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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자동차 세상/Auto 이야기

욕망이란 이름의, 자동차


더딴지에 기고했던 글입니다.

자동차를 욕망의 대상으로 읽어 봤어요.

4가지 틀에서 본 자동차 이야기, 

함께 하시죠.



자동차만큼 욕망으로 똘똘 뭉친 물건이 또 있을까? 스마트폰? 텔레비전? 그것들은 그 속에 담긴 컨텐츠에 의해 우리의 욕망을 꿈틀대게 하지만 자동차는 그 자체로 컨텐츠이며 쾌락과 욕망의 목적이 된다.


5공화국이 들어선 1980년대 우민화 전략을 꼽아 보자면 역시 3S (스포츠, 스크린, 섹스) 정책일 것이다. 프로 스포츠와 올림픽, 그리고 활성화 되는 영화산업, 거기에 불타는 밤 문화의 상륙까지.   


하지만 자동차를 향한 사람들의 욕망을 읽고 그것을 통해 권력을 다지는 정책을 만들었던 히틀러는 어쩌면 5공 권력자 보다 더 효과적인 우민화 정책을 자동차를 통해 실현하려고 했었는지도 모른다.


자동차는 그만큼 달콤하고 강렬하며, 욕망을 지속 가능케 하는 힘을 갖고 있다. 정말 그럴까? 지금부터 4가지 ‘S’를 통해 자동차의 뜨거운 속살을 들여다 보도록 하자. 




첫 번째 S… 

SPEED


최초의 자동차로 알고 있는 칼 벤츠의 삼륜차는 발명 당시 연료통이 없었다. 급한 대로 벤츠의 큰아들 오이겐이 가솔린이 담긴 통을 들고 아버지 차의 뒤를 계속 뛰면서 쫓아야 했다. 이 얘기인즉슨 사람이 조깅하듯 뛰어도 쫓을 만큼 속도가 느렸다는 뜻이다. 하지만 자동차는 끝없는 속도에 대한 인간의 욕망을 등에 업고 하루게 다르게 빨라져 갔다. 


자동차의 등장으로 당시 마차와 함께 대세를 이루고 있던 자전거는 속도에서 당장 위협을 받는 처지가 됐다. 사람들은 자동차와 자전거의 속도 대결을 원했고 결국 초기 자동차 문화의 본진이랄 수 있는 프랑스에서 1890년대 말 자전거와 자동차의 대결이 공개적으로 이뤄졌다.


1km의 거리를 달린 속도를 평균냈더니 자전거가 약 55km/h였고 자동차는 60km/h를 넘겼다. 점점 사람들은 자동차가 기차보다 더 빨리 달릴 수 있게 될 것이라는 기대감에 찼다. 그리고 이런 바람은 벤츠의 자동차가 등장하고 25년 만에 현실이 되었다.


이처럼 급격하게 속도를 끌어 올릴 수 있던 요인 중 하나는 치열한 경쟁에 있었다. 내연기관을 달고 나온 자동차와 이미 그 전부터 존재했던 전기자동차, 그리고 증기자동차의 속도 경쟁은 1899년 자메 콩탕트라는 희한하게 생긴 전기차가  처음으로 시속 100km/h의 기록(105.882km/h)을 돌파하며 본격화 됐다. 자메 콩탕트의 기록이 세워진 3년 후, 증기자동차는 시속 120km/h를 돌파하며 더 빠른 차가 자신임을 증명했다.


하지만 가솔린 자동차 역시 가만 있지 않았다. 같은 해인 1902년 모르스 ‘Z’로 불리는 내연기관 자동차는 124.138km/h의 속도로 증기차의 기록을 단숨에 갈아치웠다. 그리고 자동차로서는 처음으로 아무도 이루지 못한 시속 200km/h의 벽을 깨는 역사적 사건이 발생한다.


1909년 번개 벤츠로 불린 '블릿첸 벤츠'가 시속 202.648km/h의 최고 속도를 냄으로써 역사 한 페이지에 당당히 이름을 남기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 기록도 오래가지 못했다. 다음 해에 미국에서 다시 시속 211km/h의 최고 속도를 기록한 자동차가 출현하였고, 이 때 비로소 기차의 최고 속도를 넘어서게 되었다. 


번개돌이 블릿첸 벤츠의 경주 모습. 


이처럼 자동차는 태어남과 동시에 숙명처럼 속도와의 싸움을 펼쳤다. 가솔린 자동차가 전기차나 증기차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도 보다 멀리 보다 빨리 달릴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특히 거칠고 위험한 내연기관 자동차는 사람들에게 도전과 정복의 대상이 되었다. 


야생마 같은 자동차에 대한 정복 욕구는 점점 커져 갔고 굉음을 내며 달리는 괴물이라는 따가운 시선의 대상에서 자동차는 어느 새 동경의 대상으로 바뀌어갔다. 이제 사람들은 시속 1600km/h의 벽을 깨는 도전을 감행 중이다. 연료통을 든 어린 아이의 뜀박질도 못 따돌렸던 자동차가 비행기처럼 빠르게 달려가게 된 것이다. 




두 번째 S… 

SPORT


속도를 높여가면 갈수록 사람들은 자동차들끼리 싸움을 붙이고 싶어했다. 누가 만든 어떤 차가 과연 더 빠를 것인가? 바람을 가르며 달리는 차들을 구경하기 위해 사람들은 몰렸고, 결국 이런 속도 경쟁은 자동차 경주라는 하나의 스포츠로 규격화 됐다.


자동차 경주를 대중화시킨 나라는 프랑스였다. 1894년 프랑스 일간지가 안전과 연비를 체크한다는 명분과 함께 상금을 걸고 파리에서 루앙까지 약 127km의 거리를 경쟁하게 한 것이 시작이다. 하지만 1895년 파리-보르도의 1,178km 구간을 달린 경기를 실질적인 최초의 자동차 경주로 보고 있다. 1900년이 되며 자동차 경주는 국제 대회로 규모가 커졌으며 1950년에 이르러 그 유명한 포뮬러 원 (F1)이 시작되면서 자동차 경주는 전 세계인의 보편적 스포츠로 사랑받게 되었다.


 

포뮬러 원은 매년 400만 명 이상의 관객과 20억 명 이상의 시청자들을 불러 모으는 세계 최고의 스포츠로 자리잡게 되는데, 최고속도 320km/h까지 내달리는 머신들이 내는 굉음은 침전돼 있던 아드레날린을 폭발시키는데 가장 강력한 촉매가 되어 주었다.


하지만 자동차 경주를 모든 사람이 반겼던 것은 아니다. 대체로 자동차를 몰던 이들은 귀족과 사업가 등의 부자들이었다. 이들이 모여 만든 자동차 클럽은 사교클럽의 역할을 했고, 이들의 주도 하에 열린 자동차 경주는 시내는 물론 농민들의 생명과 같은 경작지까지 밀고 들어가 망치기 일쑤였다.


이런 경주차들에 대항해 일부 농민들은 돌멩이를 던지며 저항했고 경주로를 물리적으로 차단해버리기도 했다. 이처럼 자동차는 헨리 포드가 만든 T 모델이 나오기 전까지 계급을 나누는 상징성이 강했다. 자동차 경주를 경기장으로 한정해 실시할 때에도 사고는 여전히 발생했다. 관람객들이 다치는 것은 물론 운전자들끼리의 충돌 사고로 생명을 잃는 일이 흔했다. 


이렇게 끝없이 사람들이 다치고 죽어 나가도 자동차 메이커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동차 경주에 매달렸다. 경주에서의 우승만큼 훌륭한 광고는 없었기 때문이다. 한 번 우승을 하고 나면 매출이 뛰었고 후원자들이 알아서 찾아들 왔다. 


또 자신이 후원하는 메이커의 우승을 위해 부자들은 돈을 아끼지 않았고 세계 곳곳에서 최고의 드라이버라 불리던 사람들이 흙먼지 날리는 트랙에서 목숨을 담보로 기록에 도전했다. 모든 것이 자동차는 욕망 그 자체였다. 그리고 이는 지금까지도 유효하다.


F1에 참여한 자동차 팀들은 수백 수천 억 원의 자금을 쏟아 붓는 쩐의 전쟁에 나서고 있으며 수십 억의 방송 중계권료와 개최 비용을 내겠다는 나라들이 F1 사무국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이런 현상은 탄탄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한 메이커들이 다양한 자동차 대회를 후원, 혹은 참여 하며 1년 내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숨쉴 틈 없이 자동차들은 달리고 또 달리며 속도 경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철저히 상업화 된 수 많은 자동차 경주의 본질은 결국 속도와의 싸움이다. 스타 드라이버가 배출되고 자동차와 관련한 첨단 기술이 발휘되는 모든 과정과 결과의 중심엔 SPEED가 있다. 그리고 이 본질은 그 어떤 자동차 경주에서도 예외가 없다. 더 느리게 달리는 레이스라는 게 상상이 되는가?


자동차 경주에서 배려와 양보란 없다. 오로지 승리만이 목표이며 더 빨리 달리는 것만이 중요할 뿐이다. 귀마개를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머신들의 굉음에 사람들은 짜릿함을 느끼고 세계 최고 레이서들이 펼치는 드라이빙에 매료돼 얼마짜리의 티켓이라도 상관치 않고 경기장으로 달려간다. 이만큼 자본과 인간의 욕구가 진하게 뒤엉켜 있는 스포츠카 또 어디 있을까?





세 번째 S…

STYLE


처음 등장한 자동차는 동력원이 들어갈 자리, 사람이 앉을 자리, 바퀴의 자리 등으로 간단하게 구분되었다. 차를 어떻게 예쁘게 만드냐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던 시기였으며 당시 자동차에 있어 중요한 미덕은 속도뿐이었다. 


그렇게 휑하던 자동차의 디자인은 점점 사람들의 요구에 부응해 화려해졌다. 1900년 초에 차에 지붕이 덮였고 뒷문이 달렸다. 1910년대에 다시 운전석에도 문이 달리기 시작했고 1920년대에 이르러서 차는 완전히 밀폐된 공간으로 재창조되었다. 자동차 메이커들은 자신들의 가치를 화려한 엠블럼 등으로 표시하기 시작했다.


특히 1920년대 미국은 대공황이 오기 전까지 화려함 즐거움 그 자체였고 자동차들 또한  시대의 분위기를 입기 시작했다. 이런 화려함에 불을 지른 건 알프레드 슬론 GM 회장이었다. 처음으로 GM에 디자인 부서가 생기며 자동차 스타일에 미학적 접근이 시도된 것이다. 슬론주의로 대표되는 당시 GM은 차종 간 색상을 달리하거나 차량 모델 체인지의 기간을 최소화하기 위해 많은 신 모델들을 쏟아냈다. 


화려한 쾌락주의가 대세를 이룬 당시 미국에서 자동차는 이제 좀 질린다 싶으면 바로 바꿀 수 있는 유행의 물건이 되었다. 이를 위해 신용카드 제도가 생겨났고 렌터카 업체가 등장했고 곳곳에 대리점이 생겨나 언제든 편하게 차를 구매할 수 있게 됐다. 예쁜 자동차는 보는 욕구를 만족시켰으며, 이 욕구는 다시 구매욕을 만들어냈다.


1930년대 들어서면 자동차들은 더욱 화려해졌다. 판금 기술이 발달하면서 자동차 차체는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는 다양한 모양을 하게 되었고, 이런 기술 덕분에 1950, 60년대 자동차는 화려한 색상과 다양하고 과도한 디자인으로 다시 한 번 소비자들의 시각을 자극해 댔다. 이런 화려한 스타일은 1970년대 두 번의 오일 쇼크를 통해 사라지며 현실적인 방향으로 바뀌게 된다.


 

디자이너 랄프 로렌이 가지고 있는 부가티 타입57. 프랑스 에토레 부가티의 작품으로 30년대 자동차의 특징 중 하나인 과장된 휀더가 인상적이다. 경매에서 수백 억에 팔리는 희귀 차종.


프랑스에 부가티, 영국에 롤스 로이스가 있다면 미국엔 듀센버그가 있다. 당대 최고의 헐리웃 배우들 클라크 케이블, 개리 쿠퍼 등이 소유했고 스페인 루마니아 왕 등이 탐했던 메이커다. 



화려함으로 60년대까지 이어져 오던 자동차 디자인은 70년대 들어서며 맞이한 오일 쇼크 한방으로 이렇게 작고 실용적인 디자인으로 바뀌게 된다.



이처럼 시대 상황에 따라 바뀌어 가긴 했어도 여전히 스타일은  자동차 구매의 가장 중요한 요소다. 아무리 성능이 좋아도 못 생긴 차는 소비자의 간택을 받기 쉽지 않다. 다른 경쟁 메이커들 보다 더 나은 디자인으로 소비자의 시선을 끌어오기 위해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디자이너들을 경쟁적으로 메이커들은 영입한다. 


자동차 디자이너는 가장 핫한 직업이자 대우받는 직업이 되었다. 모 자동차 디자이너는 핸드폰이나 다른 제품 디자이너들과 자신들을 같은 선상에 놓는 것이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최고 디자이너의 지위에 오르는 순간 부와 명예 그리고 자동차 권력의 일부분까지 쟁취하게 된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예쁘고 멋진 차를 바라는 사람들의 욕망은 많은 이들이 자동차 디자이너를 꿈꾸게 하는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


BMW와 같은 자동차 회사는 디자인에 맞춰 기능을 개발한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한다. 기능에 맞춘 디자인이 아니라 디자인이 우선이라는 것. 그만큼 스타일은 자동차에 있어 중요해졌고, ‘멋진 디자인의 자동차가 빠르게 달리는’은 이제 따로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잘생긴 녀석이 공부까지 잘하고 성격까지 좋기를 바라는 것은 쉽지 않지만 자동차는, 이게 가능한 것이다.




마지막 S…


영화 타이타닉에서 주인공들은 1906년산 르노 차량 안에서 뜨거운 사랑을 나누고, 위대한 개츠비는 롤스 로이스를 타며 자동차에 대한 환상을 부채질했다. 화려한 소비와 재즈의 시대인 1920년대는 자동차가 단순한 이동수단으로서만이 아닌 성욕의 해방구로 거듭나는 결정적 시기였다. 20년대 중반부터 차량이 밀폐된 공간으로 주된 구조가 바뀌며 더 이상 차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남을 의식하지 않아도 됐다.


1922년 미국의 한 자동차회사가 내놓은 ‘주잇’이라는 모델은 이런 분위기를 가장 잘 보여준다. 고정식 의자를 눕힐 수 있게끔 해줘 차 안에서 사람이 누울 수 있게 한 것이다. 5년 동안 4만 대가 팔려나갔고 주잇에서 힌트를 얻은 경쟁 업체들도 좌석이 눕는 기능을 속속 도입했다.


 

앞좌석이 눕혀지는 혁신(?)을 일으킨 주잇


의자를 눕힐 수 있게 되자 차는 더 이상 단순히 이동의 수단으로만 사용되지 않았다. 동네 어귀에서 남몰래 사랑을 나누는 연인, 혹은 불륜 상대들은 이제 침대 기능이 되는 자동차를 이끌고 동네 밖 먼 곳으로까지 달려갔다. 포장도로가 생기고 장거리 주행이 가능해지면서 당일로 혹은 1박 2일 코스의 섹스 여행을 떠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런 분위기는 모텔이 생기면서 완전한 공급체계(?)를 이루게 된다. 자동차를 뜻하는 Motor와 Hotel의 합성어인 모텔은 장거리 여행객들 뿐 아니라 은밀한 사랑을 나누고픈 이들에게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곳이 되어주었다. 


미국의 젊은이들은 이제 주말에 친구들과 모여 자동차를 타고 돌아다니는 게 가장 큰 즐거움이 되었다. 오래 전부터 지켜봐 온 여자에게 같이 드라이브 가자는 제안을 하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일을 했고 그렇게 해서 모은 돈을 모두 자동차에 털어 넣었다. 


추운 겨울에도 견디라고 히터가 개발되었고, 라디오를 달아 지루함을 달랬다. 급기야 자동차 밖으로 나오지 않고도 영화를 볼 수 있는 드라이브인 극장이 곳곳에 생기면서 데이트의 형태는 자동차 중심으로 완전히 바뀌게 된다. 주말 저녁 자동차를 몰고 드라이브인 극장으로 간 연인은 큰 스크린 앞에서 자신들만의 사랑을 나누는 것에 주저함이 없었다.


당연히 자동차 극장은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된다. 가족 단위로 이곳을 찾는 이들도 많았지만 많은 젊은이들은 사랑을 나누는 장소로 자동차 극장을 적극 활용했다. 더 나아가 자동차는 주거가 가능한 형태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캠핑카가 등장한 것이다. 가족 단위의 레저 문화에 큰 변화를 가져온 캠핑카는 가족 뿐 아니라 연인들에게도 동경의 대상이었다.


비싼 캠핑카를 구입하기 어려운 이들을 위해 대여가 가능해졌다. 이제 남의 건물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장소, 내가 원하는 때에 아무렇지 않게 남녀가 차 안에서 사랑을 나눌 수 있게 된 것이다. 설마 ”오빠 믿지? 손만 잡고 달릴게” 라는 얘기를 믿는 사람은 없겠지?


당신의 중고등학생 시절을 기억하는가? 버스 차창 저편으로 보이는 자동차 안 젊은 누나의 드러난 허벅지를 곁눈질하던 그 시기. 남녀가 기어봉 위에 손을 포갠 채 끈적한 움직임을 나누는 모습을 보며 침을 삼키던 그 시기.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는 여드름 소년들에게 자동차는 어쩌면 욕구의 해방구로 가장 먼저 가슴에 각인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ing


욕망의 대상으로서 자동차는 120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 본질은 결코 달라지지 않았다. 형태와 기능의 변화는 무수하게 있어 왔지만 스피드에 대한 욕구, 모터 스포츠를 통해 얻는 카타르시스, 예쁜 자동차를 소유하고픈 욕망, 그리고 사랑을 나누는 도구로 건재함을 자동차는 계속해서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더 추가하자면, 자동차는 신분을 과시하거나 자신의 성공을 효과적으로드러내고픈 이들의 욕구를 또한 반영한다. 오래 전 대중화 되었지만 그 안에서 다시 자동차는 계급과 자본의 거울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뜯어 봐도 자동차는 욕망의 덩어리가 맞다. 그리고 그 욕망의 에너지는 여전히 식지 않고 있다. 때론 기계공학의 결정체로, 때론 본능 해소를 위한 도구로. 자동차의 문화적 담론은 이렇듯 욕망을 떼 놓고는 불가능하다. 그 논의가 불쾌하든 아니든.


지금 우리에게, 아니 당신에게 자동차는 어떤 욕망을 부채질하고 있나. 그리고 당신은 자동차를 통해 어떤 욕망을 해소시키고 있는가. 욕망의 또 다른 이름을 한 채 자동차는 그렇게 지금도 달려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