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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읽는 세상

난 새벽 첫 버스를 생각하면 항상 부끄러워진다


옛날엔 밤새 술 퍼마시고 언제 그랬냐는 듯 3~4시간 자고나 또 다시 저녁에 술 약속을 잡는 객기를 부릴 정도로 철도 없었지만 한편으론 희안하게 해독력도 좋았습니다. 세상에 무슨 원수가 져서 그리도 술 마실 핑계는 끝없이 솟음쳤는지요.  지금이야 독일 맥주 독해 그런지 바이젠 2잔이면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버리고, 술 마친 티를 동네방네 뒷집 헬무트 할배네까지 낼 정도로 순한 술꾼으로 변해버렸답니다.

 십수 년 전부터 20년도 더 된 시절의 이야기를 하다 보니 이와 관련해 한 가지 부끄러운 고백같은 이야기로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기억을 더듬어 적어볼 테니 그냥 일기장 슬쩍 본다 생각하시고 읽어봐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새벽 공기가 그닥 상쾌하지 않다. 초겨울로 접어드는 쌀쌀함만 생생할 뿐. 많이 마셨지만 외관상으로 난 전혀 밤새 술을 마신 몰골이 아니다. 이제 곧 있으면 첫 버스가 올 텐데...주머니를 털어봤다. 먼지가 많이 나왔고 그리고 나온 동전들...다행히 버스비는 딱 되는가 보다.   

지난 주 강남역 근처에서 수철이 생일 축하한답시고 모여 '때는 이 때다!' 싸구려 케익 하나 없이 우린 술독에 빠져버리고 말았지. 그게 미안했던지 성대 근처 사는 종혁이가 지 자취방으로 다시 그 날의 멤버들을 불렀던 것이다. 이게 어제 저녁의 일이다. 자취방에 들어서자 헉! 빅파이로 만든 생일케잌이 있다. 촌스럽다. 군발이 때 고참들이 생일 축하해준 그 따스함과는 다른,  비릿하고 끔찍한 재현이다. 군대의 것은 군대에만 남기자 제발.

여자친구 있는 2명이 빠진 나머지는 결국 종로로 자릴 옮겼다. 딱히 정해놓은 곳은 없었지만 그냥 가면 된다. 왜? 천지가 술집이니까... 평일밤이었음에도 우리같은 인간들 차~암 많다. 저들도 다 술을 마시기 위한 거창하고 위대한 이유들을 품고 잔을 꺾겠지?  도대체 이 시간에 소주와 사랑에 빠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걸까? 

몇 군데 기웃대다 결국 인사동 초입에 있는 치킨집으로 간다. 그렇게 약간 늦게 시작된 술타임은 뭔 놈의 수다들이 그리 많은지 자릴 옮겨서도 계속된다. 옮긴 곳은 결국 작정하고 들어간 피맛골...맛 되게 없지만 확실하게 시간 눈치 안 보며 술을 마실 수 있는 곳이 아니던가. 우린 다시 제 2의 전쟁터에서 소주와 전쟁을 치른다. 그리고 이 전쟁은 이제 익숙해진 일상처럼 12시를 넘긴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변명은 딱 하나! 어차피 지금가면 택시타야 하는데 그 돈 아깝다. 그냥 그 돈으로 마시고 첫 차, 첫 지하철 각 자 타고 가자는 것... 누가 이 지혜로운 판결에 거부를 할꼬. 

세상 짊어지자는 이야기, 누가 가장 행복한 놈이 될 것인가, 우린 정말 죽이는 연애해야 하지 않겠냐 등...언제나 술판에서의 대화는 철학과 역사, 경제 그리고 연애 등이 어설피 버무려진다. 그 때쯤 항상 테이블에 머리 처박고 자고 있던 친구 한 녀석이 고갤 번쩍 든다. 걔가 고갤 든다는 것은 첫 차 시간이 다 되어 간다는 것. 우린 각 자의 집을 향한다. 그렇게 지금 첫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온다!

맨 뒷좌석이 좋은데 이미 왠 아저씨가 무표정하게 앉아 있다. 괜히 조용한 버스 안에서 입맛을 크게 다신 후 적당한 곳에 구겨져 앉는다. 밖에선 못 느꼈는데 술 냄새가 진동한다. 숨을 쉬는 게 아니라 술을 쉬는 것 같다. 그래도 히터의 따스한 기운이 기분 좋게 해준다. 풀린 눈으로 주변을 둘러본다. 아무도 요동없이 앉아 있다. 가만히 한 명 한 명 살펴본다. 어린 친구는 아무리 봐도 나 밖에 없다. 다 삼촌 고모 아니면 아버지 어머니 뻘. 양복을 입고 있지도 곱게 투피스를 차려 입은 직장여성의 분위기도 아니다. 단정은 하지만 기름기 없은 푸석한 옷차림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 언제나 첫 차를 탈 때마다 느끼는 점이었다. 첫 차의 분위기는 무겁지도 그렇다고 밝지도 않았다. 모두 무표정했고, 무언가 일찍 하루를 시작해야 하는 일을 업으로 삼은 사람들 뿐이었다. 노동을 하러, 공공건물을 청소하기 위해, 건물 관리인으로... 이들은 새벽부터 자신의 일을 위해  매일 이 버스를 타고 있다. 그 속에서 나는 술냄새에 찌든 채 집으로 기어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남들의 성스런 하루의 시작 속에 난 하루를 마감하고 있다. 그것도 술과 함께. 비스듬히 기댄 자세를 고쳐 앉는다.  엉덩이를 의자 뒤로 깊숙히 넣고 어깨를 차창 쪽으로 좀 더 돌려 창밖을 본다. 그리고 아주 슬쩍 차창에 머릴 가져다 댄다. 눈을 감는다. 속으로 읊조린다. 난 지금, 정말 제대로 가고 있는 걸까?...... 』



어느 순간부터, 아마도 이 날 이후가 아닌가 싶습니다. 첫 차나 첫 지하철을 거의 타지 않게 되었죠. 생활이 환경이 바뀌면서였기도 했을 테지만 분명한 건, 첫 차를 이용하는 사람들을 술 취한 눈으로 더 이상 쳐다보기 어려웠습니다. 버스에 몸을 싣고 무표정하게 삶을 내달리는 그 분들은 대체로 가난한 행색이었고, 고단한 주름이 깊게 박혀 있기 일쑤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런 버스 안에서 술냄새 풍기며 하루를 마감하고 있었던 겁니다. 미안하기도 했고, 창피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안타까움도 같이 마음에서 일었죠. 

                '왜 첫 차의 풍경은 가난이 밑그림이 되어야 하는가?' 싶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