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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자동차 세상/독일의 자동차 문화 엿보기

폭스바겐을 살려 낸 점령군 장교 이반 허스트

제네바모터쇼에 등장한 갖가지 신차에 자동차 팬과 업계의 관심이 쏠려있는 동안 폴크스바겐은 조용히 오래된 흑백 사진 한 장을 자신들 미디어 사이트에 올려놓았습니다. 신차 소개하기도 부족할 메인 페이지에 말이죠. 그리고 사진 속 주인공에게 'THANK YOU'라며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폴크스바겐이 진심을 담아 기념하고 있는 이는 영국 육군 보급단 소속의 이반 허스트(Ivan Hirst) 대령입니다. 아마 이 영국인 장교가 아니었다면, 폴크스바겐은 오래전 공중분해돼 자동차 역사 속에서 잠시 언급되고 말 그런 회사가 됐을 겁니다. 오늘 폴크스바겐의 은인이랄 수 있는 이반 허스트에 대한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이반 허스트 / 사진=폴크스바겐


서른 살 소령, 볼프스부르크 공장을 책임지다

히틀러가 벙커에서 자살을 하기 약 2주 전, 그러니까 독일이 항복을 선언하기 전이었던 1945년 4월 중순, 미군은 'KDF 자동차 도시'라는 좀 특이한 이름의 지역을 점령하게 됩니다. 카데에프(KDF)는 나치의 문화 및 레져 조직 '기쁨을 통한 힘(Kraft  durch Freude)' 을 뜻합니다. 그리고 '카데에프 자동차'는 바로 히틀러가 그토록 원했던 국민차를 생산하기 위해 만들어진 자동차 회사 이름이었습니다. 

'카데에프 자동차'는 나중에 폴크스바겐이라고 사명을 바꾸게 되고, '카데에프 자동차 도시'는 볼프스부르크라는 새로운 지명을 얻게 됩니다. 1939년 5월 이 공장의 기공식이 열렸지만 그 후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결국 자동차가 아닌 군수품을 만드는 공장으로 바뀌는 운명을 맞게 됩니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 연합국의 폭격으로 공장 일부가 심하게 파괴되기도 했죠.

무너진 공장을 점령한 미군들 눈에 우선 들어온 것은 차량 생산용 부품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군용차량 수리 등을 위해 공장을 가동하게 되는데요. 하지만 연합국 일원이었던 영국의 점령지에 있던 볼프스부르크는 미 9사단으로부터 영국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영국은 이 공장을 분해해 영국이나 미국 기업에 팔아 넘길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어느 곳도 엉망인 이 공장을 거들떠보지 않았습니다. 

공장의 매각과 전차 수리 등을 위해 영국군 책임자가 공장을 찾아오는데, 그가 바로 서른 살의 소령, 이반 허스트였습니다. 하지만 이반 허스트 눈에는 폴크스바겐 공장은 단순히 정비소로 쓰기엔 너무 아깝게 보였습니다. 특히 공장 착공과 함께 포르쉐 박사가 미국에서 가져 들여온 가공 기계들이 연합국 폭격에도 무사했고 생산되다 만 군용 지프 '퀴벨바겐' 등이 남아 있었습니다.

당시 영국 육군 보급단 단장이었던 래드클리프 대령과 논의 끝에 이반 허스트는 군용차량을 일반 자동차, 그러니까 지금의 비틀로 개조해 보기로 합니다. 특히 영국 본토에서 점령군이 이용할 차량에 대한 지원이 늦어지고 있었고, 이반 허스트는 이 상황을 이용해 매우 싼 값에 영국군에게 비틀을 제공하겠다고 말해 2만대의 비틀 주문을 받아내게 됩니다.


분할 매각 실패한 공장, 독일로 넘어오다 

전쟁 직후 비틀 생산하기 시작한 폴크스바겐 공장 모습 / 사진=VW1945년 여름에 공장 책임자로 부임한 이반 허스트 소령은 같은 해 12월 말 첫 번째 비틀이 공장에서 만들어 냅니다. 당시 이미 공장엔 6천 명 가까운 직원들이 일을 하고 있었는데요. 철판이나 고무 등 원자재 수급이 원활하지 않았음에도 이듬 해 초에 일천 대의 비틀이 공장에서 만들어질 수 있었습니다. 당시 천 번째 비틀을 직접 공장 밖으로 운전해 온 이가 이반 허스트 소령이었죠.

공장은 돌았지만 직원들은 배가 고팠습니다. 식량난이 심각한 가운데 허기진 배를 움켜쥔 공장 노동자들은 열심히 라인을 돌렸고, 1946년 10월에는 1만대의 비틀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비록 싸고 작은 차였지만 폭격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공장에서 기적처럼 생산된 것입니다. 히틀러가 그토록 바랐던 국민차의 대량 생산이 아이러니하게 점령군 소령의 의지에 의해 이뤄진 것입니다.

당시 생산된 비틀은 영국 점령군과 독일 주요 기업 등에 분배됐습니다. 하지만 몰래 개인 간 거래도 비싼 가격에 이뤄질 정도로 인기가 높았습니다. 공장이 본 궤도에 오른 후 매각이 불발되면서 1948년 영국은 독일로 공장을 넘겨주게 됩니다. 이후 1955년에는 백만 대의 비틀이, 또 1965년에는 1천만 대의 비틀이 생산되며 죽었던 공장은 완전히 살아나고, 이후 마이크로버스 불리와 함께 비틀은 라인강의 기적을 만드는 일등공신으로 자리합니다.


1955년 1백만 대 비틀 생산 / 사진=VW


이반 허스트를 향한 VW의 고마움

폴크스바겐을 제대로 된 자동차 공장으로 되살려낸 이반 허스트는 대령으로 승진한 채 공장을 떠나 영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이반 허스트 대령의 선택은 당시 점령군의 필요에 의한 것이긴 했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 그의 의지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폴크스바겐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폴크스바겐은 이반 허스트 대령의 그런 노고를 잊지 않았습니다. 

그의 이름을 딴 상을 만들어 회사 내에서 업적을 세운 엔지니어들에게 매년 수여하고 있고, 볼프스부르크 공장 근처에 이반 허스트 거리를 만들기도 했죠 또 업적을 기리는 자료를 발간하는 등, 지금의 자신들을 있게 한 은인에 대한 예의를 계속해서 갖추고 있습니다.

이반 허스트 대령은 지난 2000년 세상을 떠났는데요. 폴크스바겐의 자료에 따르면 1916년 3월 1일, 또 위키백과 등의 자료에 따르면 3월 4일이 이반 허스트의 태어난 날입니다. 올해가 바로 그가 태어난 지 100년, 그리고 첫 번째 판매용 비틀이 생산된 지 70년이 되는 의미있는 해인 것이죠. 


초심으로 돌아가길

저는 디젤게이트로 도덕성에 크나 큰 상처를 입은 폴크스바겐이 이반 허스트 당시 소령의 요구로 비틀을 만들 수 있었던 그 배곯던 시절을 의미 있게 되짚어 봐야 한다 생각합니다. 물론 눈앞의 이익 앞에 쉽게 의리를 저버리는 세상에서 이반 허스트 대령에 대한 폴크스바겐의 일종의 의리는 분명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를 추념하는 것에서 머물지 말고 흔히 이야기하는 초심으로 돌아가길 바랍니다. 그래서 거대하고 부패한 공룡 기업이 아닌,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던 절박했던 시절의 그 폴크스바겐 공장의 마음으로 새롭게 시작했음하는 바람입니다. 


현재 폴크스바겐 볼프스부르크 공장 전경 / 사진=V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