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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자동차 세상/독일의 자동차 문화 엿보기

'독일하면 떠오르는 것' 괴테보다 폴크스바겐?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지난 8월, 그러니까 폴크스바겐의 디젤게이트가 터지기 전입니다. 여론조사전문기관 YouGov의 흥미로운 설문조사 하나가 여러 언론을 통해 공개가 됐습니다. 독일인 1081명에게 '당신이 생각하는 전형적인 독일, 혹은 독일인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 것인데요. 독일인 스스로에게 가장 '독일스러운 것'에 대해 물은 것으로, 놀랍게도 수많은 독일의 가치들을 뒤로하고 폴크스바겐이 1위를 차지했습니다.


폴크스바겐 로고 / 사진=VW

설문은 작년 10월에 이뤄졌습니다. 작년 10월이면 폴크스바겐이 한창 잘 나가고 있을 때이며, 메르켈 정부는 난민 문제로 곤욕 치를 일도 없었을 때입니다. 실업률은 유럽 최저 수준에, 브라질 월드컵 우승으로 한껏 축구 열기가 달아 올랐을 때니, 우리 식으로 표현을 하자면 태평성대의 시기였다고 할 수 있겠군요. 이러한 시기에 독일인들의 생각을 물은 것인데, 그 대답이 참 재미있었습니다.


출처=de.statista.com

순위에 대해 간단히 설명을 좀 드려야 할 거 같습니다. 우선 전체 응답자의 63%가 폴크스바겐을 '가장 독일스러운 것'으로 꼽았습니다. 2위에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이탈리아 기행>, 그리고 <파우스트> 등을 쓴 작가이자 시인, 그리고 철학자이자 바이마르 공화국의 재상을 지낸 요한 볼프강 폰 괴테가 49%로 이름을 올렸고요. 그가 머물렀던 장소, 즐겨 찾던 벤치조차 모두 관광명소가 될 정도로 독일인들에겐 특별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3위 자리는 국민들로부터 최고의 신임을 얻고 있던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차지했고, 4위와 5위에는 월드컵 우승의 영향으로 '독일국가'와 '독일 축구대표팀'이 나란이 꼽혔습니다. 동방정책과 폴란드 전쟁희생자 비석 앞에 무릎꿇고 사죄한 사진으로 유명한 빌리 브란트 전 서독 총리가 6위를, 그리고 7위에는 부끄럽지만 어쩌면 당연해 보이는 히틀러의 이름이 올랐으며, 8위에는 상대성 이론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그리고 9위는 소시지와 캐첩과 카레소스 등을 섞어 만든 독일 대표 간식 (우리의 떡볶이 정도) 커리부르스트와 요한 세바스찬 바흐가 나란히 차지했습니다.


바르사뱌 전쟁희생자 묘역에서 무릎꿇고 있는 빌리 브란트 / 사진=hdg.de

그 다음 16%를 얻은 TV 범죄수사물 타트오르트(Tatort, 사건현장)가 꼽혔는데 무슨 드라마를 가장 독일적인 것으로 뽑았나 싶겠지만 1970년부터 시작돼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는 국민드라마죠. 오스트리아판, 스위스판 타르토르트도 나오고 있을 정도로 독일어권에선 동네 강아지도 알 정도로 유명합니다. 그 다음은 소시지(15%), 그리고 하이노라는 하드락 가수(현재 할아버지임), 그리고 풍자만화가이자 방송인 등으로 다양한 삶을 살다 간 로리오트(Loriot, 필명)가 10%의 지지를 얻었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9%를 카를 마르크스와 헬레네 피셔가 얻었는데요. 마르크스는 <자본론>으로 잘 알려진 사회학자이자 공산주의 이론의 창시자이기도 합니다. 헬레네 피셔는 마르크스와는 전혀 다른, 요즘 한창 독일에서 뜨고 있는 국민여가수로 우리로 치면 트로트계를 대표한다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또 이들을 이어 독일의 생태계가 5%라는 지지를 받아 순위에 등장한 게 이색적이었네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독일 일렉트로닉 밴드의 전설인 '크라프트베르크'가 2%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70년대 결성돼 최근까지도 공연을 한 것으로 아는데, 뉴욕타임스는 이 밴드를 일컬어 '일렉트로닉계의 비틀즈'라고 했을 정도였습니다. 거의 전위예술 수준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결과를 보니 베토벤과 바그너, 브람스와 같은 음악가는 물론 칸트, 헤겔, 니체, 쇼펜하우어 같은 유명 철학가 등도 이름을 못 올렸습니다. 올 봄 세상을 떠난 <양철북>의 작가 귄터 그라스나 프란츠 랑 같은 영화 감독도 이름이 모두 빠져 있습니다. 비교적 대중적 취향의 결과, 그리고 어느 정도 시류에 영향을 받은 결과가 아니었나 싶었는데요. 이처럼 대단한 인물과 상징들이 즐비한 가운데 자동차 브랜드가 자국민들로부터 가장 독일스러운 대상으로 꼽혔다는 건 의외였고, 또 놀라운 결과였습니다. 


심지어 삼각별로 상징되는 벤츠조차 순위 안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는 걸 생각하면 정말 말 그대로 폴크스바겐이 '국민차'가 맞다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히틀러에 의해 만들어진 자동차 회사라는 원죄적 아픔이 있긴 하지만 전쟁에 패하고 가장 어려웠던 시기 라인강의 기적을 '불리'나 '비틀' 등이 함께 이뤄갔다는 가치가 여전히 독일인들에겐 크게 자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폴크스바겐 마이크로버스 '불리' / 사진= Mirko frank

하지만 올해 터진 배출가스 조작 스캔들로 폴크스바겐은 독일인들의 이런 자부심과 애정에 큰 상처를 주고 말았습니다. 만약 이 조사를 사건이 터진 후에 진행했다면 과연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런데 독일인들이 폴크스바겐에 대한 애정을 완전히 버리진 않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는 설문 내용이 지난 달 공개되기도 했죠. 한 번 소개를 해드린 적 있긴 합니다만,


독일 펄스-마크트포르셔라는 리서치 전문회사는 배출가스 조작 사건이 터진 후 자국민들을 대상으로 관련한 몇 가지 질문을 했습니다. 그 때 응답자의 54%가 여전히 폴크스바겐의 자동차를 구매하는 것에 관심이 있다고 답을 했죠. 온통 이 문제로 시끄러운 그런 상황이었는데도 말이죠. 연령대와 성별 가릴 것 없이 비슷한 반응들이었습니다. 반대로 배출가스 사건으로 폴크스바겐 자동차를 사지 않겠다고 답한 비율은 11%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잘못은 분명히 했고 그에 대한 정당한 댓가를 치뤄야 한다는 데엔 동의하고 있었지만 '미워도 다시 한 번'이라고 할까요? 독일인들은 기회를 한 번 더 준 것입니다. 이런 국민들을 위해서라도 폴크스바겐은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취하고 다시는 부끄러운 잘못을 일으키지 않겠다는 약속과 디짐을 해야 합니다. 폴크스바겐을 아끼는 전세계 고객 모두를 위해서라도, 그리고 이처럼 독일의 중요한 상징이라 믿고 있는 자국민들의 믿음을 위해서라도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라면 무엇을 '가장 한국적인 것'으로 꼽으시겠어요?)


수십년째 이어져 오고 있는 제조사와 팬들이 함께 만드는 행사가 오스트리아 뵈르테제에서 2~3일에 걸쳐 펼쳐진다 / 사진=V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