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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자동차 세상/독일의 자동차 문화 엿보기

미친 차 포르쉐 917이 일으킨 나비효과


오늘은 자동차 한 대가 독일 자동차 역사의 많은 부분과 기묘하게 연결 되어 있다는, 나름 신선해 보이는 이야기 한 편을 준비해봤습니다. 왠지 이런 내용 준비할 때면 뿌듯한 느낌도 막 들고 그렇습니다만 ㅎㅎ, 어쨌든 오늘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자동차 917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 보겠습니다.


71년형 포르쉐 917 사진=favscar.com

 


자동차 한 대에 올인한 젊은 엔지니어


1960년 대 중반, 20대 후반의 새파랗게(?) 젊은 자동차 엔지니어 한 명이 회사 사운이 걸린 프로젝트를 몰래 진행을 하게 됩니다. 메르세데스나 BMW 등, 큰 규모의 자동차 회사들과 자동차 경주 대회에서 당당히 맞설 수 있길 바랐던 그 청년은 당시 폴크스바겐으로부터 보조금을 받으며 신차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수준의 작은 회사 포르쉐가 감당할 수 없는 계획을 준비했던 것이죠. 그가 바로 현 폴크스바겐 그룹의 이사회 의장 페르디난트 피에히였습니다.


20대에 포르쉐 개발담당의 자리에 오른 페르디난트 피에히는 외할아버지 페르디난트 포르쉐의 기술적인 유전자를 가장 잘 물려 받은 젊은 천재 엔지니어였습니다. 또 집안 전체적으로 볼 때도 대학에서 기계 기술과 관련한 학위를 가지고 있는 유일한 먹물(?)출신 기술자이기도 했죠. (대학원 과정까지 8학기 만에 졸업)  기술적인 부분에서 자신감이 있다 못해 철철 흘러넘치던 이 젊은이는  세계적인 경주용 자동차를 만들어 그것으로 포르쉐라는 브랜드를 한 단계 이상 끌어올리겠다는 야심을 실행에 옮기게 됩니다.


그는 자서전에서도 포르쉐라는 회사가 불가능이란 없다는 이미지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 하에 이 일을 저질렀다고 고백을 한 바가 있습니다. 바로 포르쉐 최고의 작품 중 하나로 불리는 917을 25대 만들어 내는 일이었죠. 



왜 25대였나?


그 당시 포르쉐가 917로 도전할 경주 대회의 규정은 국제자동차연맹의 등급에 따라 결정이 되는데 917은 양산형 스포츠카로 분류되었고, 이를 위해선 25대 이상의 판매 가능한 모델이 있어야 출전 허락이 되는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물론 기술 위원들의 꼼꼼한 검사를 통과해야 하는 마지막 관문도 남아 있었고요. 


그런데 문제는 페르디난트 피에히가 생각하는 917은 당시 포르쉐라는 회사의 능력으로는 개발 비용이 감당이 안되는 수준이었어요. 폴크스바겐에서 레이싱 자동차 개발 비용을 주는 것만으로는 (전체 개발비의 2/3 부담) 택도 없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이 차를 성공적으로 만들기 위해선 회사의 모든 자본이 투입이 되지 않으면 안되는 그런 도전이었습니다. 까딱 잘못하다간 회사가 날아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죠.


피에히는 자서전에서 당시 포르쉐 회장이자 외삼촌이던 페리 포르쉐 (페르디난트 포르쉐의 아들) 의 허락을 받았고, 이미 삼촌도 이 계획을 승인했다고 말을 했지만 다른 자료들을 보면 안팎에서 모두가 반대를 한 프로젝트였고, 나중에 페리 포르쉐는 917 문제로 페르디난트 피에히에게 엄청나게 화를 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나마 마무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피에히의 엄마이자 포르쉐 박사의 딸인 루이제 피에히의 도움이 있어 가능했죠.



괴물차 포르쉐 917  


일단 피에히가 계획한 917의 대략적인 그림은 이러했습니다. 우선 1969년 제네바 모터쇼에 공식 데뷔를 시켜야 했습니다. 출전할 경주 대회 규정이 발표된 게 1968년이니까 몇 개월밖에 안되는 시간에 규정에 맞는 917을 만들어야 했죠. 시간에 쫓기는 상황이었고 당연히 최종 목표는 르망 24시간 내구레이스에 출전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준비한 엔진은 4.6리터급 12기통 공랭식 엔진이었습니다. 공기로 엔진의 열을 식히는 공랭식 엔진을 달고 판매에 열을 올리던 폴크스바겐은 비틀 판매가 주춤할 때 피에히가 공랭식 엔진으로 레이싱 카에 관심을 보였고, 917을 통해 공랭식 엔진의 우수성을 알려 비틀의 홍보의 수단으로 쓰고자 생각했습니다.


어쨌든 이렇게 이해 관계가 맞아 떨어지긴 했지만 개발 당시 엄청난 속도에서 양력이 증가해 차가 떠오르는 현상을 막아내는 일이 문제였습니다. 거기다 경주에서 차량의 무게 제한이 있었기 때문에 차체 중량을 최소화 해야 하는 문제도 있었죠. (나중엔 800kg까지 줄였다고 하는군요) 결국 첫 공식 경기에 나가기 위해 마련된 첫 번째 917은 560마력에 토크 460Nm의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됐습니다. 


1969년 제네바 모터쇼 현장. 917 바로 옆(좌측)은 포르쉐 레이싱팀 드라이버 중 한 명인 게르하르트 미터이고 우측에 웃고 있는 남자가 바로 페르디난트 피에히다. 당시 917 프로젝트에 불만이 가득했던 페리 포르쉐 회장 등 주요 인사들이 나타나지 않았다고.



웃지 못할 에피소드들


우여곡절 끝에 차들은 완성이 되었지만 그 해 르망 레이스에 출전을 하기 전까지 제대로 된 실전 테스트를 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습니다. 테스트를 통해 문제를 찾아내고 차에 대한 적응력을 드라이버들이 키워야 했지만 그게 거의 이뤄지지 못했던 겁니다. 더 문제는, 당시 포르쉐를 대표하는 헤르베르트 링이나 한스 헤르만 같은 레이서들은 이 차 운전에 자신이 없었다는 건데요.


시속 300km/h가 넘어갈 때의 불안감과 고속에서의 다루기 어려운 것 등이 드라이버들은 두려움을 느꼈고, 팀 레이서들은 아직 무리라며 반대를 하게 됩니다.  무리를 해서 투자한 바람에 재정적 어려움까지 끼쳤고, 더군다나 검증이 안된 상태로 과연 경주 대회에서 제대로 된 성과를 낼 수 있을지 의문시 되었던 917은 첫 해 기계적 문제로 제 성적을 못 내고 이듬해와 그 다음해인 70년 71년, 결국 르망 대회에서 우승하는 극적인 결과를 얻게 됩니다.



1969년 자동차 경주 연맹 기술위원들에게 917을 검사받고 있는 피에히 (왼쪽 끝) 모습. 25대의 자동차들 중 대다수는 기어 1단밖에 없는 트랜스 미션이 들어가 있는 등, 달릴 준비가 안돼 있었다. 그냥 통과를 위해 차량 숫자만 맞춘 것. 사진 출처=월즈카팬스닷컴



놀라운 기록, 하지만 깊어진 갈등


917은 멕시코 출신 드라이버와 스위스 출신 드라이버를 만나며 극적으로 르망 내구레이스에서 첫 번째 우승을 차지하게 됐습니다. 24시간 동안 달린 총 주행거리는 4607킬로미터였고 평균속도는 시속 192km/h였습니다. 71년 우승 당시엔 총 주행거리가 5,335km에 평균 시속 222km/h까지 내게 되었는데요. 917 롱테일 타입은 직선 구간에서 시속 387km/h까지도 낼 수 있었습니다.


72년부터 73년까지 북미 캔암 레이싱에서도 우승을 하면서 917은 그 당시 최고의 레이스카로 뜨거운 사랑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이처럼 잘 나가고 있을 때 폴크스바겐은 개발 비용 지원을 중단하게 되죠. 앞바퀴 굴림의 수랭식 엔진으로 차들을 만들기로 결정을 내렸기 때문에 더 이상 뒤에 엔진이 들어가 있는 뒷바퀴 굴림의 공랭식 차량에 지원을 할 이유가 없어진 것입니다.


거기다 외가와 친가 모두로부터 페르디난트 피에히는 917 프로젝트로 인해 심각한 비판을 받아야 했습니다. 회사가 재정적으로 휘청이든 말든 최고의 차를 만들겠다고 곳간을 다 비운 피에히가 왜 못마땅하지 않았겠어요.(당시 917 한 대 판매가격이 911 10대 가격 수준) 결국 이 일로 이전부터 회사 경영권을 둘러싸고 벌인 포르쉐 가문 내 엄청난 갈등은 최고점에 달하게 되고, 결국 외가와 친가 후손 누구도 경영에 참여하지 않고 전문 경영인을 두는 것으로 최종 합의를 보게 됩니다. 


69~71년까지 활약한 917k의 모습. 사진=favscar.com


다양한 모습과 개선된 성능으로 포르쉐의 전설로 남은 917. 사진=favscar.com



▶쫓겨나듯 물러난 피에히, 그러나...


페르디난트 피에히는 더 이상 포르쉐에 머물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떠나야 했죠. 이미 그가 회사를 떠난다는 소식을 접한 많은 업체들은 그의 재능을 높이 사 손을 내밀지만 개발비 생각 안하고 무모하게 도전하는 그에게 마음껏 개발을 하라고 맡기는 곳은 없었습니다. 


그러다 벤츠에서 개발고문 역할을 하게 되는데요. 그 때 그는 다임러 측에 5기통 엔진 승용차를 만들라는 제안을 하게 됩니다. 4기통과 6기통 사이에서 가격과 공간의 부담을 해결할 수 있다는 제안이 이뤄졌고 실제로 그는 엔진 제작을 지휘하며 5기통 엔진 5개를 납품하게 됐죠. 이후 여기서 나온 기술을 토대로 5기통 디젤 엔진이 장착된 화물차를 다임러는 출시하게 됩니다. 


잠깐동안의 벤츠와의 인연을 뒤로 한 피에히는 막 뜨기 시작한 자동차 디자인 전문 업체 이탈디자이너의 사장 조르제토 주지아로를 만나 디자인에 대한 공부를 하게 되죠. 35살의 두 동갑내기 젊은 천재들은 이때부터 평생의 우정을 쌓게 되는데요. 이미 그 당시 골프나 시로코 등의 디자인을 하고 있던 주지아로를 통해 피에히는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폴크스바겐 그룹의 최고 책임자의 자리에 있던 피에히는 2010년 이탈디자인을 인수해 VW 그룹의 지원 아래 두게 했습니다.


그리고 앞서 5기통 엔진을 다임러 측에 제안했다고 했는데요. 피에히는 결국 이 5기통 엔진을 아우디에서 본격 적용하게 됩니다. 피에히가 개발을 진두지휘하며 승용 사륜인 콰트로 개발과 함께 5기통 엔진을 십분 활용한 것입니다. (최근까지 아우디 TT 모델에 5기통이 적용되고 있음) 그리고 917을 만들며 깊어진 차량 경량화와 공기저항 등에 대한 관심 또한 아우디에서 꽃 피우게 됐습니다. 


917을 제작하며 깊어진 경량화에 대한 관심은 아우디에서 활짝 꽃을 피웠고, 아우디를 성장시킨 그는 결국 지원금을 주며 간섭하기 좋아하던 폴크스바겐 자동차의 수장으로 자리를 옮기게 됩니다. 그리고 포르쉐 가문의 결정에 따라 전문 경영인 체제로 바뀐 포르쉐는 벤델린 비데킹이란 탁월한 경영자를 통해 엄청난 성공을 거두게 되고, 비데킹을 앞세운 볼프강 포르쉐 (페리 포르쉐의 막내 아들이자 피에히의 사촌)의 공룡(VW그룹) 인수 작전이 펼쳐지게 됩니다.


하지만 피에히가 버티고 있던 폴크스바겐 그룹은 극적으로 포르쉐를 집어 삼키게 되면서 수십 년을 이어온 가족 간의 경쟁은 막을 내리게 됩니다. 만약 페르디난트 피에히가 917을 만들지 않았다면, 그래서 쫓겨나듯 포르쉐를  떠나지 않았다면 독일 자동차의 역사는 지금과는 또 달랐을 겁니다. 자동차 한 대가 일으킨(?)  파동은 기묘하게 여러가지 일들을 만들어 냈고, 결국 피에히로 시작된 이야기는 이렇게 피에히로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80세를 코 앞에 둔 피에히 의장은 지금도 독일 자동차 업계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사진=FAZ.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