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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자동차 세상/독일의 자동차 문화 엿보기

아우토반을 만든 작은 히틀러, 프리츠 토트


1933년,

히틀러는 독일의 총리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그가 총리가 되고 본격적으로 1인 지도체제화 되면서 나치당과 중앙 정부는 무소불휘의 권력을 휘두르게 되죠. 하지만 그런 당과 중앙 조직의 관료들 조차 어찌 해볼 수 없는 강력한 인물이 등장하게 되는데, 독일 아우토반 건설을 진두지휘한 인물 프리츠 토트( Fritz Todt, 1891~1941)였습니다.


프리츠 토트 (1940년) 사진=위키피디아



▶공대생에서 나치 돌격대까지

작은 시계공장을 운영하던 아버지의 영향이었을까요? 만드는 것에 관심이 많던 프리츠 토트는 대학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하게 됩니다. 뮌헨대와 칼스루헤 공대을 다녔고 마흔 살에 박사학위를 따기도 한 그는 나치당원이었으며, 공군 준장까지 올랐고, 토목회사에서 근무하며 나치 돌격대 (SA)의 일원으로 활동했습니다. 학업과 직장일을 병행하면서도 당원과 군인으로서의 역할에 모두 능했던 인물로 평가되는데요. 나치당원이었지만 온건파에 가까운 사람이었습니다.


어쨌든 프리츠 토트는 독일 역사에서 꽤 의미 있는 위치에 놓여 있습니다. 특히 히틀러와 아우토반이라는 두 가지 키워드에 모두 포함이 되는 그런 사람이었죠. 쉽게 말하면 연관검색어에 빠질 수 없다고나 할까요? 그는 히틀러의 아우토반 계획을, 히틀러의 전폭적인 지지하에 이끌어 갔던, 개인으로 보면 참 행복한 시절을 살았다고 볼 수 있는 인물이었는데요. 도대체 얼마나 그가 히틀러에게 신임을 얻었는지, 왜 그를 시기하는 사람들이 많았는지는 히틀러 시대인 3제국 연구서들을 보면 잘 나타나 있습니다.



▶히틀러가 자기 돈까지 내주며 붙잡았던 사람

아시다시피 독일은 히틀러가 권력을 쥐고 있을 때 살인적인 경제난에 시달리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실업자가 당시 독일의 경제활동 인구의 절반 가까이 된다는 600만 명 수준이었다고 하니까요. 히틀러는 전쟁을 염두에 두고 있었지만 그 보다는 당장 국민들이 자신의 지도력을 인정해줄 수 있도록 경제난을 해결하는 게 급했습니다. 


이런 상황을 해결하는 데 매우 중요한 계획 두 가지가 발표되는데요. 1933년 총리 취임 며칠 후 찾은 베를린 자동차 전시회에서 '자동차 대량 생산과 도로 건설 계획'을 발표합니다. 그 다음 해엔 자동차 대량생산 계획을 구체화시킨 '국민차 프로젝트'가 나오게 되죠. 그리고 중요한 도로 건설 계획을 책임질 인물을 뽑는데 그가 바로 프리츠 토트였습니다.


그런데 차관급 지위의 '독일도로총감' 자리에 오른 그를 공식적으로 임명에 동의한다는 내각회의록 자료가 없었다고 합니다. 즉, 히틀러가 자신의 이름으로 직접 뽑아 올린 특별한 자리의, 특별한 인물이었던 것이죠. 히틀러는 그의 지위를 이렇게 발표했습니다. " 어느 부처에도 속하지 않는다. 총리에게 직속될 것이다." 이렇게 됨으로써 당시 교통부장관은 하루아침에 허수아비가 되고 맙니다.


사진 제공= autobahn_toll_collect.de


자, 이제부터 프리츠 토트에겐 어마어마한 권한이 주어지게 되는데요. 우선 교통부로부터 자신의 업무 관련한 권한을 모두 넘겨받게 되는데 교통부는 자동차와 국도에 관련된 업무를 보던 교통부 K과를 통째로 토트에게 넘겨줍니다. 또 도로 건설을 위해 필요한 법을 만들 수 있는 입법권까지 요구하게 되죠.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각료들의 공공의 적이 됩니다.


히틀러 면전에서 토트의 이런 요구에 불만을 표한 장관도 있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습니다. 얼마나 히틀러가 자신의 아우토반 계획을 중요하게 여겼고 그 일을 치를 프리츠 토트를 중요하게 여겼느냐면, 제국철도 행정위원회 위원에 임명된 토트가 자신의 직책 수행을 위한 자문료를 경비로 인정해 달라고 하자 재무부가 예산 집행을 거부해버립니다. 그러자 히틀러는 자신에게 주어진 개인 기금의 일부를 토트에게 경비로 쓰도록 내주죠. 물론 토트는 사양하지 않았습니다.


입법의 권리, 명령권까지 획득한 제국도로주식회사는 최고 행정기구가 되었지만 일반적인 행정업무는 일절 맡지 않는, 초법적인 기구로 그 위세가 커지게 됐습니다.. 행정기구인데 일반 업무를 안 본다? 한 마디로 오로지 고속도로 건설에만 전념하고, 이를 위해 필요한 모든 걸 할 수 있게 히틀러는 용인을 해준 것입니다. 


이런 신의 직장, 신의 자리가 또 어딨었을까요?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고, 컨소시엄을 구성해 국책 사업에 참여할 수 있는 사업자를 임의대로 선정할 수 있었으며, 필요하면 법까지 만드는 권력. 그게 프리츠 토트가 누리는 내용이었습니다.나중에 프리츠 토트는 '건설경제총감'이 되고, 전쟁 중엔 모든 전쟁 물자와 설비, 건설 관련한 업무를 책임지는 '군수부장관'의 자리에까지 올라갑니다. 



삽질의, 삽질을 위한, 삽질에 의한


1933년 9월 아우토반 건설을 위한 첫 삽질을 하는 히틀러와 그 졸개들 모습. 사진=위키피디아


1933년, 프랑크푸르트와 다름슈타트 사이(1차 구간)의 첫 번째 나치제국 아우토반을 위한 삽질이 히틀러로부터 시작됩니다. 1935년 완공이 되면서 최초의 고속도로라는 명예를 이 도로 (현재는 A5로 불림)에게 부여하지만 공식적으로는 그 전에 만들어진 퀄른-본 도시 간 도로 (현재 A555 아우토반)가 그 타이틀의 진짜 주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나치는 인정을 안 했지만, 자기들이 인정 안 한다고 역사가 바뀌는 것은 아니니까요.


어쨌든 프리츠 토트는 히틀러의 요구를 충실히 이행하기 위해 당시 독일 실업자의 10%인 60만 명을 아우토반 건설에 투입하겠노라고 큰 소리를 칩니다. 그리고 인력을 최대한 늘리고자 도로 공사에 필요한 기계마저 최소화 하면서 모든 것을 노동력에 집중했죠. 하지만 이렇게까지 했음에도 최대 투여된 인원은 13만명 수준이었고, 너무나 힘든 노동으로 인해 삽을 내려놓는 노동자들이 속출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년도별 아우토반 건설 참여 인원 그래프. 사진=위키피디아


아우토반 A5 모습. 사진=위키피디아



굽은 아우토반이라고? 군대의 반대

위에서도 잠시 언급했었지만, 아우토반을 흔히 전쟁을 치르기 위한 목적에 의해 만들어진 도로라고 알고 있는데, 우선 목적은 절대 전쟁이 아니었다는 게 역사학자들의 대체적인 분석입니다. 경제활성화를 위한 일자리 창출과 자동차 산업의 성장이 우선 순위였죠. 실업률을 줄이고, 이 도로를 통해 히틀러는 독일인들의 우월함과 독일 자연의 아름다움을 나타내고 싶어했습니다. 아름다움?


네.독일 아우토반은 속도 제한이 없는 도로이기도 하지만 주변 풍경에 굉장히 많은 노력을 기울인 도로이기도 한데요. 도로 주변에 편의시설과 위락 시설이 들어선 미국 등의 영향을 받아 독일도 도로 주변으로 많은 나무를 심게 됩니다. 또 길을 낼 때에도 주변 경치를 고려했고, 그렇게 풍경의 조화로움을 위해 아우토반의 많은 구간이 곡선으로 만들어지게 됩니다. 이유는 독일인들이 자동차를 타고 아우토반을 달리며 풍경을 즐기면서 자연스럽게 애국심을 느끼길 바란 것이죠.


이는 독일 뿐 아니라 그 보다 더 일찍 프랑스 같은 곳에서도 애국심과 도로의 풍경을 연결 짓는 시도들이 있었음을 생각하면, 그 당시 하나의 중요한 도로 건설의 흐름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입니다. 당연히 군부에서는 반대를 했습니다. 직선 구간은 수송 시간을 줄일 뿐 아니라 활주로로 활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는데 굽은 고속도로를 많이 만들겠다고 얘기가 나왔기 때문이죠. 


심지어 풍경을 해치지 말라고 중앙 분리대 조차 없는 구간이 많았으니까요. 군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프리츠 토트의 이런 주장은 히틀러의 생각과 맞아 떨어졌고, 일부 환경론자들도 찬성을 하면서 결국 아우토반의 많은 구간은 미학적인 관점이 보장된 설계로 이뤄지게 됩니다. 


초기 아우토반의 모습. 사진=위키피디아


독일 짤레브뤼케. 사진=위키피디아


독일 아우토반 전경. 사진=위키피디아




의문의 죽음 그리고 절반의 성공


1938년 오스트리아에서도 삽질에 여념이 없는 히틀러. 그리고 그를 바라보고 있는 프리츠 토트의 모습. 사진=위키피디아


폴란드 침공을 시작으로 히틀러는 전쟁을 일으키고, 이 전쟁으로 인해 원래 6,000km 수준의 아우토반 건설을 약속했던 프리츠 토트는 4천킬로미터를 채 넘지 못하는 총 공정만을 달성하게 됐습니다.특히 그는 전쟁 시작 후 러시아 침공 이후 제대로 보급 등이 이뤄지지 않자 러시아와의 전쟁을 반대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이러한 의견을 다시금 히틀러에게 전달하고자 폴란드의 라슈텐부르크로 향하던 중 비행기 폭발 사고로 51세의 나이로 1942년 사망하게 됩니다.


라슈텐부르크에는 당시 러시아와의 전쟁을 위한 지휘본부, 일명 '늑대의 소굴'이 있던 곳인데요. 여러분이 잘 아실 만한 영화로 설명을 드리자면, 톰 크루즈 주연의 '작전명 발키리'에서 폭탄을 터트려 히틀러를 제거하려고 했던 장면이 나오는데, 바로 그 곳입니다. 


 어쨌든 독일 내에서도 프리츠 토트의 비행기 폭발은 지금까지도 의문의 사고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반히틀러 전선의 소행인지, 아니면 그를 굉장히 싫어했던 괴링과 그 외의 군부와 내각의 소행인지는 여전히 밝혀지지 않고 있는데요. 적어도 외부적으로 적이 많았지만 히틀러에게만은 확실한 지지를 받았던 인물이었고, 그런 지지를 통해 아우토반의 건설이 어느 정도 진척을 보일 수 있었습니다.



프리츠 토트의 장례식 행렬. 사진=위키피디아



아픈 역사의 유물

프리츠 토트는 사망 후 히틀러로부터 독일 최고 훈장을 받게 되고 베를린에서 대대적인 규모로 장례식이 치뤄지게 됩니다. 그의 사후 아우토반은 처음에 반대하던 군부에 의해 철저하게 전쟁용으로 이용이 되죠. 그리고 패망과 함께 그 아우토반의 길을 따라 수많은 독일군들은 수용소로 향하게 됩니다. 영광과 좌절이 모두 이뤄진 아우토반에 대한 역사의 냉엄한 기록은 우리에게 참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프리츠 토트는 끝까지 히틀러에게 지지를 받았던 인물이었으며, 전무후무한 권한을 부여받아 아우토반의 기초를 닦아낸 인물이었습니다. 2차 대전 패망 후  독일은 아우토반에서 히틀러의 자취와 계획들을 지워내기 시작했지만 아우토반의 기술적인 유산만큼은 이어지고 발달되어 갔습니다. 이런 아우토반 성장의 뿌리는 결국 프리츠 토트였던 것이죠.


아우토반을 토대로 독일의 자동차 산업은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고 독일 차들의 경쟁력은 강화될 수 있었습니다. 나치의 오욕의 역사가 아이러니하게 독일의 많은 부분에 영향을 미쳤고, 그것이 지금의 독일이 있게 만든 토대로 작용했다는 점을 떠올릴 때마다 아우토반 위를 달리는 느낌은 달라지더군요. 어쩌면 이런 부끄러운 역사의 유물들이 여전히 남아 있기에 독일인들은 더 자신들의 과오에 대해 엄정하게 기록하고 아파하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듭니다. 어떠세요, 아우토반 속에 참 많은 이야기가 담겨져 있죠?


히틀러가 삽질을 했던 바로 그 프랑크푸르트-다름슈타트 구간. 시승 코스이기도 한데, 이 구간 일부는 속도 무제한 구간으로 되어 있습니다. 사진=스케치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