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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자동차 세상/독일의 자동차 문화 엿보기

BMW 오너 남매는 어떻게 독일 최고 부자가 됐나

아마존의 제프 베조스,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 등은 재산이 100조가 넘는 세계 최고의 부자들이죠. 이들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독일 최고 부자들 또한 상상하기 어려운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습니다.

2019 1월 독일 통계청이 발표한 독일 최고 부자 순위를 보면 1위에는 약 335억 달러(37 5천억 원)의 재산을 가진 저가형 마트 브랜드 알디 소유주 베아테 하이스터와 카를 알브레히트 주니어 남매의 이름이 올랐고, 역시 알디와 비슷한 할인 매장인 리들 소유주 디터 슈바르츠가 218억 달러로 2, 3위는 카를 알브레이트와 베아테 하이스터 남매의 사촌으로 역시 알디 소유주인 테오 알브레히트 주니어였습니다.

그리고 4위는 독일에서 가장 부유한 여성으로 꼽히는 주산네 클라텐(한화 약 23조 원), 5위에는 우리 돈으로 약 21조 원을 가지고 있는 슈테판 크반트가 이름을 올렸습니다. 그런데 4위와 5위에 있는 이름, 혹시 아시겠습니까? 자동차에 관심이 많은 분이라면 들어 봤을지도 모르겠는데요. 두 사람은 BMW 자동차 그룹의 대주주이며, 동시에 친남매이기도 합니다.

BMW 대주주이자 감독이사회 멤버, BMW 헤르베르트 크반트 재단 이사이자 그 밖에 여러 기업을 소유하고 있는 슈테판 크반트 / 사진=BMW

특히 슈테판 크반트는 만 15세 때 아버지가 물려준 BMW 지분 17.4%를 소유하면서 억만장자의 대열에 합류해 화제가 됐습니다. 누나 주산테 클라텐은 현재 BMW 그룹 지분 20.9%를 보유하고 있고, 동생 슈테판 크반트는 25.83%의 그룹 지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두 사람 모두 BMW 그룹 감독위원회에 속해 있지만 오너 일가가 경영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전통을 따르고 있습니다. 표면적으로는요.

창립 100주년 행사 당시의 주산네 클라텐 / 사진=BMW


나치, 괴벨스 그리고 크반트 가문

이렇게 50대 남매가 독일 최고의 부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BMW를 위기에서 살린 것으로 잘 알려진 헤르베르크 크반트(Herbert Quandt)가 아버지였기 때문입니다. 1910년에 태어난 헤르베르트 크반트는 병으로 일찍 죽은 형을 대신해 아버지 사업을 이복동생인 하랄트 크반트와 이끌어가게 됩니다. 무려 200여 기업을 거느린 크반트 그룹은 나치와도 떼래야 뗄 수 없는 관계였는데요. 특히 선전선동의 대명사로 불리는 요세프 괴벨스와도 특별한 인연이 있는 집안이었습니다.

다소 복잡한 크반트 가문과 괴벨스, 그리고 나치와의 연관성은 귄터 크반트라는 인물을 빼놓고는 얘기가 되지 않습니다. 1881년에 태어난 귄터 크반트는 섬유산업으로 엄청난 부를 쌓은 외가 덕에 부잣집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사업에 대한 열정 또한 대단해 섬유산업은 물론 광업회사, 기계 금속 가공 회사를 소유한 것은 물론, 자동차 회사 다임러 벤츠와 BMW의 지분도 보유하게 됩니다.

귄터 크반트 / 사진=위키피디아 & 독일 기록보관소

그러나 사업 열정이 너무 지나쳤던 모양입니다. 마그다 릿첼이라는 여성과 마흔이 넘어 두 번째 결혼을 하지만 그의 일 중독에 지친 릿첼은 남편과 헤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녀는 나치당 행사장에서 자원봉사를 하다 만난 새로운 남성과 결혼을 하게 되는데 귄터는  흔쾌히(?) 그녀가 결혼식을 자신 소유지에서 치를 수 있게 합니다. 마그다 릿첼은 남편의 성을 따 이름을 마그다 괴벨스로 바꾸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선전선동부 장관 요제프 괴벨스의 아내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전처의 결혼을 사업 확장을 위한 연결고리로 삼은 것일까요? 귄터 크반트는 히틀러가 총재로 선출된 후 나치당에 가입합니다. 그리고 그는 각종 사업에서 당의 도움을 받죠. 전쟁이 터지자 방위산업에 뛰어들어 많은 돈을 벌게 됩니다. 하지만 독일의 패전으로 전쟁은 끝이 났고, 나치당원이자 군수물자를 제작하던 귄터 크반트는 당연히 전범재판소에서 재판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2년도 채 안 된 1948년 석방된 것입니다. 요즘 기준으로 보자면 훨씬 더 긴 감옥생활을 해야 했던 그였지만 단순한 나치당원이었다는 것으로 결론이 난 것입니다. 이 운 좋은 남자는 이집트에서 휴가를 보내던 중 73세의 나이로 사망합니다.

귄터 크반트의 사업은 그가 감옥에 가기 전부터 첫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헤르베르트 크반트가 이끌어가게 되죠. 그리고 귄터에게는 두 번째 부인이었던 마그다 릿첼과의 사이에서 얻은 하랄트 크반트라는 아들이 한 명 더 있었습니다. 공군 장교로 전쟁에 참여했다 1944년 포로가 된 하랄트는 3년 후에 석방이 되고, 대학에서 기계 공학을 공부한 그는 형 헤르베르트 크반트를 돕습니다.

괴벨스와 마그다, 그리고 자녀들 모습. 맨 위 군복을 입고 있는 남자가 하랄트 크반트 / 사진=위키피디아 & 독일 기록보관서


BMW를 택한 헤르베르트, 그리고 성공

이들 이복형제에게는 당시 다임러 벤츠 주식 10%, BMW 주식 30%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1959년 역사적인 BMW 총회가 열립니다. 계속된 실적 악화로 다임러의 인수가 유력한 상황에서 합병을 거부하고 자생을 외친 노조의 요구를 받아들인 헤르베르트 크반트는 주변 만류에도 가지고 있던 다임러 주식을 팔아 그 돈으로 BMW의 주식을 50%까지 늘리며 회사를 위기에서 구해냅니다.

이후 파울 한네만, 또 에버하르트 폰 쿠엔하임 같은 전문 CEO 등의 도움을 받아 BMW는 위기를 극복하고 지금의 세계적인 자동차 회사로 성장할 수 있게 됩니다. 헤르베르트의 결단이 아니었다면 BMW는 어쩌면 지금쯤 다임러 자회사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헤르베르트 크반트의 이복동생 하랄트 크반트 부부가 사망한 후 딸들은 다임러 주식 등 많은 재산을 물려받게 되죠.

그리고 하랄트의 딸들은 보유하고 있던 다임러 주식을 쿠웨이트 정부에 팔게 됩니다. 이로써 다임러와 크반트 가문의 인연은 완전히 끝을 맺게 됩니다. 현재 BMW의 대주주인 슈테판 크반트와 주산네 클라텐은 헤르베르트의 세 번째 아내의 자식들이죠. 여러 자식이 헤르베르트에게 있었지만 마지막 부인과 그 자녀에게 회사 경영권을 물려주고 떠났습니다. 그나마 두 번째 부인과 사이에서 낳은 막내 스벤 크반트가 BMW의 지원을 받아 개인 랠리 팀을 이끌고 있을 뿐, 다른 이복형제들은 비교적 조용하게 각자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헤르베르트 크반트(사진 오른쪽) / 사진=BMW


영원히 지울 수 없는 나치 부역의 역사

하지만 이 엄청난 부잣집에게도 지울 수 없는 과거가 있습니다. 나치와의 협력 과정에서 수용소 재소자들을 불법으로 강제노동에 동원한 것입니다. 2016 BMW는 창립 100주년을 맞아 2차 대전 당시 나치 시대 군수 공장 여러 곳에서 수용소 재소자들을 강제 노역에 동원한 사실이 '가장 깊은 후회'로 남아 있다며 사과했습니다. 이미 2011년 슈테판 크반트가 과거 나치의 수용소였던 곳을 방문해 강제노동자들을 위한 기념관을 설립하겠다고 약속한 뒤 두 번째 공개적인 사과였습니다.

그러나 2007년 독일 공영방송에서 방영된 한 다큐멘터리가 아니었다면 과연 이런 사과를 했겠느냐는 목소리도 당시 참 많았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의 BMW를 있게 한 귄터 크반트는 대단한 사업가였지만 반대로 사업의 성공을 위해 무슨 짓이라도 했던 사람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나치의 지원 아래 크반트 집안의 부는 쌓아졌고 곤고해졌습니다.

독일 언론 보도에 따르면 슈테판 크반트와 주산네 클라텐 남매는 대주주로 지난해 5월 약 1 5천억 원의 배당금을 받았다고 합니다. BMW가 파산을 하지 않는 이상 크반트 가문도 무너질 일도 없겠죠. 할아버지부터 이어진 엄청난 부의 세습이지만 한편으로는 원죄처럼 나치 부역의 역사 또한 크반트 가문을 계속 따라다닐 겁니다. 원하든 원치 않든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