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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자동차 세상/독일의 자동차 문화 엿보기

자동차 블랙박스로 고민 중인 독일, 그리고 한국

얼마 전 입이 떡 벌어지는 소식 하나를 접했습니다. 독일의 한 운전자가 2년 동안 약 5만 건에 달하는 다른 운전자들의 교통법규 위반 장면을 차량 블랙박스에 담아 이를 경찰에 제출한 것입니다. 모두 범칙금 대상이니 처벌을 해달라는 게 해당 운전자의 요구였다고 하는데요. 그런데 뜻밖의 결과가 나왔습니다. 블랙박스 제공자에게 오히려 죄가 있다고 결론 내린 것입니다. 어떻게 된 일일까요?

독일의 연방정보보호청은 해당 운전자가 피해를 입지 않았음에도 직접적 상관이 없는 다른 운전자 모습과 차량을 상대의 동의 없이 촬영한 사실을 정보보호법 위반으로 봤습니다. 이에 블랙박스를 제공한 사람이 다시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고, 이 문제를 다룬 괴팅겐 법원 역시 연방정보보호청 승소 판결을 내렸습니다.

차랑용 블랙박스 / 사진=GARMIN

소식이 전해지자 개인정보를 보호해야 한다며 법원과 정부의 판단이 맞다고 옹호하는 사람들과 교통법규를 지켜야 한다는 점에서 블랙박스 제공자의 행위가 불법이 아니라는 쪽으로 갈렸습니다. 블랙박스 영상을 제공했다는 행위는 나쁘지 않지만 5만 건이라면 촬영한 사람에게 문제가 있는 거 아니냐는 기타 의견들도 볼 수 있었죠.


독일 블랙박스 사용의 고민

이처럼 독일은 차량 블랙박스에 대해서 우리와 다소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위에 소개한 남자의 경우처럼 과도한 촬영뿐 아니라, 동의하지 않은 타인의 얼굴이나 차량 번호판 등을 SNS 등에 올리는 것을 법으로 금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블랙박스를 사용하는 것까지는 불법으로 규정하지 않고 있지만 영상을 공유한다거나, 또 증거자료로 법적 효력을 갖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이죠.

예외는 있었습니다. 2015년 니엔부르크 법원은 한 운전자가 블랙박스에 담은 영상을 법적으로 인정해줬는데요. 가해자 차량이 뒤쪽에서 바짝 붙어 운전을 하자 이에 위협을 느낀 피해 차량 운전자가 블랙박스로 상황을 녹화하기 시작했고, 시비가 붙은 두 차량이 5분 정도 후에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 바로 블랙박스를 껐기 때문에 최소한의, 직접적 상황만을 담았다고 본 것입니다. 

하지만 같은 법원이지만 판사에 따라 다른 판결을 내리기도 하는 등, 여전히 블랙박스 영상의 법적 효력에 대해 명확하게 명문화되어 있지 않아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이처럼 독일이 차량용 블랙박스 사용을 제한하는 이유는 앞서 밝힌 것처럼 강력한 개인정보보호법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인데요. 올해도 교통법 관련한 세미나에서 이 블랙박스 문제를 가지고 토론을 벌였지만 명쾌하게 답을 내리진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진=픽사베이


차량용 블랙박스 허용하는 나라 금지한 나라

그렇다면 차량용 블랙박스를 허용하는 곳과 그렇지 않은 곳들은 어디일까요? 자료를 좀 찾아봤더니 의외로 블랙박스 사용을 법적으로 허용하고 있는 곳이 많았습니다. 

블랙박스 허용국 : 영국, 프랑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러시아, 이탈리아, 몰타, 네덜란드, 노르웨이, 스웨덴, 스페인, 세르비아, 호주, 대한민국, 그 외


블랙박스 사용금지 강력 권고국 : 벨기에, 룩셈부르크, 포르투갈, 스위스


블랙박스 사용 완전 금지국 : 오스트리아

확인된 블랙박스 사용이 허용된 나라 중에는 조건이 붙은 경우도 있는데 독일과 같은 곳이 대표적입니다. 블랙박스를 구매하고 사용은 하되 이를 공개하거나 법적 증거로 사용하는 것이 기본적으로는 안 됩니다. 심지어 공권력조차 최소한의 범위 안에서 사용해야만 합니다.

스위스 역시 개인정보보호에 굉장히 민감한 곳이어서 공공장소 등에서 블랙박스를 사용하는 것을 권하지 않습니다. 또 룩셈부르크는 블랙박스를 소유할 수는 있지만 녹화를 하다 걸리면 구금까지도 각오해야 하고, 영상을 캡처하는 것도 금지시키고 있습니다. 오스트리아 같은 경우는 아예 차에 블랙박스가 달려 있으면 경찰에 걸릴 수 있는 그런 완전 금지국가인데요. 벌금만 우리 돈으로 최대 1,200만 원이 넘는다고 하네요.

미국도 블랙박스를 허용하는 주가 있고 사용을 금하는 주가 있습니다. 물론 허용하는 나라들 모두, 영상 속 개인정보가 불법적으로 유통되거나 나쁜 의도로 사용 되는 것은 금지시키고 있습니다. 독일도 이처럼 차량 블랙박스 사용이 이뤄지고 있는 나라의 상황을 분석하며 블랙박스 활성화를 허가해야 하는지, 또 한다면 어디까지 이를 인정해야 하는지 계속 고민 중입니다.

실제로 독일에서 블랙박스 사용량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는 상황인데요. 하지만 여전히 개인의 사생활 보호의 측면에서 강하게 제한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블랙박스의 실용적 가치와 개인의 정보를 보호해야 한다는 윤리적 가치 사이에서 과연 독일 정부가 어떤 접점을 찾아낼지 궁금하네요.


우리나라는 독일 반대의 경우

독일이 정보보호법으로 인해 블랙박스가 활성화되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나라는 그와는 반대의 경우라 할 수 있겠죠. 블랙박스가 이미 수백만 개 팔려 자동차에 달려 있고, 보험회사는 블랙박스 사용을 권장하고 있습니다. 영상을 통해 신고하면 범칙금을 물릴 수도 있습니다. 사고 예방이나 법규를 지키기 위해 적절하게 블랙박스가 사용되는 경우라 하겠는데요.

하지만 부작용도 있습니다. 불특정한 다수가 인터넷 등을 통해 블랙박스에 찍힌 영상을 어렵지 않게 공유합니다. 얼굴이나 자동차 번호 등, 개인 정보가 인터넷 속에서 피촬영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이런 영상은 얼마든지 악용될 소지가 있습니다. 결코 소홀히 다룰 문제가 아닙니다. 결국 정부는 '개인영상정보보호법'의 입법을 추진하기로 했습니다.

블랙박스나 드론 등에 찍힌 자신의 얼굴이나 기타 정보의 삭제를 요구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이는데요. 이미 있는 개인정보보호법을 보강하고 세밀하게 다듬는 수준에서 추진하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또 이 법이 규제를 강화시켜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지 역시 조심스럽게 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에서 차량용 블랙박스나 하나 사 올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하곤 합니다. 하지만 앞서 밝혔듯 여전히 독일은 개인정보보호라는 차원에서 블랙박스 사용을 최소한만 허용하고 있습니다. 찍힌 영상을 토대로 비공식적인 선에서 교통사고 문제를 해결하는 등, 효과를 보고 있다는 증언들도 꾸준히 나오고 있고 판매량도 늘고 있어 독일 정부도 블랙박스 활성화 문제를 마냥 외면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사생활 보호 역시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이는 블랙박스가 활성화된 우리나라에서 더 큰 문제일 수 있습니다. 아무쪼록 블랙박스의 가치를 인정하는 선에서, 하지만 잘못 영상이 사용되지 않게끔, 그렇게 사회윤리와 실용성이 잘 조합된 합리적 제도가 되었으면 합니다. 독일과 한국 모두에게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