퀀텀스케이프QuantumScape라는 작은 회사가 독일 잘츠기터라는 곳에 2025년까지 배터리 공장을 세우고 제품을 생산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누구든 전기차에 대한 투자는 할 수 있는 것이고, 그에 따라 완성차 브랜드들이 자본력을 앞세워 배터리 공장을 유럽 곳곳에 (독일 포함) 짓고 있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습니다. 또한 퀀텀스케이프의 배터리 공장 건립 소식도 얼핏 보면 그리 특별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꿈의 전기차 배터리 눈앞
퀀텀스케이프는 2010년 만들어진, 미국 캘리포니아에 본사를 두고 있는 신생기업입니다. 스탠퍼드대학 교수와 학자 출신이 세운 곳이죠. 얼마 후 스탠퍼드대에서 분사한 이 작은 회사는 오로지 전고체 배터리, 그러니까 고체 배터리 개발을 위해 만들어진 곳입니다. 전고체 배터리라는 단어 많이 들어보셨을 겁니다.
현재 전기차 배터리는 액체 전해질을 사용합니다. 전고체 배터리는 이 액체가 고체로 대체된 것을 의미하는데요. 상당한 고난도 기술을 요구하는 전고체 배터리 등장은 전기차 역사의 큰 전환점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왜냐하면 이 고체 배터리는 현재 사용 중인 것보다 모든 면에서 압도적인 스펙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전기차를 불안하게 바라보는 몇 가지 요소가 있는데 그중에서도 배터리 화재 위험성은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전고체 배터리가 장착된다면 이 리스크는 거의 사라지게 됩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효율이 좋기 때문에 현재 배터리는 따라올 수 없는 주행거리를 보여줍니다. 한번 충전으로 최대 800km 이상의 거리까지 달리는 걸 상상할 수 있습니다.
충전 속도 또한 상당히 줄어드는데요. 현재 배터리로 1시간을 충전해야 한다면 전고체 배터리는 15분이면 충분합니다. 이렇게 되면 5분 이하로 배터리 완충이 가능해지는 날도 그려볼 수 있습니다. 또 시베리아나 알래스카처럼 굉장히 추운 곳에서도 거의 배터리 성능 저하 없이 전기차를 이용할 수 있습니다. 영하 30도에서도 버틸 수 있다고 하니 대단하죠? 전기차 배터리가 겨울 낮은 기온에 취약한데 이 약점 또한 사라지게 되는 겁니다.
배터리 크기도 줄일 수 있습니다. 무게에 대한 부담도 덜 수 있고, 공간 활용도 더 좋아질 겁니다. 물론 이는 전비에도 도움이 될 것이고요. 어떠십니까? 전기차 시장이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시장이 될 것 같지 않나요? 그러니 기술력깨나 있다는 국가와 기업 모두가 현재 전고체 배터리 개발에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전고체 배터리 개발에 가장 앞선 곳이라면 많은 이가 앞서 소개한 퀀텀스케이프를 꼽습니다. 그런데 왜 이들은 독일에 공장을 짓는 것일까요?
예상을 뛰어넘는 결과
퀀텀스케이프는 스탠퍼드 학자들이 중심돼 세워진 기업이라는 건 앞서 설명해 드렸습니다. 그리고 이 회사가 만들어지고 2년 후인 2012년 독일 자동차 회사 폴크스바겐이 이곳에 투자를 합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 또 중국의 상하이자동차 등도 투자 명단에 포함돼 있습니다. 꾼들이 뭔가 냄새를 맡은 겁니다.
개발까지는 엄청난 돈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공장을 짓고 시장에 물건을 내다 파는 일까지, 해야 할 게 많은데 퀀텀스케이프는 개발 인력들이 주를 이루는 개발 전문 기업입니다. 그래서 폴크스바겐의 합류는 퀀텀스케이프에게도 도움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퀀텀스케이프는 폴크스바겐과 단순한 자본 협력 관계를 넘어선 협력 구조를 만들었습니다. VW는 이 회사의 지분을 20%까지 확보했고, 전고체 배터리 기술에 대한 최초 접근 자격도 얻게 됩니다.
폴크스바겐은 투자 이후 어느 시점부터 자신들의 부품 공장 중 하나에서 퀀텀스케이프의 개발을 돕는 작업을 해왔습니다. 바로 2025년에 전고체 배터리 공장이 들어설 잘츠기터에 있는 공장입니다. VW이 얼마나 큰 그림을 12~3년 전부터 그려왔는지 알 수 있겠죠? 그렇다면 퀀텀스케이프의 전고체 배터리 개발은 어느 단계까지 왔을까요?
실제로 1월 3일 폴크스바겐 그룹은 보도자료를 통해 자회사인 PowerCo가 퀀텀스케이프의 전고체 배터리 첫 번째 내구성 테스트를 진행했음을 밝혔습니다. 거기서 얻은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는 게 그들의 얘기였습니다. 현재 테스트가 진행 중인 전고체 배터리는 95% 이상의 용량으로 1천 회 이상의 충전을 했다는 것이 보도자료의 핵심 내용이었습니다.
현재 유럽의 전비인 WLTP 기준으로 완충 후 500~600km를 달릴 수 있는 전기차가 이 배터리를 장착하면 누적 50만km까지 거의 배터리 성능 저하 없이 달릴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PowerCo CEO 프랑크 블로메는 “매우 고무적인 결과이며, 장거리 주행이 가능하고, 매우 빠르게 충전할 수 있으며, 실제로 늙지 않는 배터리 셀이 될 수 있습니다.”라고 테스트 결과에 대한 소감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업계의 전고체 배터리 표준 목표가 700회 충전 주기에 최대 20%의 용량 손실임을 고려한다면 기대하는 표준치를 크게 뛰어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또한 전고체 배터리 개발에 노력 중이죠. 하지만 빨라야 2027년 정도에 상용화를 예상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계획대로 잘 되었다는 전제 아래서 말이죠.
폴크스바겐, 뒷걸음질 치다 쥐 잡았나?
그렇다면 폴크스바겐은 어떻게 이런 작은 회사에 투자를 아끼지 않고 대주주 자격을 가질 수 있게 된 걸까요? 우연히? 자세한 배경은 알 수 없지만 익숙한 이름 하나가 뭔가를 짐작하게 합니다. 현재 퀀텀스케이프의 CEO는 창업자 중 한 명인 자그딥 싱입니다. 컴퓨터공학자로 알고 있습니다.
그와 함께 회사를 설립한 공동 창립자가 있는데 70대의 프리드리히 프린츠라는 나이 많은 교수입니다. 그리고 그의 제자 중에 ‘빈터코른’이라는 성을 가진 독일계 학생이 있었습니다. 빈터코른? 들어보지 않으셨나요? 폴크스바겐의 전 회장이자 디젤게이트를 일으킨 것으로 알려진 마르틴 빈터코른의 아들입니다.
아버지를 위해 아들이 다리를 놓기라도 한 건지 모르겠지만 슈피겔 보도에 따르면 마르틴 빈터코른과 프린츠 교수는 오래전부터 전고체 배터리 관련한 내용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등, 지속해서 교류해왔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마르틴 빈터코른 아들은 퀀텀스케이프의 연구원으로 입사를 해서 애플과 같은 기업의 스카우트 제의를 뿌리친 채 지금까지 이 회사에 몸담고 있습니다.
이런 내용을 보면 퀀텀스케이프는 폴크스바겐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 속에서 출발한 게 아니었나 추측하게 됩니다. 2020년까지 200명 수준의 직원들은 현재 6백 명 이상까지 늘었습니다. 2010년부터 지금까지 단 한 푼의 이익도 내지 못한, 또한 아직 완전한 상품도 내놓지 못한 그런 기업에 폴크스바겐은 든든한 뒷배경이 된 것인데요. 결국 그 10년 이상의 투자의 결실을 곧 볼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까 우연히 건진 월척이 아닌, 나름 처음부터 가능성을 보고 집요하게 관계를 맺고 계획을 짜왔던 것입니다.
퀀텀스케이프 CEO 자그딥 싱은 한국과 일본, 그리고 중국 등이 지배하고 있는 전기차 배터리 시장 주도권이 다시 서구권으로 넘어오게 될 것이라고 장담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중심은 자신들이라면서 말이죠. 그런데 폴크스바겐은 이게 끝이 아닙니다. 스웨덴의 배터리 제조 기업인 노스볼트 역시 폴크스바겐의 파트너사입니다.
테슬라 출신인 피터 칼손이 세운 이 회사는 리튬이온 배터리가 아닌 나트륨이온 배터리를 상용화하기 직전에 있습니다. 노스볼트는 중국 기업들이 장악하고 있는 배터리 재료로부터도 어느 정도 자유롭기 때문에 중국 의존도를 크게 떨어뜨릴 수 있습니다. EU가 가장 바라는 부분이기도 하죠. 이 회사는 관련 배터리로 이미 70조가 넘는 주문을 받았다는 보도가 나왔습니다.
이처럼 현재 리튬이온 배터리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전기차 시장이 새로운 대안으로 뜨고 있는 나트륨이온 배터리, 그리고 궁극의 꿈의 배터리로 불리는 전고체 배터리 개발 관련한 최고 기업 두 군데가 모두 폴크스바겐의 투자와 협력을 받고 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입니다. 디젤게이트를 이후 전기차 흐름에서도 뭔가 뒤처지고 있다고 느껴졌던 폴크스바겐. 과연 배터리 시장을 통해 게임체인저가 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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