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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자동차 세상/독일의 자동차 문화 엿보기

아우토반 최고 권장속도 130km/h는 어떻게 등장했나

독일 아우토반의 길이는 13,000km나 됩니다. 중국, 미국, 스페인 등에 이어 네 번째로 길죠. 땅덩어리 크기를 생각하면 가장 촘촘하게 운전자들과 연결된 고속도로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리고 이 아우토반은 기본적으로 속도 제한이라는 게 없었습니다. 지금도 전체 구간의 절반 정도는 무제한으로 달릴 수 있죠. 나머지 절반은 상황에 따라 80,100,120,130 등의 제한속도가 반영되고, 전체의 1/3은 영구적인 속도제한 구간입니다.

아우토반 전경 / 사진=위키피디아, Ra Boe


그런데 독일 아우토반에는 다른 곳에서 보기 힘든 권장 최고 제한속도 130km/h 구간이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흔히 무제한 구간이라 부르는 곳이 바로 이 권장 최고속도 구간이기도 한데요. 도대체 언제, 그리고 왜 이런 권장 최고속도가 아우토반에 도입된 걸까요? 그리고 독일인들은 이 권장 최고속도를 얼마나 잘 지키고 있을까요? 


바이마르공화국부터 히틀러 정권까지

독일에 자동차의 제한속도가 처음 등장한 것은 바이마르공화국 때였습니다. 1910년의 일이니 꽤 오래전이죠? 도심에서 자동차는 최고 15km/h까지 달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1927년 이 제한속도는 30km/h까지 높아지게 되죠. 하지만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후 이 제한속도를 폐지하고 새로운 기준을 정하게 됩니다.


1939년 5월 나치 정권은 도심 최고 제한속도를 60km/h, 도심 밖에서는 100km/h로 제한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해 10월 도심에서 자동차의 최고 제한속도를 40km/h, 외곽 지역의 경우 80km/h로 다시 더 낮춥니다. 나치 제국이 이런 결정을 한 이유는 교통 안전과는 상관없는 것이었습니다. 전쟁을 대비해 연료를 아끼려는 게 목적이었죠.

1932년 나치 제국 첫 아우토반 건설현장에서 삽질(?)하고 있는 히틀러 / 사진=위키피디아


전쟁에서 패한 후 1952년 정부는 나치 시대의 제한속도를 없앱니다. 경제 재건이라는 숙명의 과제를 위해 자동차 판매가 활성화되어야 했고, 이를 위해 필요한 여러 조치 중 하나를 취한 것인데요.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빠르게 자동차가 늘어나고 속도의 제한이 없자 교통사고와 부상 및 사망자 수가 급격하게 늘어난 것입니다.


한해 2만 명이 교통사고로 목숨 잃어

당시 상황을 전한 한 독일의 전문지는 로비스트들이 이런 문제를 ‘문명의 진보에는 희생이 따른다.’는 말로 합리화시켰다고 전하기도 했습니다. 자동차 업계를 위한 발언으로만 보기에는 끔찍한 수준이었죠. 그런데 이런 망언(?)으로 덮기에는 교통사고 사망자의 수가 너무 많아졌습니다. 1970년 독일에는 1700만대의 자동차가 달리고 있었는데 그해 교통사고 사망자는 2만 명에 육박했습니다.


작년 독일의 자동차 수는 6천 2백만 대이고, 교통사고 사망자가 약 3,600명이었으니까 얼마나 그 해에 많은 사람이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독일 정부는 1972년 우선 아우토반을 제외한 국도의 최고 속도를 100km/h로 제한하게 됩니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73년 10월 4차 중동전쟁이 터지며 세계는 중동국가들의 기름 감산에 따른 엄청난 경제적 어려움에 처하게 되죠. 바로 제 1차 오일쇼크가 터진 것입니다.

1973년 미국의 한 주유소에 써 붙여진 ‘오늘 기름 없음’ 문구 / 사진=위키피디아


제 1차 석유파동, 아우토반 얼어붙게 만들다

1차 오일쇼크는 전 세계 경제를 얼어붙게 했습니다. 우리나라도 정말 힘든 시기를 보냈지만 미국과 당시 신흥 경제 강국으로 발돋움하던 독일의 경제도 흔들리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기름값은 한달 만에 세배가 올랐고, 아예 기름을 구하는 것조차 어려운 지역도 속출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아우토반의 고속 질주는 계속됐지만 이때만큼은 예외였습니다. 아우토반은 텅 비었고, 심지어 자전거가 썰렁한 아우토반을 달렸습니다.


독일 정부는 1차 오일쇼크가 터진 직후 1972년 11월부터 1974년 3월까지 한시적으로 아우토반의 최고 속도를 100km/h로 제한하게 됩니다. 이게 아우토반 전체 구간에 대한 유일한 속도 제한 시기였습니다. 독일 정부는 이런 속도 제한 조치를 계속 이어가고 싶어했죠. 하지만 독일 상원 등이 나서 반대했고, 결국 타협점을 찾은 게 권장 제한속도라는 개념을 도입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를 지키는 독일 운전자들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아우토반 속도제한 시도한 진보좌파

속도제한 시도를 막은 중도 보수파

2007년 이후 녹색당과 중도 좌파 격인 사회민주당(SPD) 등은 아우토반의 최고 속도를 법적으로 130km/h로 제한하기로 의견을 모읍니다. 하지만 2008년 메르켈 정부와 보수적인 자유민주당(FDP)이 이 계획에 반대하고 나서며 무산시키죠. 그리고 현재까지 아우토반의 권장 최고속도 130km/h는 남아 있습니다.  

독일의 기본적인 제한속도 안내표시. 도심은 50km/h, 국도는 100km/h, 아우토반 권장 최고속도는 130km/h


권장 최고속도 얼마나 지켜지고 있나?

그렇다면 이 권장 최고속도는 얼마나 잘 지켜지고 있을까요? 직접 이용하면서 느낀 것은 ‘거의 의미 없다.’였습니다. 무제한 구간에서는 140km/h 이상은 기본이고, 추월 차로인 1차로의 경우는 시속 200km/h를 넘게 질주하는 차들을 흔하게 만날 수 있습니다. 말 그대로 무제한 구간을 마음껏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2009년에 연구 발표된 독일 자료를 보면 아우토반 A9 무제한 구간의 경우 운전자의 60% 이상이 권장 최고속도 130km/h를 넘겼으며, 이용자 30%의 평균 속도는 150km/h였습니다. 평균 속도가 150km/h라는 것은 부분적으로 순간 가속이 시속 200km/h를 넘겨야 나올 수 있습니다. 얼마나 빠르게 달리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무제한 구간임을 알리는 독일의 교통 표지판


아우토반의 어쩌면 유일한 아킬레스건

오일쇼크의 어려움에 몇 개월 제한속도가 적용되기는 했지만 그때를 제외하면 아우토반은 속도 제한 없이 달릴 수 있는 유일한 도로로 남아 있습니다. 물론 과거에 비해 제한속도 구간이 늘어난 것은 사실입니다. 또 속도 제한에 찬성하는 독일인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전체를 제한구간으로 만들기는 여전히 쉽지 않아 보입니다. 유권자들이 아우토반 속도 제한을 공약으로 내건 정당을 집권당으로 만들지 않을 테니까요.   


그나마 현재까지는 환경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가 유일한 변수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이런 이유로 제한속도 구간이 늘어나기도 했죠. 하지만 요즘처럼 배출가스에 민감한 시기에도 아우토반에서는 별일 아니라는 듯 엄청난 속도로 자동차들이 질주하고 있습니다. 규칙 지키기에 철저한 독일인들이라지만 아우토반의 권장 최고속도는 별 다른 의미가 되지 못합니다. 아우토반을 두고 유일한 자유의 공간이라 외치는 그들에겐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