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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스케치

현대사의 가장 위대한 공수작전을 아십니까?

 

이 역사적 사건은 1948년 독일, 베를린에서 벌어진다.

 

1945년 5월 독일이 2차 세계대전에서 항복을 선언한 뒤, 프랑스, 영국, 미국, 그리고 소련은 전쟁을

 

승리한 승전국의 위치에서 독일을 4분할 관리감독하게 된다. 즉, 서방민주주의와 마르크스 레닌주의

 

를 따르는 인민주의의 두 갈래로 독일은 찢어지게 된 것이다.

 

 

위의 지도에서 보는 것처럼 분할 점령된 지역 중에서도 베를린은 특이하다. 소련의 권역에 있지만

 

독일을 분할한 것처럼 베를린 역시 동베를린은 소련이, 서베를린은 서방 3국이 역시 나눠 감독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동서로 나뉜 베를린 지도>

 

 

섬처럼 소련의 점령지역 하에  외롭게 박혀 있는 서베를린. 그렇다면 어떻게 서방3 국이 점령하고

 

있는 다른 지역으로의 왕래가 이뤄질 수 있었을까? 서베를린은 소련과 서방3국과의 합의 하에 서베를

 

린 주민들이 기타 자유진영으로의 왕래가 가능하도록 세 군데의 도로를 터주었고, 그 도로와 철로를

 

통해 불안한 왕래가 이뤄지고 있었다. 그리고...승전4국의 분할통치 중 드디어 문제가 터진다.

 

1948년 6월, 서베를린을 제외한 독일 내 모든 서방 연합국 점령지역에 새로운 화폐인 독일 마르크화가

 

도입된다. 이에 대응해 소련은 동베를린을 포함한 자국 점령하의 모든 지역에 오스트 마르크를 도입

 

한다. 그러자 서방 연합국들은 서베를린에도 새로운 마르크 화폐를 유포했다. 이 화폐개혁의 갈등으로

 

드디어 소련이 서방 측에서 베를린으로 통하는 육로와 수로를 봉쇄해버린다. 서베를린은 이제 완전히

 

갇혀버리고만 것이다. 이 때, 미국의 루시우스 클레이 장군은 기발하고도 무모해 보이는 작전을

 

계획한다. 바로 베를린에 비행기로 필요한 생필품을 봉쇄가 풀릴 때까지 공수하자는 내용이었다.

 

클레이 장군을 묘사한 당시 시사만평 (1949년)

 

 

언제 끝날지도 얼마나 많은 비용이 들지도 어쩌면 소련과의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를 위험한 작전은

 

끝내 1948년 6월 25일, 감행된다.

 

이 베를린 공수작전은 자그마치 11개월이나 계속, 매일 이뤄졌다. 420대의 비행기가 매일같이 3~4분

 

간격으로 베를린을 향해 이륙했고, 총 비행 횟수는 자그마치 27만 회에 달했다.

 

 

총 211만 톤에 달하는 공수물자 중 67%는 석탄, 24%는 식료품 그리고 나머니 9%는 원자재였다.

 

서방의 끊임없는 공수와 외교적 협상을 통해 결국 소련은 이 봉쇄조치를 1949년 5월 12일 해제하게

 

된다. 이 사건을 통해 서방측 독일인들은 미국, 영국, 프랑스에 대한 활동을 높이 평가하기에 이르고

 

이 것이 계기가 되어 점령지역은 동맹지역으로 변화를 맞는다. 그래서일까? 독일은 영국과 더불어

 

가장 미국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에 관심이 높고 개방적인 국가가 된다.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였든, 소련과의 대결에서의 무조건적인 승리를 위해서였든, 어떤 이유였든 간에

 

이 공수작전은 이데올로기를 넘어선 숭고한 가치로 역사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