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할 때 이곳 독일에서는 자동차가 매우 큰 역할을 합니다. 너무 비싼 가격 때문에 우리나라처럼 포장이사가 보편적이지 않고, 따라서 많은 이들이 트럭을 빌리거나 자신의 자동차를 이용 직접 짐을 나르곤 합니다. 설령 이삿짐 회사에 맡긴다 해도 포장 상자를 최대한 줄이는 게 비용을 절약하는 일인지라 자가용을 이용해 짐을 내다 버리거나 옮기고, 또 조립식 가구 등을 싣고 와 조립하는 게 일상입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차의 트렁크 공간, 혹은 실내 전체 공간의 활용 능력은 유럽인들이 차를 선택하는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뒷좌석 굳이 넓을 필요 없다. 그냥 앉아 갈 수 있을 정도면 된다. 하지만 짐싣는 능력 부족하면 용서가 안 된다는 얘기를 많은 독일인이 할 정도죠.
중형급 왜건이나 덩치 큰 SUV뿐만 아니라 C세그먼트 (준중형 콤팩트) 이하의 작은 차들도 이런 문화에 맞게 최대한 짐을 많이 실을 수 있도록 해치백이나 왜건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요. 특히 이 작은 차들 중 실용성의 최고 수준에 오른 차를 꼽으라 한다면 많은 이들이 주저하지 않고 피아트 판다를 이야기합니다.
판다 / 사진=피아트
수치엔 드러나지 않는 적재 능력
판다(Panda)는 우리로 치자면 경차(A세그먼트) 수준의 전장을 보이는데요. 말이 나왔으니 전장 (차의 길이), 그리고 짐을 실을 수 있는 최대 용량이 어느 수준인지 비교해 볼까요?
피아트 500 (전장 : 3.57미터, 최대 적재 용량 : 610리터)
포드 Ka (전장 : 3.62미터, 최대 적재 용량 : 710리터)
현대 i10 (전장 : 3.67미터, 최대 적재 용량 : 1,046리터)
기아 모닝 (전장 : 3.60미터 ,최대 적재 용량 : 870리터)
미쓰비시 스페이스 스타 (전장 : 3.80미터, 최대 적재 용량 : 912리터)
푸조 108 (전장 : 3.48미터, 최대 적재 용량 : 780리터)
르노 트윙고 (전장 : 3.60미터, 최대 적재 용량 : 980리터)
폴크스바겐 UP (전장 : 3.54미터, 최대 적재 용량 : 959리터)
피아트 판다 (전장 : 3.65미터, 최대 적재 용량 : 870리터)
차의 길이와 전체 적재 용량을 수치만 놓고 보면 판다(3세대)는 중간 수준에 불과하지만 이 차는 부피가 큰 물건을 싣기 편하다는 특별한 장점이 있습니다. 현대 i10과 피아트 판다 2세대 (전장 3.54미터)를 소유하고 있는 지인이 오래된 1인용 소파를 버리기 위해 이용한 차는 i10이 아닌 판다였는데, 이유는 수직 구조에 가까운 뒤쪽 설계 덕분이었습니다. 입구가 크고 바닥부터 차 지붕까지의 높이가 부피가 있는 물건을 싣기에 유리한 구조입니다.
판다 2세대 뒷모습 / 사진=피아트
3세대 판다 옆모습 / 사진=피아트
경차 급에 디젤 엔진
판다의 또 하나의 특징이라면 플랫폼을 공유하는 피아트 500과 함께 흔하지 않은 디젤 엔진을 장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는 현재 유럽에서 판매되고 있는 A세그먼트 모델들 중 디젤 엔진이 달린 유이한 모델이 아닌가 싶은데요. 그 덕에 큰 차이는 아니지만 가솔린 엔진이 장착된 경쟁자들에 비해 연비(공인연비 기준)에서 이익을 볼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사륜구동
피아트 판다가 특별한 이유는 바로 A세그먼트에서는 유일한 사륜구동 모델이 있기 때문입니다. 6단 수동 변속기와의 멋진 조합으로 오프로드는 물론 온로드에서 판다 4X4 모델은 훌륭한 능력을 보여줍니다. 4백만 대의 판매량을 보인 1세대 판다 (1980~2003년)에는 1983년 출시된 사륜 모델 4X4도 포함돼 있었고, 이 작은 사륜 차량에 대한 관심은 대단했습니다. 일반 판다보다 지상고를 높여 일각에서는 SUV 등으로 분류를 하기도 합니다. 사륜 모델 출시 이후 다카르 랠리에 참여하는 등 오프로더로서의 전통을 지금까지 멋지게 이어가고 있습니다.
1세대 판다 4X4 / 사진=피아트
다카르랠리에 참여 중인 판다 크로스 / 사진=피아트
전기차, 판다 엘레트라
판다는 GM과 더불어 가장 시장에 빨리 대중적 순수 전기차를 내놓은 브랜드일 겁니다. 1990년 판다 엘레트라라는 이름으로 순수 전기차를 선보였는데요. 납과 산으로 만든 배터리를 장착했으며 최대 주행거리는 120km라고 광고되기도 했지만 너무나 무거운 무게 탓에 도심에서 최대 70km 정도의 거리를 달릴 수 있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약 3년에 걸쳐 주로 이탈리아 내에서 판매가 이뤄졌습니다.
판다 엘레트라 / 사진=피아트
골라 타는 즐거움, 파생 모델들
판다는 20여 종에 가까운 특별 모델이 만들어졌고 최근 들어 판다 4x4는 물론 판다 트레킹, 그리고 최근에는 좀 더 세분된 판다 크로스 모델을 내놓으며 다양한 선택의 즐거움을 주고 있습니다. 이런 시도는 피아트 500에도 이어지고 있는데요. 피아트 500과 판다가 피아트의 대표적인 모델임을 바로 보여준다 하겠습니다.
이벤트성 판다 사륜 / 사진=피아트
판다 4x4 / 사진=피아트
판다 트레킹 / 사진=피아트
판다 크로스 / 사진=피아트
판다만의 역사는 계속된다
2004년 올해의 차로 선정이 된 바 있으며 (2세대 누오바 판다), 2008년에는 판다를 모방했다는 이유로 중국 창청자동차가 만든 페리라는 모델을 이태리 법원이 유럽에서 판매하지 못하게끔 강력한 판결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디자이너 쥬지아로에 의해 태어난 판다는 처음 등장했을 때 ‘바퀴달린 가전제품’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는데요. 이후 아무도 시도하지 않는 도전을 이어가며 시트로엥 2 CV나 르노 4처럼 유럽인이 사랑하는 역사적 미니카 중 하나로 자리 잡았습니다.
1세대 판다 실내. 독특한 소재와 시트 구조는 캠핑의자를 연상시킨다고 해서 화제가 되기도 함 / 사진=피아트
조르제토 주지아로 디자인의 1세대 판다. 70년대부터 이어온 디자인 특징이 판다에도 그대로 녹아 있다 / 사진=피아트
작지만 훌륭한 실용성으로 각광받았던 2세대 판다 / 사진=피아트
판다 young 버전 / 사진=피아트
판다를 보면서 다시 한 번 느끼는 것은, 하나의 자동차가 그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그리고 반드시 새로운 도전과 노력이 함께 깃들어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실용주의 미니카의 대명사 판다는 그 평가 그대로 앞으로도 달려나갈 것입니다. 이것만이 화려하고 강력한 자동차들 속에서 판다가 빛을 잃지 않는 힘이 될 것이기 때문이죠. 우리에게도 이런 작은 차 하나쯤 있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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