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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자동차 세상/Auto 이야기

이상할 정도로 안 알려진 최고의 자동차 디자이너

올해 봄이었습니다. 메르세데스가 지역의 클래식 자동차 복원 전문 회사 하나를 인수합니다. 그런데 이게 꽤 흥미로운 배경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지 지금까지 언론 등을 통해 계속 얘기되고 있습니다. 사건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2022년 독일의 클래식 자동차 매매 회사를 소유하고 있던 랄프 그리저라는 사람이 스위스에서 메르세데스 300 SL 로드스터 1대를 구입했습니다.

300 SL 쿠페 / 사진=메르세데스

그는 자신이 산 값비싼 클래식 모델을 독일에 등록하려고 자동차청에 갑니다. 그런데 동일한 섀시 번호를 가진 또 다른 300 SL이 이미 독일에 등록되어 있다는 믿기지 않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자기 차와 이미 등록된 모델 중 하나는 가짜였던 겁니다. 그는 두 명의 전문가에게 의뢰해 자신의 차가 진품임을 확인받습니다.

 

랄프 그리저는 그때부터 가짜 모델 찾기에 나섭니다. (참고로 요즘 300 SL은 경매에서 50억 원 전후에 거래됩니다.) 그리고 동일 섀시 번호 모델이 말레이시아에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그곳까지 전문가와 함께 날아간 랄프 그리저는 그 차가 가짜임을 확인합니다. 관련 소식이 독일 유력 전문지에 의해 공개됩니다. 그러면서 이 위조 사건에 독일 슈투트가르트의 유명 클래식 자동차 복원 전문 회사가 관여되어 있다는 의혹을 제기합니다.

 

독일 수사기관이 나서게 되는데요. 해당 회사를 압수수색하며 수사에 박차를 가했고, 현재까지 위조 가능성에 무게를 둔 채 조사가 진행 중입니다. 이 스캔들로 인해 해당 복원 업체의 모든 거래가 취소됩니다. 그렇지 않아도 팬데믹으로 큰 타격을 입었던 해당 복원 업체는 결국 버티지 못한 채 파산 신청을 합니다. 그리고 이때 메르세데스가 나서 그 복원 업체의 직원, 그리고 그곳에 있던 4~5만 개의 클래식 모델 부품과 복원을 위한 도구들을 사들입니다.

 

얘기는 여기까지 진행된 상태인데요. 이 사건으로 메르세데스는 포르쉐, 람보르기니, 페라리 오리지널이 포함된 귀한 부품들을 대량으로 확보할 수 있게 됐습니다. 또한 이 사건으로 메르세데스 300 SL이 또 한 번 관심을 받게 됩니다. 300 SL 모델은 굳이 대중의 관심을 받지 않더라도 클래식카 시장에서 매우 인기 있는 자동차입니다.

걸윙 도어 300 SL 쿠페 / 사진=메르세데스

1954년부터 1963년까지 생산된 고성능 스포츠카인 300 SL은 로드스터와 함께 걸윙 도어로 유명한 쿠페 모델 모두가 자동차 마니아들에겐 드림카라 할 수 있습니다. 6기통 엔진이 들어간 215 마력 출력을 자랑하는 이 차는 그 성능과 함께 뛰어난 디자인으로 유명합니다.

 

많은 경주 대회에서 우승을 하거나 좋은 결과를 보이면서 300 SL은 단숨에 전설적인 자동차가 됐죠. 특히 300 SLR 울렌하우트 쿠페 같은 특별한 변형 모델은 1800억 원이 넘는 가격에 거래가 되며 모두를 놀라게 하기도 했습니다. 차를 조금만 좋아하고, 클래식 자동차에 조금만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탐낼 만한 그런 게 300 SL입니다.

300 SL 로드스터 / 사진=메르세데스

그런데 이 인기 많고 특별한 가치의 300 SL을 누가 디자인했는지는 의외로 많은 사람이 모르고 있습니다. 300 SL은 프리드리히 가이거라는 디자이너의 작품입니다. 1907년 생인 프리드리이 가이거는 십대 때 농기구용 바퀴를 만드는 곳에서 견습생으로 사회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초창기 프리드리히 가이거 / 사진=메르세데스

그리고 자동차에 관심을 느낀 그는 공대에 진학해 자동차 엔지니어링을 배웁니다. 그랬던 그가 졸업 후 간 곳이 바로 메르세데스 본사가 있는 공장이었습니다. 엔지니어로 성장할 줄 알았던 프리드리히 가이거는 어떤 계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자동차 디자이너로 활약하게 되죠. 300 SL은 조용히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해온 이 남자의 대표작입니다.

 

하지만 프리드리히 가이거가 이 자동차 하나 디자인했다고 최고의 디자이너라고 불리는 건 아닙니다. 300 SL보다 정확히 20년 전, 메르세데스 벤츠는 당시 최고 수준의 럭셔리 모델 500K를 선보입니다. 직렬 8기통 엔진이 들어간 이 럭셔리 모델은 2도어, 4도어 세단, 쿠페, 카브리올레 등 여러 형태로 약 340대가 3년간 팔리게 되죠. 벤츠의 아름다운 디자인과 성능의 멋진 결합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초기 모델이었죠. 프리드리히 가이거가 자신의 책임하에 디자인한 첫 모델이기도 했습니다.

500K 스페셜 로드스터 / 사진=메르세데스

그리고 1936년 어쩌면 메르세데스 역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동차로 영원히 기억될지 모를 540K가 세상에 나옵니다. 2인승 카브리올레, 4인승 쿠페, 심지어 7인승 세단으로까지 다양한 형태로 시장에 나온 540K는 놀라운 스타일과 그 화려함으로 화제를 모았고 총 419대가 생산됩니다. 만약 전쟁이 나지 않았다면 더 많은 540K가 팔려나갔을 겁니다. 1940년까지 생산된 이 차 역시 프리드리히 가이거의 작품이었습니다.

지난해 페블비치 콩쿠르 델레강스에서 베스트 오브 쇼(최고작품상에 해당)에 선정된 540K의 완벽히 복원된 모습 / 사진=메르세데스

메르세데스 자동차 박물관에 가면 가장 많은 방문객의 시선을 받는 두 모델이 있습니다. 300 SL 540K. 그리고 그 두 모델은 모두 프리드리히 가이거의 손끝에서 나왔습니다. 2차 대전 이후 2년 정도 회사를 떠났던 그였지만 돌아오게 됐고, 1973년까지 일합니다. 그의 뒤를 이은 디자이너는 브루노 사코였는데 사실 대중적으로 알려진 브루노 사코보다 더 높게 평가되어야 할 디자이너가 프리드리히 가이거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는 은퇴 전 S-클래스 4세대 모델로 평가되는 W116(1972)을 디자인했습니다. W116 모델부터 메르세데스는 S-클래스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됐죠. 주행 안전성을 고려한 차체 디자인과 당시 기준에서 무척 모던했던 형태를 하고 있던 W116은 최초로 ABS가 장착된 모델이기도 했습니다.

4세대 S-클래스 (W116) / 사진=메르세데스

제가 놀란 건 메르세데스 540K 300 SL 그리고 S-클래스(W116)20년씩의 차이를 두고 나온 모델들인데 2~30년대의 아름다운 곡선형 디자인에서부터 50년대 스포츠카 디자인, 그리고 70년대 최고급 세단의 진중한 디자인까지 모두 한 명으로부터 디자인되었다는 겁니다.

 

세대를 달리하는 듯한 전혀 다른 감각의 자동차를 한 사람이 이처럼 훌륭하게 그려냈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런데 프리드리히 가이거가 이를 해낸 것입니다. 199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나서서 내가 300 SL 540K 등을 디자인했다고 떠벌리지 않았던 소박하고 조용한 사람이었습니다. 고향 회사에서 40년 넘게 평생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최고 디자인의 자동차를 탄생시켰지만 그는 조직의 일원으로 조용히 살았다고 합니다.

프리드리히 가이거 / 사진=메르세데스

그가 활동하던 시대가 지금처럼 SNS와 미디어가 발달했더라면 프리드리히 가이거는 엄청난 인기와 영향력을 발휘하는 자동차 디자이너가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자동차 디자인에 관심이 있다면, 그리고 클래식 자동차에 관심이 있다면 프리드리히 가이거라는 이름만큼은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