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한 해 많은 자동차 관련한 글을 이 곳에 올렸습니다. 제 입장에선 모두 다 가치가 있는 내용들이라 할 수 있는데요. 하지만 가장 많은 시간을 들인 의미 있는 작업의 결과물이 무엇이었냐 물으신다면, 오늘 이야기라고 저는 대답을 드리겠습니다.
▣<히틀러와 자동차 3부작> 그 마지막 이야기
2년 전부터 생각을 하고 있던 내용이 있었습니다. 히틀러와 자동차에 대한 이야기들이었죠. 전쟁을 일으키고 인종 학살을 단행했던 독재자는 역설적이게도 독일의 기계기술이 최고 수준에 다다르는데 큰 역할을 합니다. 자동차도 예외는 아니었죠. 이런 나치 시대를 제대로 읽지 않고서는 독일의 자동차 문화나 자동차 산업을 이야기할 수 없기 때문에 저는 더 천착했습니다.
그 동안 큰 틀에서 두 가지 이야기를 이미 전해드렸는데요. <히틀러와 아우토반>, <히틀러와 국민차 프로젝트>가 그것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 남은 이야기 <히틀러와 경주자동차의 전설 은빛화살>에 대해 함께 알아 보려고 합니다. 핫한 신차 소식이나 시승기가 아니라 별 관심을 못 끌 수도 있겠지만, 이런 이야기 여기 아니면 못 만날 거란 '작은 자부심' 하나 붙잡고 준비했으니 애정을 갖고 읽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2014 싱가포르 그랑프리에서 질주 중인 메르세데스 머신. 사진=다임러
▣히틀러는 왜 자동차에 열광했나?
1차 대전 패전으로 짊어지게 된 엄청난 배상금에 짓눌려 살던 독일국민들에게 미국발 대공황은 더 이상 견디기 어려운 결정타가 되었습니다. 일단 살고 봐야 한다는 국민적 불안감과 불만이 높았고, 이런 시대적 어려움을 이용해 히틀러는 1933년 정권을 잡게 됩니다. 히틀러에 의구심을 갖고 반대하던 국민들도 당시에 많았지만 권력은 이미 그의 손에 들어갔고, 이제 그가 독일의 경제를 살려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진 자들의 목소리가 독일을 뒤덮게 됩니다.
독재자는 자신의 권력을 지키고 꿈을 이루기 위해선 이런 국민적 기대에 어떻게 하든 부응해야 했습니다. 많은 정책들이 나오고, 그 가운데 자동차와 관련한 야심찬 계획을 세우는데 바로 이 계획에 세 가지 (아우토반 건설, 국민차 프로젝트, 그리고 레이싱의 활성화) 내용이 담기게 됩니다.
아우토반 건설의 제 1목표는 당장의 엄청난 실업률을 극복하는 것이었습니다. 또 도로 건설을 통해 독일의 아름다움을 국민들이 즐길 수 있길 바랐고, 당연히 아우토반을 이용해 전쟁을 치루겠다는 의도도 담겼습니다. 국민차 계획은 자동차 산업 활성화를 통해 경제를 살리고, 자연스럽게 국민들의 삶을 염려하는 '마음 따뜻한' 지도자의 이미지를 강화시킬 수 있는 프로젝트였습니다. 그렇다면 자동차 레이싱의 활성화는 어떤 의미가 담긴 걸까요?
자동차 경주대회를 통해 독일 자동차 엔지니어들의 기술력과 드라이버들의 우수성을 보여주고 싶은 게 히틀러의 희망이었습니다. 또한 자국 자동차와 선수들의 활약을 통해 실의에 빠진 국민들에게 힘을 주고 싶어 했습니다. 레이싱에서 좋은 성적을 내는 게 나치 정권의 우월성을 드러내는 가장 좋은 프로파간다(선전선동)임은 두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었죠. 무엇보다 히틀러 그 자신이 자동차 경주에 열렬한 팬이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습니다. 독일 경주차들은 히틀러의 전폭적 지원 아래 역사를 써내려갈 토대가 마련된 것입니다.
▣은빛 화살의 탄생
1934년 질주하고 있는 메르세데스 W25. 사진=autowallpaper.de
히틀러가 집권하고 난 이듬 해인 1934년부터 2차 세계대전이 터지는 해인 1939년까지 독일 레이싱은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합니다. 아우디의 전신인 아우토 유니온과 메르세데스의 치열한 내부 경쟁은 당시 알파 로메오나 페라리 등 라이벌들을 따돌리고 가장 많은 우승을 달성하게 되는데요. 바로 이 6년 동안 활약한 독일의 경주차들을 질버파일(Silberpfeil, 영어로 실버애로우), 우리말로 은빛 화살이라고 부릅니다.
▣전설의 시작은 조작된 이야기?
사진제공=silverarrowsproject.com 사진을 클릭하면 조금 더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위에 보이는 것은 Jan Rambousek와 Tomas Kopecny라는 두 명의 체코 출신 아티스트의 실버애로우 프로젝트에 소개된 12개 작품 중 하나인데요. 은빛화살이 탄생하는 순간을 사진과 3D 작업 등을 통해 재현했습니다. 올해가 은빛화살 역사가 시작된 지 80년이 되는 해였고, 이를 기념하기 위한 이 프로젝트에서 가장 먼저 전설의 탄생 순간을 그려낸 것입니다.
작품 속 장소는 1934년 뉘르부르크링입니다. 레이싱 경주의 성지로 불리는 뉘르부르크링에서 독일 그랑프리에 출전을 앞둔 메르세데스 팀의 관계자들이 뭔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요. 1934년 국제자동차클럽협회( 지금의 자동차국제 연맹 FIA의 전신)는 새로운 규정을 내놓게 됩니다. 바퀴와 연료, 오일, 물 등을 제외한 차체의 무게가 750kg을 넘으면 안된다고 정한 겁니다.
이전까지는 더 무거운 경주차들을 만들었기 때문에 750kg에 맞추는 것은 기술적으로 큰 도전이었습니다. 계체량을 통과해야만 경주에 나갈 수 있는 상황에서 벤츠팀은 황당한 일을 맞게 됩니다. 차의 무게가 751kg이었던 것이죠. 당시 팀을 이끌고 있던 알프레드 노이바우어 단장은 최고 레이서 중 한 명이던 벤츠팀의 만프레드 폰 부라우히치와 대화 도중 해결책을 찾게 되는데, 흰색 도장을 벗겨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바람대로 차는 정확히 1kg의 감량을 할 수 있었고, 드디어 경주에서 만프레드는 우승으로 전설의 시작을 알리게 됩니다. 여기까지가 가장 많이 알려진 은빛화살 탄생의 이야기입니다. 알프레드 노이바우어의 1958년 자서전에 담긴 내용이기도 했죠. 하지만 지금 이 내용이 사실이라고 믿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미 당시 레이서였던 만프레드 폰 부라우히치는 사망 직전, 페인트를 벗겨낸 것은 맞지만 그 위에 살짝 다시 은색을 칠했다고 고백을 했죠. 무엇보다 은빛화살의 전설이 적어도 1932년부터 이미 시작 되고 있었다는 증언과 증거들이 멀쩡하게 있다는 점 때문이었습니다.
▣색을 칠하지 않은 채 등장한 SSKL
1932년 베를린 아부스 서킷. 사진=위키피디아
당시 독일에는 특이한 서킷(레이스용 도로)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아부스(AVUS)입니다. 독일 베를린의 일부 고속도로의 이름이기도 했던 아부스는 동시에 경주용 트랙이기도 했습니다. 직선 9km 정도의 도로의 양 끝에 엄청난 각도의 코너를 만들어 이 곳을 왕복하며 많은 차와 바이크들이 1998년까지 달렸습니다.
위에 사진은 아부스에서 1932년 벌어진 경주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제일 앞에 덩치가 큰 31번의 자동차가 만프레드 폰 부라우히치가 몰고 있는 벤츠팀의 모델 SSKL의 모습인데요. 이 차는 당시 어떤 색깔도 칠하지 않은 알루미늄 차체 그대로 출전을 해서 화제가 됐습니다. 이 때 라디오 방송을 진행하던 진행자의 입에서 "은빛화살"이란 단어가 튀어나왔습니다.
그 때부터 은빛화살, 은빛늑대, 은빛물고기 등의 다양한 용어가 등장했고, 그 중에 질버파일(은빛화살)이 최종적으로 독일 경주차들의 별칭으로 불리게 됐습니다. 참고로 포르쉐 자동차의 홍보파트에 있던 사람이 78년에 낸 자서전에서는 아우토유니온의 경주차들을 만든 포르쉐 박사가 1933년 이미 흰색 도장을 벗겨냈다고 증언하고 있지만 이 역시 신뢰하긴 어려운 내용으로 보입니다.
베를린 송전탑에서 바라다 본 아부스. 사진=위키피디아
아부스의 유턴코너엔 43도짜리 뱅크가 있다. 많은 사망사고가 발생해 '죽음의 벽'이라고 불리는 곳. 1937년. 사진=위키피디아
여기서 잠깐!
당시 국제 경주대회엔 국가를 상징하는 색깔이 있었다
20세기 시작과 함께 자동차 경주는 새로운 변화를 맞이합니다. 1900년 고든배넷컵에서 국가별로 자동차 색상을 달리하자는 주장이 나온 겁니다. 그래서 그 때 정해진 것이 프랑스는 파랑, 벨기에는 노랑, 독일은 흰색, 미국은 레드였습니다. 이태리는 처음에 거부했다 1907년에 이를 받아들였는데 그것이 로쏘 코르사라는 빨간 칼러의 전통의 시작이었습니다. 영국은 1902년 국제대회에 참가를 하게 되는데 이 때 흰색과 파랑 레드 등은 선택을 할 수 없었고, 그래서 택한 것이 그린이었습니다. 이것이 브리티시 레이싱 그린의 시작이었던 것이죠.
이처럼 각 국가별로 색상이 정해진 상태에서 국제대회를 치뤘는데 독일의 경우 이 색상이 1934년부터 공식적으로 은색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나치시대를 알리는 새로운 색상이 필요하다고 봤던 모양이고, 2차 대전 이후에도 독일 경주차들은 은색을 계속 고집하면서 지금의 전통이 만들어질 수 있었습니다. 독일 차들이 왜 은색이 많은지 이해가 되시겠죠?
▣전설의 머신과 드라이버들
메르세데스의 유명 드라이버 만프레드 폰 부라우히치. 사진=grandprixhistory.org
아우토유니온을 대표했던 베른트 로제마이어. 우측이 포르쉐 박사. 사진=위키피디아
당시 독일에서 가장 대표적 레이싱 팀이라면 메르세데스 벤츠였습니다. 그러다 나치 정부의 주도한 레이싱 경주가 펼쳐진다는 소식에 아우토유니온은 포르쉐와 손잡고 뛰어들게 되죠. 하지만 최고의 경주차를 만드는 건 무엇보다 자본이 필요했던 일이었습니다. 히틀러는 메르세데스와 아우토유니온에게 엄청난 개발비를 지원하며 레이싱에서 독일팀들이 최고의 성적을 내달라 주문합니다.
정부의 지원 아래 두 회사는 최고의 레이서와 최고의 자동차들을 가지고 대회에 출전, 놀라운 성적들을 거두게 됩니다. 히틀러는 오래 전부터 레이싱을 좋아했고, 한스 슈툭, 루돌프 카르치올라 등의 레이서들의 열광적 팬을 자처했습니다. 벤츠에 더 많은 애정을 가지고 있던 히틀러였지만 포르쉐 박사의 열렬한 신봉자였던 그는 아우토유니온에게도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죠. 제국의 수상은 자동차 경주를 통해 독일이 세계 최고임을 드러내고 싶어했고 많은 대회에서 그 꿈을 실현했습니다.
그런 히틀러의 꿈을 실현해준 드라이버들은 벤츠 소속으로 만프레드 폰 부라우히치, 루돌프 카르치올라, 그리고 헤르만 랑이 대표적이었고, 아우토유니온에는 한스 슈툭과 베른트 로즈마이어같은 전설들이 버티고 있었습니다. 특히 한스 슈툭의 경우, 아내가 유대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이유로 언론과 일부 국민들의 위협과 비판에 시달렸지만 정작 프로파간다 장관이던 괴벨스와 히틀러는 최고 드라이버를 보호하기 위해 그의 아내의 집안 문제를 최대한 덮어주는 배려까지 하게 됩니다. 얼마나 그들이 레이서들에게 공을 들였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메르세데스는 W25, W125, W154 같은 레이스용 자동차로 우승을 밥먹 듯했고, 아우토유니온은 타입A, 타입B, 타입C와 D 같은 모델들로 엄청난 우승의 명예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특히 아우토유니온 소속의 베른트 로제마이어는 프랑크푸르트에서 다름슈타트까지 이어지는 아우토반 (히틀러 시대에 만들어진 첫 번째 고속도로)에서 1937년 10월 시속 406.32km/h를 기록해 공공도로에서 400km/h의 속도를 깬 첫 번째 드라이버가 됐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듬 해 440km/h에 같은 장소에서 도전하도 사고로 죽게 되는데 그의 나이는 28세였습니다.
*아우토유니온은 1934년부터 1939년까지 벌어진 메이져 30개 대회에서 24회 우승, 스물 세 번의 준우승이라는 영광을 맛봤습니다.
메르세데스 W25. 사진=autowallpaper.de
W125. 사진=autowallpaper.de
W154. 사진=autowallpaper.de
1936년 뉘르부르크링을 질주하고 있는 아우토유니온의 타입C 모습. 사진=favcars.com
은빛화살 시대를 기념하는 아우토유니온의 타입C(왼쪽)와 타입D. 사진=favcars.com
아우토유니온의 베른트 로제마이어가 최고속도 갱신에 도전할 1938년의 사진. 출처=autowallpaper.de
▣또 다른 은빛화살이었던 레코드카
이 당시는 레이싱에서 우승하는 것 못지 않게 최고속도를 겨루고 기록을 깨는 일 또한 많은 관심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런 기록용 차를 레코드카라고 부르는데요. 아부스에서 메르세데스 벤츠 소속의 헤르만 랑은 1937년 평균시속 276km/h, 최고시속 400km/h에 육박하는 기록을 달성해 독일인들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 넣었습니다.
위에 언급했던 아우토유니온의 베른트 로제마이어는 공도 최고 기록을 한 동안 보유하고 있었고, 기록 도전하다 죽은 그의 아내에게 히틀러는 " 그가 독일을 드높이기 위해 전사했다는 점이 당신의 애통함을 덜어줄 수 있기를..."이란 위로를 남겼다고 합니다. 히틀러에게 당시 레이서들은 개인이 아닌 국가의 한 조직이었고, 전사라는 표현을 쓸 수 있는 군인이었으며, 독일의 우월성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이었던 것입니다.
당시 레코드카는 공기저항을 최소화하기 위한 납작하고 곡선형 구조로 되어 있었다. 아우디의 재현 모델. 사진=favcars.com
실버애로우 프로젝트 작품. 1937년 레코드카들이 아부스의 뱅크를 타고 질주하고 있다. 31번은 메르세데스의 루돌프 카르치올라. 뒤쫓고 있는 35번은 아우토유니온의 베른트 로제마이어. 하켄크로이츠 나치기가 펄럭이던 곳(위에 아부스 사진 참조)에는 벤츠 로고가 대신하고 있다. 사진제공=silverarrowsproject.com
▣히틀러는 죽었지만 은빛화살은 계속된다
1939년 독일 그랑프리 우승을 확신하는 루돌프 카르치올라의 모습을 실제 모델과 컴퓨터 그래픽을 이용해 재현했다. 사진제공=silverarrowsproject.com
은빛화살 프로젝트의 한 작품으로, 1939년 뉘르부르크링에서 열린 독일 그랑프리에서 메르세데스 소속 루돌프 카르치올라가 우승하는 장면입니다. 저 당시 현장엔 25만 명의 관중들이 자국 경주차가 질주하는 모습을 응원하고 있었다고 하죠. 그 어떤 정책보다 나치제국의 우수성을 알리는 데 유용했던 것이 바로 자동차 경주였습니다.
히틀러는 이렇게 국민들에게 달콤한 환상을 심어놓고 얼마 후 폴란드를 침공하며 세계 2차대전을 일으킵니다. 전쟁 동안 모든 경주용 차는 멈춰섰고, 그렇게 패전으로 독일의 은빛화살 신화는 사라질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독일 자동차 회사들은 히틀러의 엄청난 지원으로 이뤄놓은 기술적 성과와 우승 트로피를 그냥 내버리지 않았습니다.
이후 이들은 더욱 더 자동차 개발에 투자하게 되고 레이싱에도 관심을 기울이게 됩니다. 메르세데스 팀에는 스털링 모스와 후안 마누엘 판지오와 같은 전설적인 드라이버들이 몸을 담게 되고, 지금까지도 F1에서 좋은 성적을 내고 있습니다. 아우디는 아우토유니온의 전통을 이어받아 내구레이스에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지위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폴크스바겐과 BMW, 포르쉐 등은 각종 랠리에서 좋은 성적들을 거두고 있습니다.
히틀러의 부끄러운 시대는 비참하게 끝이 났지만 그 시절의 영광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올 F1은 메르세데스에게 최고의 선물을 안 겨준 한 해였습니다. 루이스 해밀턴이 챔피언이 되었고, 팀 또한 1위를 차지했습니다. 동료인 니코로즈버그도 2위에 이름을 올리며 은빛화살 80주년의 끝을 멋지게 마무리했습니다.
메르세데스 AMG 페트로나스 팀의 루이스 해밀턴과 그의 머신. 사진=다임러
우승을 기뻐하는 루이스 해밀턴과 디터체체 다임러 회장. 사진=다임러
다임러 회장과 메르세데스 개발총괄, 니키 라우다, 그리고 모든 팀원들이 우승을 기뻐하고 있다. 약혼녀 니콜 셰르징거 모습도 보인다. 사진=다임러
올 11월 슈투트가르트에서 열린 스타스 & 카즈 행사 모습. 최고 드라이버들과 은빛화살들이 관중을 속을 달리고 있다. 약 5만 명의 팬들이 운집해 행사를 즐겼다. 사진=다임러
메르세데스는 지금까지 은빛화살의 전통을 가장 열심히 마케팅에 활용하고 있습니다. 전쟁 이후에도 메르세데스 300SLR 같은 아름다운 은빛의 자동차를 내놓았고, 지금까지 은색 칼라를 활용해 신차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우디 역시 벤츠만큼은 아니지만 실버애로우 시대를 가장 화려하게 수놓았던 브랜드로 이를 자랑스럽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과연 당시 정치적 상황, 그리고 일부 레이서들의 히틀러와 나치제국에 대한 보여준 충성된 모습들을 떼어 놓고 이들의 은빛화살 전통을 전설이라는 이름으로 긍정적으로만 볼 수 있을지는 생각을 해볼 문제입니다. 하지만 독일은 자신들의 과거에 대한 반성을 철저하게 해나가고 있고, 동시에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레이싱의 화려한 역사 또한 저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부끄러운 과거는 부끄러운 그대로 소개하고, 자랑할 것들은 전통으로 이어가고 있는 것이죠. 히틀러가 아니었다면 이뤄내기 어려웠을지도 모르는 영광들이기에 그 멍에와 기쁨을 안고 독일 은빛화살들의 질주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아우토유니온의 은빛화살 모습. 사진=blog.audi.de
'독일 자동차 세상 > 독일의 자동차 문화 엿보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한민국 사설구급차는 안녕하십니까? (27) | 2015.02.06 |
---|---|
고령화시대 속 자동차를 다루는 언론의 좋은 예 (40) | 2015.01.26 |
유럽도 최고라 인정하는 스웨덴의 교통안전 (45) | 2015.01.23 |
디젤을 사랑했던 유럽, 디젤에 발등 찍히다 (72) | 2015.01.21 |
獨 축구스타 로이스 무면허 운전, 사건의 재구성 (8) | 2014.12.27 |
독일도 부러워하는 유럽 자동차 문화 9가지 (39) | 2014.12.25 |
잘못된 운전자를 본 당신의 선택은? (35) | 2014.12.17 |
어느 한국 여성의 독일 운전면허 취득기 (35) | 2014.12.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