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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자동차 세상/독일의 자동차 문화 엿보기

어느 노 정치인이 남긴 낡은 자동차

금요일 저녁 집으로 배달되어 오는 자동차 잡지를 펴는 순간부터 제겐 기분 좋은 주말이 시작됩니다. 오늘은 어떤 신차 소식이 실렸을까, 또 비교테스트는 어떤 차들이 펼쳤고 어떤 평가를 받았을까, 그리고 한 주 동안 이슈들은 뭐였나 등등. 자동차의 나라 독일에서 자동차는 산업 그 이상의, 하나의 대중적인 문화로 오래 전부터 자리잡았고, 그래서 그 문화를 공유하고 배우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난 주 손에 쥐어진 잡지 안에는 이들의 자동차 문화 또 다른 면을 느낄 수 있는 기획 기사 한편이 담겨 있더군요. 11월 10일, 9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독일 전 총리 헬무트 슈미트의 자동차와 관련한 이야기였습니다.


사진=위키피디아


독일인 모두가 사랑했던 정치인

1918년 북독일 함부르크에서 태어난 헬무트 슈미트는 아버지가 유대인 은행가의 사생아였다는 사실을 알고 오랜 세월 그 사실을 숨겨왔습니다. 그리고 나치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성장합니다. 20세 때 2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징집되게 되는데 전쟁 후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경제와 정치를 함께 공부하며 사민당에 가입, 1953년에 처음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되게 됩니다. 또 이후에는 함부르크 시의원으로도 활동하는데 그 때 위기관리능력을 인정받게 됩니다. 이 때부터 그에겐 위기관리인이라는 수사가 따라다니게 됩니다.


동방정책으로 유명한 빌리 브란트 전 총리가 자신의 비서관이 동독 간첩협의를 받게 되자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임하게 되는데요. 결국 1974년 헬무트 슈미트는 빌리 브란트를 이어 제 5대 독일연방(당시 서독) 총리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자신이 몸담고 있던 정당에 대한 이념 공세와 국제 경제의 불안, 거기에 극단적인 테러 등, 여러 어려움이 있었지만 잘 이겨내고 1980년 재선에 성공합니다. 하지만 재정 어려움이 그의 발목을 잡게 되고, 부자증세를 시도하려던 그에게 친기업 성향의 자유민주당이 거세게 반발, 결국 두 정당의 연정은 무너지게 됩니다. 이 사태 등으로 헬무트 슈미트에 대한 불신임안이 통과되며 그는 1982년 총리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죠.


1982년 사민당 행사 참석 당시 / 사진=위키피디아, Hoffmann, Harald


그의 마지막 자동차 카데트

이후 언론사 공동발행인으로, 그리고 런던심포니오케스트라와 피아노 협주곡으로 공연을 하고 음반을 내는 등 훌륭한 음악인으로 살던 그는 지금의 유럽연합의 초석을 다진 인물로 유럽에서 평가받고 있습니다.  2005년 독일 저명인사들 선호도 조사에서는 96%의 지지를 얻어 최고의 독일인으로 뽑혔고, 또 다른 여론조사에서는 현존하는 가장 현명한 독일인으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메르켈 총리는 슈미트 전 총리를 일컬어 '그 자체가 독일 정치구조였다'고 했고, 슈타인마이어 외무부 장관은 '독일인의 아버지상' '독일의 멘토'라고까지 했습니다. 한 정치인이 이념과 정당을 뛰어넘어 모든 독일인들에게 이처럼 존경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합리성, 그리고 좌우 모두를 아우를 수 있었던 보편적 정치여정 때문이라 분석되는데요.


고향 교회에서 장례식을 치르고 공동묘지에 안장된 헬무트 슈미트 전 총리는 생활 면에서도 소탈한 편이었습니다. 그는 첫 차로 오펠을 선택했는데 은행 대출을 받아 구입했고 이후로도 자신이 직접 구입한 차들은 모두 서민들이 주로 애용하던 오펠의 것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거의 알려진 바 없는 그의 마지막 자동차 역시 오펠이었습니다. 


아우토빌트의 관련 기사 /PDF 캡쳐

헬무트 슈미트의 마지막 차가 오펠이었다는 것은 앞서 소개해드린 자동차 잡지 아우토빌트에 의해 대중에게 알려졌는데요. 이 잡지는 그의 검정색 1991년식 오펠 카데트 GSI를 직접 몰고 그가 살 던 집에서부터 총리로 재직하며 활동하던 본까지 달리며 추억을 되짚었습니다. 재미 있는 것은 헬무트 슈미트 총리가 이 차를 구입했을 당시 나이가 이미 70을 넘긴 시점이었다는 건데요. 왜 그가 전통적으로 선호하던 세단이 아닌, 당시 젊은이들이 주로 타던 스포티한 해치백을 선택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오펠 카데트 GSI / 사진=오펠


대우 르망 바로 그 모델

특히 이 차가 제게 더 반갑게 다가왔던 건 1980년대 후반 우리나라에 소개돼 많은 판매가 이뤄진 대우 르망과 같은 차였기 때문입니다. 오펠이 개발을 맡았고 북미에서는 폰티악에서 판매를, 한국에서는 대우자동차에서 판매가 각각 이뤄졌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엔진이 다운사이징 되어 들어왔지만 독일에서는 1.6과 2.0 엔진이 들어갔고 115마력에 1톤이 채 안되는 무게에 하체가 비교적 튼튼해 아우토반에서 고속으로 달리는 데에도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르망 레이서 / 사진=favcars.com

총리 재임 기간에는 국가에서 제공하는 벤츠 등을 탔지만 그 외에는 늘 비싸지 않은 평범한 오펠 차들을 탔던 헬무트 슈미트. 그런데 그의 마지막 해치백은 잡지사가 어떻게 알고 섭외를 할 수 있었던 걸까요? 이 차는 현재 오펠 클래식카 부서가 보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헬무트 슈미트 총리 이후 이 차의 소유자는 오펠인 것이고, 오펠은 자신들의 차를 애용했던 그를 기리는 의미에서 앞으로도 잘 관리를 해나갈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한 명의 정치인이 살아서는 물론 사후에도 국민들로부터 존경받을 수 있다는 건 분명 그 개인에게도 행복한 일일 겁니다. 또 그가 생전에 애용했던 자동차를 구입해 잘 보관하고 있는 오펠의 대응 또한 멋지게 와 닿았습니다. 낡은 자동차 한 대를 통해 정치인을 기념하는 모습, 언젠간 우리에게도 그런 날이 오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