동차 문화 엿보기

슬픈 이름, 메르세데스

메르세데스 벤츠 자동차를 탄다는 것, 자동차를 좋아하든 아니든 누구나 한 번쯤 가져보는 생각이 아닐까 합니다. 자동차의 원조라는 타이틀은 물론, 기술 혁신을 통한 안전과 안락함, 그리고 고급스러운 자동차임을 상징 삼각별을 통해 지속해서 보여주고 있죠.


자동차 역사가 시작된 이래 지금까지 늘 사람들의 동경을 받은 브랜드이지만 정작 ‘메르세데스’ 이름의 주인공 삶이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는 듯한데요. 오늘은 메르세데스 옐리네크(Mercedes Jellinek)와 그녀의 아버지 에밀 옐리네크(Emil Jellinek)의 삶을 잠깐 들여다보도록 하겠습니다.

에밀 옐리네크, 1900년 / 사진=다임러


외교관이자 사업가였던 에밀 옐리네크

메르세데스 벤츠라는 브랜드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에밀 옐리네크 때문이었죠. 1853년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난 에밀 옐리네크는 랍비였던 아돌프 옐리네크 박사의 아들이었습니다. 공부에 관심이 있던 형제들과 달리 에밀은 신문물에 관심이 많았고 사업에 뛰어들며 큰 성공을 거두게 되죠.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오스트리아 비엔나로 이주했다 다시 부모님과 함께 프랑스로 가게 되는데 이게 그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되어주었습니다. 에밀 옐리네크는 프랑스에서 첫 번째 부인을 만나게 되었고, 결혼 후에는 장인과 함께 알제리에서 재배된 담배를 유럽 대륙으로 수출해 돈을 벌게 됩니다.


보험회사에서 임원으로도 일을 하던 그는 1889년 먼저 나은 아들 둘 밑으로 딸을 하나 얻게 되는데 그 딸 이름은 스페인어로 ‘자비’ ‘친절’의 뜻인 메르세데스였습니다. 그의 인생은 메르세데스 옐리네크를 얻은 뒤로 활짝 피게 되죠. 프랑스 니스로 거주지를 옮겨 국제적인 사업가가 되었고, 또 동시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니스 영사의 자리에도 오릅니다.

에밀 옐리네크과 딸 메르세데스, 1895년 / 사진=다임러


자동차에 관심이 많았던 에밀 옐리네크는 칼 벤츠가 만든 자동차를 한 대 소유하고 있었지만 속도에 대한 갈증을 풀어주지 못해 늘 이 부분을 아쉬워했습니다. 그러던 그의 눈에 다임러와 마이바흐가 만든 자동차 회사 DMC(Daimler Motoren Gesellschaft)의 광고가 들어왔고, 호기심을 느껴 독일까지 직접 찾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이 탈 차를 두 대 주문하는 데 그중 하나가 바로 Phoenix Double Phaeton이라는 모델이었죠.


 8마력에 최고속도 24km/h의 속도를 낼 수 있었는데, 에밀 옐리네크는 빌헬름 마이바흐의 기술력에 매료돼 더 빠른 자동차를 만들어줄 것으로 요구하며 자동차를 추가로 주문합니다. 이미 에밀 옐리네크는 DMC 본사를 찾기 전부터 자동차를 상류층을 대상으로 매우 성공적으로 판매하고 있었기에 다임러나 마이바흐에게 그는 무척 중요한 고객이었습니다.

23마력의 Phoenix Double Phaeton을 직접 운전 중인 에밀 옐리네크, 1899년 / 사진=다임러


자동차 속도에 빠진 에밀 옐리네크

니스에서 자동차 경주 등에 참여하던 에밀 옐리네크는 스피드에 대한 동경이 가득한 사람이었는데요. 또한 자동차 경주대회를 통해 자동차 판매를 성공적으로 이뤄내기도 영리한 사업가이기도 했습니다. DMC가 제공한 자동차로 경주 대회에서 우승을 했고, 그것을 적극 영업에 활용해 DMC 자동차를 계속해서 판매했습니다. 그의 놀라운 영업력에 힘입어 DMC는 안정적으로 기초를 다질 수 있었습니다.


DMC 자동차 구매자이자 판매상이 되다

에밀 옐리네크는 DMC에서 자동차를 주문함과 동시에 니스 지역 총판권을 얻어내 본격적인 영업에 들어갑니다. 그가 한 번에 서른 대가 넘는 모델을 요청하기도 했는데 이는 현재 금액으로 환산하면 약 40억이 넘는 액수였다고 합니다. 당시 자동차가 얼마나 비싼 것이었는지를 알 수 있겠죠?


이렇게 비싸다 보니 결국 자동차의 주 소비층은 상류층이었습니다. 로스차일드 가문이나 그 외 귀족들이 에밀 옐리네크를 통해 DMC의 대표적 자동차 ‘메르세데스 35hp’를 구입하는데, 다임러가 사망한 1900년 이후 칼 벤츠 자동차 회사가 다임러의 DMC에 판매 경쟁에서 밀린 이유도 에밀 옐리네크의 요구에 따라 마이바흐가 제작한 ‘메르세데스 35hp’ 때문이었습니다. 

1901년 니스의 힐 클라임 대회에서 우승한 후의 ‘메르세데스 35hp’. 앙리 데 로스차일드 남작의 소유로 운전석의 빌헬름 베르너는 이후에 독일 황제의 운전기사가 됨 / 사진=다임러


에밀 옐리네크의 강력한 추진력과 이를 기술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었던 DMC는 함께 큰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그리고 점점 판매 영역을 넓혀가던 에밀 옐리네크는 딸의 이름 ‘메르세데스’를 상표 등록하며 더 깊이 DMC 사업에 참여하게 되죠. 그는 니스에 방 50개에 화장실이 23개나 되는 저택 ‘빌라 메르세데스’를 구입해 그의 자동차 사업의 본거지로 활용했을 정도였습니다.


메르세데스를 아꼈던 에밀 옐리네크

열 다섯 살이던 메르세데스 옐리네크 / 사진=다임러


딸의 이름은 자신의 저택에는 물론 레이싱 대회에서 가명을 쓸 때도 활용했던 에밀 옐리네크는 결국 엄청난 영업 성과를 거두며 메르세데스라는 이름을 본격적으로 자동차 사업에 활용하기에 이릅니다. 자신의 이름을 에밀 옐리네크 메르세데스로 개명할 정도로 그는 ‘메르세데스’에 강한 애정을 보였습니다.

메르세데스 벤츠 초기 로고 / 사진=다임러


 슬픈 메르세데스의 삶

1차 세계대전이 터지기 전까지 에밀 옐리네크와 그의 딸 메르세데스 옐리네크에게는 부와 명예만 있는 듯했습니다. 정말 화려한 꽃 길만 달려갈 줄 알았을 겁니다. DMC의 자동차는 계속해서 잘 팔려나갔고 엄청난 수익을 회사에 가져다줬습니다. 하지만 회사 경영진과 옐리네크와의 갈등은 그로 하여금 자동차 영업에 흥미를 잃게 만들었고, 설상가상 전쟁이 터진 후 니스 영사였던 에밀 옐리네크는 프랑스로부터 간첩혐의로 모든 재산을 몰수당하고 기소되게 됩니다.


결국 1917년 스위스 제네바로 에밀 옐리네크는 도망을 가지만 이듬해인 1918년 1월 64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합니다. 사실에 근거한 주장인지는 모르겠지만 에밀 옐리네크가 사망한 후에 메르세데스 옐리네크는 식량을 구걸했을 정도로 어려움에 처하기도 했다는데요. 이미 두 아들의 엄마이기도 했던 그녀는 결국 가난한 예술가와 사랑을 위해 가족의 곁을 떠나고 맙니다.


화려했던 어린 시절 및 결혼 초기 때까지와는 달리 전쟁 후 그녀의 삶은 매우 비참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경제적인 어려움뿐만 아니라 결혼 생활 그 자체에 회의를 느꼈고, 결국 새로운 사랑을 찾아 떠났지만 뼈암이라는 질병으로 사망하게 되는데, 그녀의 나이 서른아홉 때였습니다.

메르세데스 옐리네크. 사진은 모두 흑백이지만 자료에 따르면 멋진 녹색 눈을 가졌다고 한다. / 사진=다임러


위 사진은 1906년경에 찍힌 것으로, 자신의 이름을 딴 자동차에 메르세데스 옐리네크가 앉아 있는 모습입니다. 둘째 아들 한스 슐로저가 지인을 통해 공개한 약 300여 장의 감춰져 있던 사진 속에 포함된 것이라고 하는데요. 메르세데스의 슬픈 삶과 삼각별 메르세데스의 거대한 성공이 대비를 이뤄 묘한 느낌을 줍니다. 자신의 이름이 이처럼 후세에까지 자동차명으로 굳건하게 남아 있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을까요?  


추가 : 히틀러는 알았을까?

해외에서는 이미 예전부터 설왕설래하던 궁금증의 하나로, 과연 히틀러가 가장 사랑하던 자동차인 메르세데스 벤츠가 유대인 사업가에 의해 자리를 잡았다는 것을 알았을까 하는 점입니다. 또 메르세데스 이름 속에 유대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까요? 알았을 수도 있고 어쩌면 알면서도 애써 모른 척했을 수도 있습니다. 진실은 히틀러만이 알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