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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자동차 세상/독일의 자동차 문화 엿보기

노인 운전자 사고 느는데 눈치보는 정치권

독일 신문이나 뉴스 등에서 가끔 노인 운전자의 운전 미숙으로 인해 인명 사고가 났다는 소식을 접할 때가 있습니다. 며칠 전에도 84세 운전자가 브레이크 페달을 밟아야 하는데 가속 페달을 밟아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던 사람들을 향해 돌진한 사고가 있었죠. 이 사고로 두 명이 숨지고 여러 명이 다치고 말았습니다.

제가 독일에서 처음 접했던 노인 운전자의 사고 소식 하나도 아직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내리막 커브 길을 달려오던 차가 제 차로를 유지하지 못하고 이탈, 길 가던 사람이 차에 치여 사망한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사고 차량을 몰던 운전자는 70대 노인이었고 사망자는 운전자와 잘 아는 동네 이웃이었습니다. 평범하게 살아온 인생이 한순간의 실수로 돌이킬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사진=tuev-sued 제공


노인 운전자 위한 운전 테스트 제조 도입 목소리 높지만

정치권에선 표 의식

운전문화 교통시스템 등에 배울 점이 많은 독일이지만 이해가 잘 안 가는 부분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이 나라에는 면허 적성검사가 없다는 겁니다. 한 번 면허증을 발급받게 되면 별문제가 없는 한 면허 갱신은 물론 적성검사를 받지 않습니다. 당연히 노인 운전자에 대한 적성검사도 없는데요.

그나마 트럭의 경우 5년에 한 번씩 엄격하게 운전 적성 여부를 점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운전을 하면 안 되는 수준의 건강 상태를 보이는 노인 경우라도 자신이 원하기만 한다면 언제든 운전대를 잡을 수 있는 게 독일의 현실입니다. 이에 대해서 예전부터 꾸준히 일반 운전자는 물론 노인 운전자들을 위한 강화된 적성검사가 있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었지만 웬일인지 정부는 꿈쩍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독일 정부는 안전운전은 나이와 상관이 없다는 입장입니다. 통계에 따라서는 노인 운전자가 흔히 위험 그룹이라 보는 18세~24세 운전자들보다 안전하다는 걸 보여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더 많은 자료가 노인 운전자들의 사고율이 오르고 있고, 이들로 인한 사망사고도 증가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최근 독일 주간지 슈피겔이 이 문제와 관련해 설문조사를 실시한 게 있는데요. 그 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질문>  

75세 이상 고령 운전자들을 대상으로 운전 적성검사를 해야 한다고 보나? 예를 들면 주행 테스트 같은 것... (현재까지 설문 참여자 수: 45,254명)


<응답>

▶맞다. 많은 고령 운전자는 도로와 주변 사람들에게 위험하다. (28,073명- 62.03%)


아니, 정부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다. 40년 이상 운전한 사람이 나이 들었다고 갑자기 운전법을 잃어버리는 건 아니다. (4,692명 - 10.37%)


왜 노인들에게만 적성검사가 있어야 하나? 모든 운전자가 5년마다 재교육을 받아야 한다. (11,592명 - 25.62%)


주행 테스트만으로는 부족하다. 75세 이상은 면허증을 반납해야 한다. (897명 - 1.98%)


개인의 책임과 인권 등을 중요하게 여기는 독일이지만 노인 운전자에 대한 부분에서 만큼은 지금보다 더 법으로 강제해야 한다는 의견이 높았습니다. 하지만 정치인들에겐 60대 이상의 표를 무시할 수가 없는데, 슈피겔에 따르면 지난 2013년 독일 선거 당시 투표자의 1/3이 60세 이상이었고 이들의 투표 참여율은 전체 연령대 평균치보다 높았습니다.

결국, 지지층의 이탈을 염려한 여권과 메르켈 정부가 이 문제에 대해 적극성을 보이지 않고 있는 것이죠. 하지만 전체 여론이 노인 운전자 면허 관리 강화 쪽으로 더 쏠리게 된다면 독일 정부도 마냥 이 문제를 외면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뉴질랜드와 일본 등 여러 나라

노인 운전자 관리에 노력

독일의 경우 아예 면허증 갱신이나 적성검사가 없는 나라이지만 많은 나라가 면허증 갱신은 물론 노인 운전자에 대한 강화된 적성검사 기간을 두고 있습니다. 뉴질랜드가 개인적으로는 가장 강력한 정책을 펴고 있지 않나 생각되는데요. 우선 75세가 되면 운전 면허증은 유효기간이 자동 말소됩니다. 

만약 계속 운전을 하려면 면허 갱신 신청서와 함께 의료 증명서를 제출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80세가 되면 면허 기간이 자동 말소되는데 이때부터는 면허 갱신이 2년마다 이뤄지고 운전을 위한 필기 및 실기 시험을 치러 합격을 해야 합니다. 일본은 고령 운전자들에 대한 운전안전 교육을 의무화한 나라인데요. 여기에 치매 검사도 반드시 하도록 해놓고 있습니다. 또 70세 이상 운전자의 자동차에는 '고령 운전자 스티커'를 붙이도록 했습니다. 


일본의 고령 운전자 알림 스티커 / 사진=위키피디아

미국의 경우 주에 따라 조금씩 다른데, 워싱턴주는 70대 고령 운전자들의 경우 시력 테스트를 탈락한 경우 필기와 실기시험을 다시 보도록 했습니다. 그 외에도 여러 나라가 갱신 주기를 연령대별로 달리하거나 의사 진단서를 반드시 제출하도록 하는 등, 전체적으로 노인 운전자의 면허 관리를 보다 엄격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어떨까요?


노인 운전자 사고 급증하는데

제대로 된 제도 안 갖춰져

우리나라는 특히 OECD 기준으로 노인 운전자의 사고율과 노인 운전자로 인한 사망자 수가 매우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최근 노인 운전자로 인한 교통사고율이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다는 내용이 언론을 통해 여러 차례 보도된 바도 있죠. 그럼에도 노인 운전자에 대한 체계적 관리는 제도적으로 마련돼 있지 않은 상황입니다.

몇 년 전 노인 운전자 면허증 갱신이나 적성검사 강화를 행정적으로 검토한 적 있지만 노인 단체의 반대 등으로 없던 일이 되었다는 기사를 접한 적 있습니다. 우리나라 역시 정치적으로 부담으로 느껴 이 문제에 대한 제도 강화가 어려운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요. 하지만 고령 운전자의 면허 관리 강화는 노인 운전자 자신의 안전과 타인의 안전 모두를 위해 적절하게 이뤄져야만 합니다.

2025년쯤이면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의 20%를 넘기는 초고령화 사화로 우리나라도 들어설 것이라고 하죠. 지금부터 이런 고령화 시대에 맞는 면허 관리 시스템이 마련이 되어야지 경로당 등을 찾아가 안전교육하는 수준에 머물러서는 점점 심각해지는 노인 운전자들의 사고 (노인 보행자 사고까지도)를 제대로 대처할 수 없습니다.

정부는 이 부분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노년층의 이해를 구하고 도로 시스템 역시 고령화 시대에 맞게 개선이 되는 방향에서 만들어져야 합니다. 언젠간 자율주행 시대가 이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장밋빛 청사진에만 기댈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 당장 우리 도로의 안전을 위해, 그리고 부모님들의 안전을 위해, 적극성을 보여야 합니다. 입에 달기만 한 정책보다는 입에 쓰더라도 몸에 좋은 그런 정책이 마련되기를 기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