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라리가 만든 자동차를 산다는 것은 자신의 부를 드러내는 일이며 동시에 세계 최고의 스포츠카를 소유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수십 년도 더 된 페라리 클래식카를 산다는 것은 신차를 구입하는 것과는 또 다른 성취이기도 하죠.
1947년 레이싱팀을 이끌던 엔초 페라리에 의해 세워진 이탈리아 스포츠카 브랜드는 지금까지 70여 개국 이상에서 최고의 차를 팔고 있습니다. 1년에 1만 대 이하를 생산한다는 전략을 이어오며 고객들에게 특별함을 선사하고 있죠. 그런데 이 의미 깊은 브랜드가 설립 70주년이 되는 올해, SUV를 출시하느냐 마느냐는 루머로 이슈의 중심에 서 있습니다.
로고 / 사진=페라리
오래된 소문 페라리 SUV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엔 안 된다더니
스포츠카를 전문으로 생산하는 페라리에서 SUV가 나올지도 모른다는 소문은 10년도 더 된 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때부터 최근까지 '결코 페라리는 SUV를 만들지 않는다.'는 것이 회사의 일관된 목소리였죠. 작년에는 세르지오 마르치오네 회장이 "날 먼저 총으로 쏴야 할 것"이라며 SUV 생산 소문을 일축했습니다. 우리 식으로 하자면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어림도 없다 이놈들아~" 정도가 될 수 있겠군요.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소문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페라리도 결국은 SUV를 내놓게 될걸?"이라며 사람들은 쑥덕였고, 죽기 전엔 안 내놓겠다며 목소리를 높인 회장의 강변을 콧등으로 흘려들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SUV의 인기는 자동차 생태계 전체를 바꿔 놓았습니다. 세그먼트별로 봐도 SUV 종류는 가장 많고 판매량도 매년 가장 가파르게 오르고 있습니다. 어느 지역 가릴 거 없이 세계 곳곳에서 선전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죽어가던 회사들이 SUV로 버티거나 회생을 하는 모습을 목격하면서, 특히 포르쉐가 카이엔과 마칸 등으로 엄청난 이익을 만들어내는 모습을 지켜보며 페라리 최고 경영자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자존심을 함께 세우던 람보르기니, 벤틀리, 마세라티, 그리고 롤스로이스와 애스턴 마틴까지, 모두 SUV 바람 앞에서 그 자존심을 굽혔습니다.
미스터 풀오버, 미스터 스웨터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세르지오 마르치오네 FCA 및 페라리 CEO (오른쪽 네 번째) / 사진=페라리
그리고 올 7월 초였죠. 영국의 자동차 매체 카매거진은 F16X라는 코드명으로 페라리 안에서 SUV 생산 계획이 진행 중이라는 소식을 단독으로 보도했습니다. 세계 언론은 소문이 이제 구체적 실체로 드러났다며 일제히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약 한 달 만인 8월 초, 같은 매체는 세르지오 마르치오네가 투자자와의 통화에서 SUV 프로젝트를 언급했다고 보도하며 페라리 내부로부터 나온 소식을 공개하기에 이릅니다.
현재까지 페라리 회장은 입장 표명을 공개적으로 하지 않고 있습니다. 결코 SUV 생산은 없을 거라며 강하게 반발하던 그의 목소리가 다시 나올 때가 되었는데 말이죠. 독일 전문지 아우토빌트 역시 카매거진 보도 뒤 소식을 전했습니다. 현재 페라리가 판매하고 있는 4륜구동 GT 모델인 GTC 4 루쏘의 다음 모델은 2020년 공개될 예정이며, 이 GTC 4 루쏘의 후속 모델 코드네임이 F166이라는 것, 그리고 여기서 파생된 모델의 코드네임이 F16X라는 좀 더 구체적인 내용이었습니다.
GTC 4 루쏘 / 사진=페라리
카매거진과 아우토빌트에 오른 기사는 모두 게오르그 카허라는 유명 독일 자동차 저널리스트에 의해 작성된 것으로, 확신에 찬 두 번의 보도는 그에게 전달된 정보의 출처가 신뢰할 수 있는 수준임을 짐작하게 합니다. 그런데 8월 초 보도가 나오기 불과 열흘 전, 독일 일간지 디벨트는 상반된 내용의 인터뷰를 페라리 고위 임원과 진행한 바 있습니다.
"4도어 자동차를 우리는 만들지 않을 겁니다"
마케팅과 광고를 총괄하고 있는 엔리코 갈리에라 페라리 최고마케팅경영자(CMO)는 강력하게 페라리의 스포츠성과 전통, 그리고 감성을 추종하고 유지하기를 원하는 인물입니다. 그는 한국이든 독일이든 미국이든, 어느 지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도 이런 페라리의 전통적인 특징을 강조해 왔죠.
엔리코 갈리에라 / 사진=페라리
그는 독일 디벨트와의 인터뷰에서 다시 한번 이런 점을 강조했습니다. 신형 모델이 나오고 그것으로 인해 클래식한 페라리의 분위기가 바뀌게 된다면 중심을 잃게 되는 거 아니냐는 독일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습니다.
"뭘 말씀하시는지 압니다. 포르쉐와 람보르기니, 벤틀리 등을 보세요. 그들은 새로운 고객을 얻기 위해 SUV를 론칭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까지 하면서 핵심가치에서 벗어나고 싶지는 않아요. 우리는 스포츠카 브랜드로 유지됩니다. 결코 4도어 자동차는 만들지 않을 겁니다. (그것을 제외한) 미래로 페라리를 이끌기 위한 성장 가능성을 찾을 겁니다."
일관되게 강조해온 부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열흘 후 그의 이런 의지와는 맞지 않는 얘기가 언론을 통해 공개된 것이죠. 이 소식을 단독 보도한 게오르크 카허 저널리스트는 세르지오 마르치오네 회장에게 페라리 임원들은 4도어 세단은 안 된다며 설득했지만 SUV 생산 계획만큼은 그가 설득되지 않은 거 같다고 아우토빌트의 지면을 통해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엔리코 갈리에라의 발언, 그리고 아우토빌에 보도된 내용을 종합하면, 세르지오 마르치오네 회장과 임원들 사이에 이견이 있었지만 결국 세르지오 마르치오네 회장은 SUV를 생산하는 쪽으로 결론을 내린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마라넬로 페라리 공장 전경 / 사진=페라리
오랜 팬들과 오너들의 불만
페라리 전통적인 팬들은 SUV 출시 소식이 나오자 반발했습니다. 7월에 오너들이 모인 커뮤니티에서는 부정적 의견들이 주를 이뤘습니다. 어떤 회원은 모데나(페라리 공장과 본사가 있는 마라넬로 인근에 위치한 도시)에서 페라리 SUV가 테스트 중이라는 이태리 친구의 발언을 소개하며 '미스터 풀오버(스웨터 즐겨 입는 세르지오 마르치오네 회장을 빗대어 부름)는 좋은 이코노미스트이지만 브랜드를 파괴할 것이다'라고 했고, 또 다른 회원은 잔니 아녤리(피아트 그룹 전 회장)가 살아 있었다면 스웨터(세르지오 마르치오네)는 여전히 캐나다에서 콩이나 세고 있었을 거다.'라고 적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콩을 센다는 것은 기업 경영을 재무적인 관점에서만 바라보는 사람(빈카운터)을 빗댄 표현인데요. 뉴욕 증시에 상장된 후 주주들의 이익을 챙겨야 하는 최고 경영자 입장에서는 재정적 이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이윤을 내지 않고서는 페라리 브랜드를 계속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했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결국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SUV를 만들 일 없다고까지 했던 그의 마음을 되돌린 이유는 아니었을까요?
페라리 박물관 / 사진=페라리
줄줄이 대기 중인 럭셔리 SUV들
엔초 페라리가 살아 있었다면...?
참고로 페라리 측에서는 SUV라는 표현 대신 FUV (Ferrari Utility Vehicle)라는 표현을 쓸 것이라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마치 롤스로이스가 컬리넌을 준비하며 SUV가 아니라 하이 사이디드 비클(High Sided Vehicle)이라고 부를 것이라고 한 것과 비슷한 맥락으로 보입니다. 무엇이 되었든, 정확한 실체는 내년 봄 페라리가 코드네임 F16X에 대해 구체적인 설명이 있을 예정이라고 하니 조금만 기다리면 논란은 끝을 맺게 될 것으로 보입니다.
2016년 벤틀리 벤테이가와 마세라티 르반떼가 등장하며 시작된 럭셔리 SUV의 등장했죠. 그리고 2018년 봄에는 람보르기니의 우루스가, 또 2018년 말에는 롤스로이스 컬리넌이, 다시 벤테이가는 쿠페형 모델을 내년 말쯤, 다임러는 2019년에 마이바흐 SUV를, 애스턴 마틴도 DBX로 불리는 SUV를 2019년에 내놓을 예정입니다. 그리고 보도된 대로라면 가장 비싼 (30만 유로 이상) SUV가 2021년 페라리 마크를 달고 시장에 등장하게 됩니다.
전통을 유지하겠다는 오래되고 두터운 페라리의 다짐조차 무색하게 만들 만큼 현재 SUV 시장은 제조사들에게는 생존을 위한 필수카드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창업자인 엔초 페라리가 만약 살아 있었다면 그는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요? 전통을 고수하는 쪽을 선택했을까요 아니면 생존을 위한 카드에 손을 내밀었을까요? SUV 바람이, 정말 무섭게 몰아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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