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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맘대로 말해보기

책 & 밑줄긋기 4

 

세기말이 지나고 한창 '느림'이 열병처럼 우리나라를 뒤덮었던 적이 있었죠. 피에르 쌍소 교수가 쓴 한 권의 책이 기폭제 역할을 했습니다.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현대신서)가 그 것인데요. 단순히 제목만 놓고 보면 자동차 블로그와 상충되는 거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매우 정서적으로 교감이 되는, 그러니까 저의 성향과 맞는 그런 글들이라고 보는데요.

 

오랜만에 끄집어 내 읽으며 많은 부분 공감을 하게 됐죠. 그래서 오늘은 몇 부분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발췌해 봤습니다. 요 며칠 저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이 '느림'의 의미들이 잘 전해질지는 모르겠지만 편하게 한 번 여러분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지칠 줄 모르는 자들이 피곤이 어떤 것인지를 도무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 나는 지극히 불만스럽다. 우리를 강하게 자극하고, 잠을 방해하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훼방놓는 피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전생애를 통해 조금씩 우리의 신체를 점령해서 파고드는 그런 피곤을 말하는 것이다.

 

이 세상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살아가고 있던 어느 날, 우리는 문득 손의 악력이 점점 느슨해지고, 눈가에 주름살이 잡히는 순간을 예감하게 된다.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이 생겨나는가? 그것은 그동안 이 세상에서 우리가 맡았던 과제를 잘 해낸 덕분에 나타나는 결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피곤이란 것은 육체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피곤이 찾아올 때, 우리는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며, 필연이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다른 기쁨들과 마찬기지로 우리 안에 그 피곤 역시 조금씩 키워 왔던 것이다. 이 피곤은 우리가 노력으로 얻어 온 것들을 다시 검토해 보고, 기억해 보며, 우리의 육체 속에 새로이 확인시켜 놓는다.

 

피곤한 얼굴과 신체가 고귀해 보이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우리의 육체가, 감동적일 정도로 진지하게 다시 우리 눈에 그 모습을 정직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무너지는 순간이 아니라, 정신이 근육의 움직임과 뒤섞이는 그런 순간마다.- 시간에 쫓기지 않기 위하여 中


 

무엇을 말하고 싶어하는 사람과 그 말을 진지하게 들으려는 사람, 이 두 사람의 만남은 말하자면 하나의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어쩌다 운 좋게 이루어진 것으로서, 미처 기대하지도 못했던 기분 좋은 사건이다. 하지만 이건 순전히 내 느낌이지만, 절박한 상황에 처했을 때를 제외하고는 이런 행복한 만남이 계속 일어날 수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것이다.

 

그런 경우는 아주 우연일 뿐이다. 말하는 사람은 진심을 털어놓고 말할 용기를 가져야 하고, 듣는 사람 쪽에선 진심으로 귀를 기울이는 마음 자세를 가질 때만이 그런 만남이 가능하다. 그렇게 서로 준비된 사람들이 만나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 듣기 中


 

자, 그렇게 다시 세상의 분주함 속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당신에게 한 마디. 당신이 살게 될 도시와 갖게 될 직업, 삶을 함께 할 미래의 배우자, 친구들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 반드시 지혜의 안내를 받을 수 있기를! 만일 당신이 선택한 도시가 이런 도시라면 어떻게 될까?

 

항상 왁자지껄, 들썩들썩, 야단법석인 분위기 속에서 아침마다 새로운 얼굴들을 토해 내고, 쉴새없이 수많은 문화 활동들을 만들어 내는 도시, 어떤 때는 단단히 경계 태세에 들어갔다가 또 어떤 때는 항복 자세로 바뀌고, 그러다가 다시 불쑥 저항의 깃발을 들이대는 식으로 끊임없이 그 모습을 바꾸어 가는 도시. 

 

그런 도시에서 살게 된다면, 당신은 넘쳐나는 수많은 시간들을 결코 피해 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다 보면 그런 분위기에 차츰 길이 들게 될 것이고, 마침내 그런 분주한 삶을 좋아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결국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시간들, 그냥 순수하게 지속될 뿐인 그런 시간들에서 맛볼 수 있는 행복을 깡그리 잊어버리게 될 것이다. 

 

그때 당신은 '순수'라는 것이 지니는 의미를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부인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순수시를 침묵에 가까운 시로, 순수한 정치를 무능력한 권력으로, 순수한 처녀를 불감증에 걸린 여인으로, 순수한 종교를 결코 만날 수 없는 신에 대한 공허한 행동으로 받아들이게 될지도 모른다.- 고급스러운 권태 中

 

느림은 민첩성이 결여된 정신이나 둔감한 기질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들의 모든 행동 하나하나가 다 중요하며, 어떤 행동이든 단지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에서 급하게 해치워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우리의 일상적인 삶이란 거의 모두가 무의미한 일들로 채워져 있는 것이 아니던가?

 

물론! 하지만 샤를 줄리에는 그와는 반대되는 생각으로 우리에게 경고한다. 만일 그의 말이 옳다고 생각된다면, 우리는 살아가는 방식을 좀 바꿔야 할지도 모른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행동을 제대로 완성해야 한다. '심지어' 평범한 일상적인 일까지도, 아니 '심지어' 라는 표현보다는 '그 무엇보다도' 라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예를 들면 문을 여는 일, 편지를 쓰는 일, 정성스럽게 손을 내뻗는 일, 집중하여 주의를 기울이는 일 등을 마치 세상의 운명과 별들의 운행이 그런 일에 달려 있기라도 한 것처럼 정성스럽게 완수해야 한다." - 글쓰기 中

 

가치 있는 사람? 우리는 타인들보다 더 많은 은총을 누리는 것이 우리의 성공을 의미하며, 우리가 뛰어난 존재임을 뜻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타인을 유혹하고 부패시키고, 우리를 인정하게 만들려는 온갖 시도들이 생겨난다. 우리에 대해 타인들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와 본래 우리의 모습이 서로 같다는 생각도 그와 같은 그릇된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러한 일반적인 믿음에 저항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나는 끊임없이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은 능력을 지니고, 더 나은 가치를 지니고 싶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이같이 욕망은 인간이 존재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는 애정이 결핍되었을 때 나타나는 결과이다. 우리를 이같은 광기와 상스러운 무지로부터 벗어나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곧 절제라는 태도이다. - 모데라토 칸타빌레 中


 

 

그러나 나는 내 길을 선택하기로 했다. 바로 느림이 존재하는 영역이다. 나는 굽이굽이 돌아가며 천천히 흐르는 강의 한가로움에 말할 수 없는 애정을 느낀다. 그리고 거의 여름이 끝나갈 무렵, 마지막 풍요로움을 자랑하는 끝물의 과일 위에서 있는 대로 시간을 끌다가 마침내 슬그머니 사라져 버리는 9월의 햇살을 몹시 사랑한다.

 

또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얼굴에 고귀하고 선한 삶의 흔적을 조금씩 그려가는 사람들을 보며 감동에 젖는다. 시골의 작은 마을 카페. 하루의 노동을 끌어낸 사내들이 가득 채운 포도주 잔을 높이 치켜든 채 그 붉고 투명한 액체를 가만히 응시한다. 지그시 바라보다가 드디어 조심스럽게 입으로 가져가 마시는 모습은 경건해 보이기까지 한다. 

 

수백 년이 넘는 아름드리 나무들, 그들으 수 세기를 이어 내려오면서 천천히 자신들의 운명을 완성해 간다. 아주 천천히. 그것은 영원에 가까운 느림이다. 느림. 내게는 그것이 부드럽고 우아하고 배려 깊은 삶의 방식으로 보여진다. (중략)

 

어쩌면 우리의 이성은, 어쩔 수 없는 현대의 상황 앞에 그냥 굴복해 버리고 말자고 속삭이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반대로, 아무런 이유도 없이 허둥지둥 바쁘게 움직이는 생활로부터 결연히 벗어나자고 말하고 있지는 않는가? 내게 후자의 길을 택해야 한다고 등을 떼미는 아주 단순한 이유가 하나 있다.

 

원칙적으로 말하자면, 정신 없이 시간에 쫓겨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처럼 바쁘게 살아온 대가로 그동안 고이 아껴서 잘 감아왔던 자유로운 시간의 실뭉치들을 언젠가는 조금씩 풀어가며 누릴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많은 과제들 때문에 시달리는 일 없이, 오직 자신만을 위해서 살 수 있는 그런 자유로운 시간을. -머릿말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