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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자동차 세상/Auto 이야기

사진과 함께 하는 마이바흐 탄생에서 지금까지


독일 럭셔리 자동차의 대명사 마이바흐( Maybach )가 이제 2013년을 끝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왜 2013년이냐구요? 아직 선주문된 115대의 모델이 만들어져야 하기 때문이죠. 물론 그 때 새로운 S클래스의 최상위 모델도 함께 공개가 될 것입니다. 어쨌거나 산전수전을 다 겪고 험난세파 속에서 어렵게 이어져온 그들의 역사가 이렇게 끝을 보게 돼 참 아쉬운데요. 또 다른 필요성으로 되살아날지는 모르겠지만 현재로선 쉽지않아 보이네요.

독일에서도 이런 결정에 아쉬움의 목소리가 큰데요. 경쟁모델들인 롤스 로이스나 벤틀리에 비해 판매에서 저조했던 마이바흐를 다임러 입장에서는 계속 끌고 가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특히 2020년까지 오버클래스급에서 선도적인 지위를 차지하겠다는 그룹 차원의 목표는 이런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게 했습니다. S클래스와 마이바흐간의 넓었던 간극을 S클래스를 더 넓히는 것으로 결정을 내린 것이죠.

어쨌든 이 럭셔리 브랜드가 사라지는 것을 아쉬워하며 오늘은, 마이바흐의 시작부터 지금까지의 이야기와 그들이 만들어낸 대표적 모델들을 함께 묶어 소개할까 합니다. 사진은 다임러가 제공한 것이고, 마이바흐 역사 이야기는 제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지식과 정보를 동원해봤습니다. 처음 듣는 얘기도 있을 것이고, 이미 알고 있는 얘기도 있을 겁니다. 정성껏 모아봤으니 편안하게 읽어보시기 바랄게요.


왼쪽에 있는 사람이 빌헬름 마이바흐(Wilhelm Maybach, 1846-1929)이고 오른쪽이 그의 첫 째 아들인 칼 마이바흐 (Karl Maybach, 1879-1960)입니다. 이 두 사람이 마이바흐라는 자동차 브랜드를 만든 장본인들이죠. 

아시다시피 아버지 빌헬름 마이바흐는 고트립 다임러와 다임러 자동차 회사를 세운 사람일 뿐만 아니라, 다임러가 자동차 역사에 길이 남을 이름이 되게 해준 최고의 은인이기도 합니다. 빌헬름 마이바흐는 엔진의 전문가였죠. 연로분사노즐이나 최초의 4기통 엔진을 만든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다임러와 빌헬름 마이바흐는 오래도록 함께 했고, 의리를 지켜온 영혼의 파트너였던 것이죠. 그런 마이바흐는 아들 칼 마이바흐가 서른 살이 되던 1909년 마이바흐 모토렌바우 유한회사를 설립하게 됩니다.


이게 마이바흐 자동차회사의 정문 사진입니다. 마이바흐 모토렌바우는 쉽게 말해, '마이바흐 엔진만드는 회사'라는 뜻입니다. 무슨 얘기냐?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마이바흐는 엔진 전문가였습니다. 그래서 자동차 뿐 아니라 기차나 항공기에 들어가는 엔진 등을 제작해 판매했죠. 그 안에 자동차 엔진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물론, 자동차도 만든다고 되어 있었지만 처음은 역시 엔진 중심이었다는 거...

특히, 사진 위쪽에 있는 열기구 같은 거 보이시죠? 바로 그 유명한 비행체 '제플린'입니다. 이 제플린과 관련된 얘기는 조금 후에 자연스럽게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마이바흐 공장 전경

공장은 독일 남부 보덴호 근처에 있는 프리드리히스하펜이란 곳에 세워지는데요. 이 곳은 독일과 스위스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국경이 호수 하나를 두고 모두 연결되어 있습니다. 지금은 대단히 유명한 관광지인데요. 매년 이 보덴호에서 자동차 튜닝쇼를 펼치고 있는 자동차의 고장이기도 합니다.

엔진에 정통했던 아버지의 피를 물려 받은 칼 마이바흐는 자동차 제조에 큰 뜻을 품고 1919년 메르세데스 섀시를 구입해 테스트 모델을 만들게 되고 그것이 위에 보이는 마이바흐 타입 W1입니다. 이 것이 마이바흐의 시작을 알리는 첫 결실이었던 것이죠.

이렇게 시작된 자동차제작의 길은 1921년부터 41년까지, 약 20년에 걸쳐 1750대의 다양한 마이바흐 모델을 내놓으며 전성기를 맞게 됩니다. 그 때 제조되었던 모델들 중 일부를 함께 보시죠.

1921년 사진으로, 타입 W3 모델들이 차체공장으로 가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모습

1924년에서 25년으로 추정되는 사진. 역시 W3 모델로, 주행 테스트 중 한 컷. 오른쪽에서 두 번째 남자가 칼 마이바흐

1928년에 만들어진 특별 모델 마이바흐 타입 W5 모델. 이디오피아 왕을 위해 제작됨

1929년에 만들어진 마이바흐 타입12 모델의 모습

이렇게 다양한 모델들을 열심히 생산하고 있던 마이바흐는 자신들의 회사가 유명해지게 되는 모델과 만나게 됩니다. 바로 제플린이죠!

제플린이란 이름이 붙은 제조명 DS8은 1930년부터 생산되기 시작해 마이바흐 최고의 히트작이 됩니다. 아시다시피 상당히 낮은 엔진 회전 영역대( 3,500rpm)에서 최고속도(170km/h)를 낼 정도의 멋진 자동차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제플린이란 이름이 앞서 한 번 등장했었죠? 제플린 비행체 말입니다. 이게 결코 그냥 사진에 들어간 게 아닙니다. 다 이유가 있죠. 자동차 이름에까지 제플린을 넣었다는 것은 우연히 아니란 것이죠. 여기서 사진 한 장 보시겠습니다.

이 사람의 이름은 '페르디난트 아돌프 하인리히 아우구스트 그라프 폰 제플린'입니다. 엄청 길죠? 짧게 하면 그라프 제플린이라고도 부릅니다. 바로 제플린 항공회사의 설립자입니다. 귀족으로 태어나 군인이자 과학자였고, 결국 비행선과의 인연으로 여러 회사들과 합작으로 제플린 에어쉽을 설립한 장본인입니다. 이 때 참여한 회사중에는 다임러도 있었고, 마이바흐 역시 이 비행선 엔진을 담당하게 됨으로써 그라프 제플린과 인연을 맺게 됩니다.

또 재밌는 것이, 그라프 폰 제플린이 태어난 콘스탄츠는 마이바흐 공장이 있는 프리드리히스하펜과 보덴호를 사이에 두고 있습니다. 배 타고 50분도 안 걸리는 이웃 도시인 거죠. 그라프 폰 제플린은 죽을 때까지 콘스탄츠 저택에서 살았다고 하는군요. 그래서 지금도 보덴호에서 가장 큰 도시인 콘스탄츠엔 제플린과 관련된 동상이나 비행선 박물관이 있습니다.

이래저래 마이바흐와 그라프 제플린과는 각별한 인연을 맺게 되었고, 마이바흐는 그를 기념하는 제플린이란 모델을 만들어내게 됐습니다. 이 히트모델 제플린 이 후에도 마이바흐는 계속 다양한 모델을 선보이게 되는데요. 제 2차 대전이 발발해 군수공장으로 편입이 되면서 그들의 성공의 질주는 멈추게 됩니다. 전쟁 후 다시금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1960년 칼 마이바흐가 죽게 되면서 회사는 더 이상 독립적으로 존립할 수 없게 되고 결국,  메르세데스 벤츠의 다임러로 편입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그렇게 긴 세월 잠겨 있던 마이바흐가 2002년 다임러에 의해 화려하게 부활하게 됩니다. 바로 마이바흐 57과 62 모델과 함께 말이죠.

마이바흐57

마이바흐62

이후 2005년과 2007년에 각각 57S와 62S가 라인업에 추가되는데요. 여기서 S는 스페셜이란 의미로 성능 뿐 아니라 고객들이 다양한 요구를 자동차에 반영하기 위해 태어난 모델들이었죠. 그런데 이런 양산형 모델 외에 마이바흐는 특별한 자동차도 내놓게 됩니다.

2005년에 딱 한 대만 만들어진 마이바흐 엑셀레로(Maybach Exelero)입니다. 마이바흐 57S가 베이스가 된 모델인데요. 독일 풀다타이어의 의뢰에 의해 만들어진 이 특별한 모델은 마이바흐와의 사연도 굉장히 깊습니다. 자세한 얘기는 위키피디아 같은 곳에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랄게요. 나중에 풀다는 이 자동차를 경매에 붙였고, 780만 달러라는 어머어마한 금액으로 팔리게 됩니다. 그 때 가격이 저 정도라면 마이바흐가 사라지는 2013년 이후부터는 부르는 게 값이 될 것으로 보이네요. 

이게 그 비운의 주인공인 제나텍 쿠페입니다. 왜 비운의 주인공이냐... 이 차의 오리지널 이름은 제나텍 쿠르세리오라고 하는데, 제나텍이라는 회사가 마이바흐를 만들게 되는데 그 첫 번째 모델이 이 제나텍 쿠르세리오 쿠페였습니다. 제나텍은 첫 모델의 주문을 100대 받았지만  단 두 대만을 고객에 넘겨주고 문을 닫게 됩니다. 경영악화였죠. 온전히 고객의 요구에 맞춰 하나하나를 제작하려했던 제나텍 쿠페의 야심은 그렇게 허망히 무너지게 되었고, 결국 그 두 대의 모델은 본의 아니게 희귀모델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고객의 맞춤 모델하면 특히 또 하나 잊을 수 없는 것이 있죠. 제나텍이 나오기 전 출시되었던 마이바흐 란돌레가 그 주인공입니다. 

Landaulet, 불어죠. 지붕이 벗겨지는 포장마차란 의미라고 하는데, 보시는 것처럼 포장마차와는 거리가 너무나 먼 초호화 럭셔리 모델로, 이 역시 고객의 주문이 있어야만 만들었던 모델이었습니다. 그냥 생산해서 판매한 것이 아니라 재고가 없는 주문제작 모델의 대표작 중 하나인 것이죠.

그러나 마이바흐에겐 2009년 제네바 모토쇼가 아마 가장 의미가 있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바로 마이바흐의 최고 히트모델인 제플린이 이 때 공개된 것입니다.

100대 한정판 모델인 제플린은 화려함의 정점에 있는 모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에도 3대가 들어와 팔린 것으로 아는데, 이 모델 역시 이제부터는 값을 따질 수 없을 것으로 보이네요. 이후 마이바흐는 중국시장을 특히 겨냥한 57, 62의 페이스리프트 모델을 내놓지만 역시 반응은 신통치 않았고, 아마도 이 때부터 다임러는 마이바흐의 미래에 대해 고민을 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올 프랑크푸르트모토쇼에 마이바흐는 특별한 모델 하나를 내놓게 되는데... 이 게 마이바흐의 마지막 모델이 될 줄, 누가 알았을까요?

이 모델이 바로 일종의 유작개념으로 봐야할 에디션125입니다. 자동차 탄생 125주년을 기념해 다임러가 만든 특별 모델로 딱 한 대만 만들어졌죠. 고트립 다임러와 빌헬름 마이바흐가 자동차를 세상에 내놓았을 때부터 시작된 자동차의 역사는 올 해로 125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빌헬름 마이바흐의 이름으로 함께 했던 자동차 브랜드 '마이바흐'는 아이러니하게도 125년을 기념하는 올 해에 공식적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마이바흐의 굴곡진 그러면서도 화려했던 역사는 이렇게 끝을 냅니다. 하지만 아직 115대의 자동차가 더 만들어져야 완전히 끝이 납니다. 어쩌면 주문이 더 밀릴지도 모르겠군요. 당연하겠죠. 이젠 기념되어질 이름이니 소장용으로 얼마나 가치있겠습니까...하지만 더 이상의 마이바흐를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아쉬움은 어쩔 수 없습니다. 이제 브랜드는 사라지지만, 빌헬름과 칼 마이바흐가 이룬 자동차 역사의 한 페이지는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저 역시 그들이 써내려간 역사를 찬찬히 마음에 담아두고자 합니다...

                      멋진 자동차의 퇴장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는 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