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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자동차 세상/Auto 이야기

EU 디젤 배출가스 규정 합의, 로비에 무릎 꿇어

지난 수요일, 독일 언론들은 EU 28개 회원국의 전문가들이 브뤼셀에 모여 디젤차의 배출가스 측정 방법과 기준을 합의했다는 보도를 했습니다. 당시 소식을 접하지 못했던 저는 목요일 이 내용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는데요. 한 마디로 뜻밖의 결과였습니다.


실주행테스트 합의

그러나 기준은 후퇴

유럽연합은 이미 2017년 9월부터 새로운 연비측정법(WLTP)을 적용하기로 결정을 했었죠. 제조사들의 강한 로비로 인해 그 시기가 다소 늦춰질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습니다만 일단 2017년으로 확정이 되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런데 디젤차의 배출가스 측정의 경우 실제 도로에서 이동용배출가스측정장치(PEMS)를 달고 실시하는 RDE(Real Driving Emission) 방식을 적용할지 말지에 대해서는 유동적인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폴크스바겐의 디젤 배출가스 조작 스캔들이 터졌습니다. 분위기는 급격하게 디젤 배기가스 기준 강화 쪽으로 기우는 듯 보였죠. 우리나라의 모 언론과 인터뷰를 했던 EU 집행위원회 부위원장 마로스 세프코비치는 강한 어조로 당장 내년부터 강화된, 그러니까 RDE 방식이 적용된 측정법을 적용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발언과는 다른 분위기가 유럽 내에서 감지되기 시작했습니다.


EU 집행위원회는 이달 초 회원국에 배출가스 규제 방안이 마련된 공문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중순까지 의견을 달라고 했죠. 예상대로 실제 도로에서 테스트를 하는 RDE 방식을 통해 현재 EURO6 기준(질소산화물 80mg/km) 이하를 달성해야 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독일 이태리, 스페인, 오스트리아, 그리고 상당수의 동구권 국가 등은 현실적으로 이는 어려우니 80mg/km의 3.3배까지는 질소산화물 배출을 허용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북유럽과 네덜란드 등은 집행위원회의 안에 찬성했고 프랑스도 찬성하는 입장에 섰습니다. 또 답변을 보내지 않은 국가들도 있었죠. 회원국의 입장에 따라 반응은 사뭇 달랐습니다. 다시 제조사와 자동차 제조 협회 등은 2.7배라는 다소 낮춰진 안을 제시했습니다. 하지만 이 역시 반영이 안된 듯합니다. 업체들의 로비가 실패로 돌아가고 결국 원안대로 새로운 배출가스 기준이 마련되겠구나 싶었지만 실제 합의 내용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2017년 2.1배 2020년 이후 1.5배로 확정

회원국 전문가들로 구성된 EU 자동차기술위원회는 우선 디젤차 배기가스는 실내 측정과 실제 도로 측정(RDE)을 모두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테스트 중 한 곳에서라도 기준에 벗어나면 유로6 인증을 받을 수 없도록 했죠. 여기까지는 예상한 그대로입니다. 그런데 질소산화물을 리터당 80mg인 현재의 기준보다 후퇴한 내용으로 통과시켰습니다.


우선 2017년 9월 1일부터는 새롭게 인증을 받는 차량의 경우 현재 배출 기준의 2.1배를 넘지 않도록 했습니다. 80mg x 2.1이니까 168mg/km가 되겠군요. 또 2020년 1월부터는 1.5배, 그러니까 120mg/km를 넘어선 안됩니다. 이 기준은 새롭게 인증을 받아야 하는 신차들에 대한 것이고, 2017년 9월 이전에 이미 유로6 인증을 받은 자동차들의 경우 각각 2019년 9월 1일과 2021년 1월로 1년씩 적용이 늦춰졌습니다. 이번 결정된 사항은 한-EU FTA에 따라 그대로 우리나라에서도 적용되게 됐습니다.


사진=VW


현실 반영인가

로비의 결과인가

독일 자동차산업협회(VDA)는 이번 합의를 "매우 야심찬" 결정이라며 높이 평가했다고 독일 일간지 디차이트가 보도했습니다. 하지만 유럽의회 녹색당 소속 대표 레베카 하름스는 "냉소적인 결정이다. 폴크스바겐 사태를 통해 독일 정부는 배운 게 전혀 없다" 고 강력하게 비판했습니다. 또 디차이트는 그린피스 등의 반응도 전했는데 "정치인들이 유럽인들의 건강에 돌이킬 수 없는 해를 가져오는 결정을 했다"고 했습니다.


그 외에 슈피겔 등도 자동차 회사의 로비가 통했다며 이번 합의에 비판적인 기사를 싣기도 했습니다. 반대의 목소리도 있었는데요. 현실을 반영한 배출가스 규정이 마련되었다는 기사도 나왔고, 현행 유로6 기준은 현실을 무시한 조건이었을 뿐만 아니라 자동차 업계에 너무 큰 부담을 안기는 것이었다는 일부의 의견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독일 네티즌들은 일단 자동차 회사들의 로비가 결국 정치인들에게 통했다는 쪽에 의견을 내고 있었습니다. 미국의 디젤 배기가스 기준은 디젤차를 팔지 말라는 말도 안되는 수준이며, 그나마 유럽의 기준이 미국 보단 나았지만 이 역시 제조사들로서는 달성하기 쉽지 않은 것이었다는 반론도 있었습니다. 어쨌든 배출량 기준이 후퇴한 것은 제조사들의 치밀한 로비의 결과였을 거라는 점에 대해선 대체로 공감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이번 질소산화물 배출 기준 확정을 놓고 이런 저런 말들이 벌써부터 나오고 있는데요. 제조사들의 로비와 그 내용을 보면서 한 가지 알게 된 것이 있다면, 그 동안 현행 규정의 허술함에 기대 유로6 기준치를  맞추는, 일종의 형식적 숫자 놀이만 했지 실제로 도로를 달릴 때는 이 기준을 제조사들은 지키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만약 실제 주행에서도 80mg/km를 지킬 수 있었다면 이런 로비가 필요 없었을 테니까 말이죠. 


이 와중에 독일의 자동차 전문지 아우토빌트는 <디젤 자동차를 지금 구입하겠습니까?>라는 제목의 설문조사를 벌였는데요. 현재까지 18,607명이 참여해 그 중 30%(5,634명)가 "유로6 기준이라면 구매하겠다" 라고 답했고, 30%(5,655명)는 "절대 디젤은 사지 않겠다" 고 답했습니다. 나머지 39%(7,318명)는 "뭐가 됐든 상관없다. 중요한 건 연비다." 라고 답했습니다. EU의 한 발 물러선 질소산화물 배출기준 확정 소식, 그리고 디젤에 대해 여전히 우호적인 것같은 이번 설문 결과가 묘하게도 겹쳐 보입니다. 디젤이 어쩌면 생각 보다 더 오래 살아남을지도 모르겠군요.